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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2:04:56

침례회/신학


1. 개요2. 신앙의 자유
2.1. 유아세례 부정2.2. 가장 엄격한 정교분리
3. 만인제사장 원칙
3.1. 성경 해석의 자유
3.1.1.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
3.2. 민주적 교회정치
4. 보수적 신학
4.1. 원인 : 성경의 명료성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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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침례회는 타의가 아닌 본인의 의지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신자들에게만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아세례를 거부한다.
* 침례회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있으며,[1] 신앙과 설교에서 성서의 역할을 중시하고 복음주의적이다.
* 침례회는 강단을 중앙에 두고 강대상을 옆에 두는 전통적 교회 건축 양식을 기피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회중의 주의를 성찬식에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보는데, 침례회는 성경 봉독과 성경에 대한 설교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침례회는 고정된 예전에 비판적이다. 예전은 신앙을 틀에 맞추고 정형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중시한다.[2]
* 침례회는 성직자를 '목사' 혹은 '목회자'라고 부르며, 신부나 사제라는 말을 거부하고 감독제 교회 정치를 거부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3]의 침례회 신학 묘사.

장로회 신학의 핵심원리를 칼비니즘(Calvinism) 이라고 한다면, 침례회 신학을 관통하는 일관된 핵심 원리이자 가장 큰 특징은 신앙의 자유(Soul Liberty)와 만인제사장 원칙이다.

침례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침례교단에는 신학이 없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조금 잘못된 표현이다.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게 신앙이고 신앙을 연구한게 신학이므로 어떤 신앙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일단 신학의 범주 안에 들어있게 된다. 따라서 신앙이 있는 이상 신학이 없을 수는 없고 '신학의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교리로 채택하고 있는 특정한 신학이 없는 거다. 이것을 정확하게 다시 표현하면 침례회에는 교리가 없다고 서술할 수 있다.

침례회에 신학이 없다는 사람들과 이야기 해 보면 금방 알게 되겠지만 신학이 없다는 그 사람도 어느 특정한 신학을 개인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교리로 채택한 신학이 없기 때문에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목적인 요리문답도 없으며 신봉하는 핵심 교리를 선언하는 신조나 신경 같은 것은 특정신학을 주입하는 도구로 간주하여 강력하게 배격한다. 따라서 사도신경까지도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교리에서 벗어난 신학을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단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교의를 매우 소극적으로만 규정하기에 정말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종파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하기는 어려운 편이다.[4] 일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신학자들과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해 온 역사가 있으며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장로회에서는 지금도 감리회 교리를 이단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침례회에서는 감리회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일반 침례교인이라고 하며 장로회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특수 침례교인이라고 부르며 하나의 교단으로 공존하고 있다.[5][6]

2. 신앙의 자유

침례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추구한다. 신앙의 자유는 침례회를 침례회로 만드는 핵심사상이다. 침례회 신앙에서 눈에 띄는 주된 특징들은 하나같이 여기서 파생된다. 신앙의 자유 사상에 입각해서 국가나 가정에서 신앙을 강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신앙은 개인의 완전히 자유로운 판단에 따른 진실한 고백에 기반하는 것이지, 가정이나 국가의 전통에 기초를 둘 수 없다고 믿는다. 또한 침례회에서 주장하는 신앙의 자유에는 믿을 자유 뿐만 아니라 믿지 않을 자유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침례교인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때에 만나는 타 종교인과 불신자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자유주의 신학, 성서자유주의, 천주교[7]와 같은 침례회 입장에서 볼때의 기독교 이단[8]에게 조차 그들의 믿음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한다.[9][10]

2.1. 유아세례 부정

장로회에서는 칼빈의 해석을 받들어 부모의 신앙 고백 아래에서 믿음으로 키우는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후손으로 믿고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며 그 유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다시 세례를 주지 않고 문답만을 진행한다. 그러나 침례회에서는 신앙의 자유원리에 기반한 신자의 침례의 원칙에 따라 자유의지로 진술한 신앙고백만을 인정하고 침례를 준다. 그러나 재침례교와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침례회는 주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침례식에도 영적인 의미를 조금도 부여하지 않는다. 주의 만찬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고 되새김으로써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단순한(그러나 극히 중대한 의미가 있는) 기념에 불과한 것 같이, 침례식은 자신의 신앙을 주변에 공표함으로써 나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인 의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의 의문처럼, 침례교 어린이는 성인이 되어 침례를 받기 전에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고, 침례식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을 주변에 공표하는 사회적인 의식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2.2. 가장 엄격한 정교분리

가정과 같은 개인적인 집단은 물론이고 특별히 국가가 신앙을 국민에게 강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국가가 개인의 신앙을 강제하는 영국의 성공회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가장 엄격한 정교분리는 침례교의 몫이 되었다.[11] 침례교의 강력한 정교분리는 당시의 기독교 정권에서 성경해석(교리)의 차이를 빌미로 광범위하게 행해진 종교적 살인과 전쟁을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장치이다. 국가는 전쟁과 형벌이라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이다. 만약 국가의 의사결정에 종교적 이념이 개입된다면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정면에 내세우며 정권 획득을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은 침례회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침례회의 관점에서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12]전통적인 침례회의 신앙에 따르자면, 정치와 종교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 물론, 정치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민감하게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지만, 반대로 정치가 종교에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접근하는 것도 철저히 거부해야 하는 것이 침례회의 신앙 자세이다. 오는 게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좀더 속된 말로 하자면,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말이다. 근대 잉글랜드에서 국교회(성공회)에 반대하여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침례회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해보면, 정치가 종교에 피해를 주든 이득이 되든, 종교가 정치에 얽히는 자체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 침례회 신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종교와 정치 관계에 대한 자세는, 16-17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종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하며 타락한 천주교도 경험하고, 정치가 종교 위에 군림하여 왕의 명령 하나하나에 교회가 영향을 받는 국교회(성공회)도 경험한 끝에 침례회가 낸 결론이었다.[13] 정치와 종교 간의 관계는 어떤 형태가 제일 옳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주제이나, 아무튼 침례회의 입장은, 정치는 '인간'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고, 종교는 그 인간이 창조주를 따라 살게 하는 데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3. 만인제사장 원칙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성경이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하게 진술한 이러한 구절에 근거하여 침례회에서는 만인제사장설을 신앙의 자유와 동등하게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는다. 즉 모든 신자가 성직자다. 장로회만 해도 목사와 장로는 공식적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특별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며, 칼빈의 해석에 근거하여 장로와 특별히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자들과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모든 신자가 말씀앞에서 동등한 지위임을 주장하는 침례회에서는, 칼빈의 해석에 대해서도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의 본문에만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일반 신자를 평신도라 부르며 스스로 제사장 행세를 하는 목회자를 정통 침례교인은 매우 싫어한다.[14] 왜냐하면 모든 성도의 제사장 직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목사가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에 끼어들어 제사장 행세를 하는 이러한 행태는, 율법상 제사장과 하나님 사이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유일한 대제사장 직분을 참칭하는 적그리스도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만인제사장(universal priesthood)이 아닌, 전신자제사장(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목사직을 사도적인 전승이라고 의미부여하는 장로교와 달리 목회자는 남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공부하고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좀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신자일 뿐이다. 그래서 침례회에서는 개별 교회에서 필요한 목회자는 교회내에서 모범이 되는 신자를 선별하여 자체적 또는 위탁을 통해 교육해서 목회자로 삼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되기도 한다.

3.1. 성경 해석의 자유

만인제사장 원칙에 의해 모든 신자가 성소에 출입할 수 있는 제사장이므로 신자들은 말씀에 동등하게 접근하게 된다. 곧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칼빈을 표준으로 삼는 장로교와는 달리 특정인의 특별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침례회에서 특정 신학을 채택하지 않는 이유도 신앙의 자유와 만인제사장 원칙이 결합하여 도출된 '성경 해석의 자유' 때문이다. 침례회에 교리가 없는 것에 대하여 교인들은 우리는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을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다양한 해석의 공존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는 그 가운데 특정한 해석만을 어떤 신학자들이 선택해서 이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가지고 있다. 성경 해석의 자유라는 대의는 모두 수긍하겠지만 일단 교리라는 것이 혹세무민하는 이상한 성경 해석들로부터 신자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신학자들이 싸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다른 교단들에서는 이러한 판단을 신자들을 대표해서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해 주는데 침례회의 정책은 이 판단들을 각각의 신자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성경 해석의 자유를 거꾸로 본다면 신자 개인이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하는 무거운 의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침례교회들은 다른 교회들보다 성경 공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15]

침례교 신학에서 바라보는 교리는 마치 정형외과깁스와 같다. 교리는 신앙의 기초를 확립하고 성경을 이해하는 안목을 길러주어 연약한 신앙이 튼튼해 지도록 도와주는 부목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해서 교리에 의존하면 마치 제거하지 않은 깁스가 관절의 정상적인 운동을 방해하는 것과 같이, 배외주의에 빠져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기 쉽다. 침례교 정신은 교리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불분명하게 진술한 부분을 인간의 해석으로 명확하게 만든 '장로의 유전', 즉 교리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자기 행위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신 이웃사랑의 성경말씀을 모두 폐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새인의 전철을 따라, 예수님께서 피로써 완성하신 이웃사랑의 성경정신, 즉 그리스도의 새계명 보다 교리를 우선하게 되는 것을 최고로 심각하게 경계한다. 그래서 침례교 신학은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교회내의 거짓교사들에 대응할때 보여준 모범을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된 권위의 입증에는 하나님께서 영으로 성도들의 육의 심비에 기록하신 그리스도의 천거편지, 곧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십자가 섬김을 만을 유일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의도는 지극히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교리의 결말은 어쩔 수 없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바리새주의임이 복음서들에서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에 교리가 주는 모든 이점을 전부 포기한다.

장로교의 교리에 기반한 배외주의를 침례교 정신에서 접근해 본다면,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거짓교사들과 맞서기 위해서 자진해서 지불했던 고통스러운 대가를 장로교의 종교지도자들이 동일하게 지고가는 것을 거부하고 연약한 성도에게 떠넘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장로교의 이러한 정책이 진정으로 성경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방법이었다면, 사도바울은 이단에게 넘어간 고린도 교회의 성도를 위하여 애타며 겸비한 태도로 간곡하게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는 대신, 그가 고린도 후서의 말미에 기록한 것과 같이 위엄있고 권위있고 편안하게 사도의 권세를 사용하여 고린도 교회를 파했을 것이다.

장로교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장로교가 채택한 정치정책은, 칼빈이 세르베투스에게 보여준 대로 남아있는 99명의 성도를 위하여 1명의 길잃은 성도를 처형하는 방식이다.

3.1.1.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

침례교 신학은 모든 성도에게 성경해석의 권한을 부여하면서, 침례교인이라면 모두가 확신하고 있는 성경의 충족성과 명료성에 근거하여, 유일하면서도 강력한 안전장치로써 이 원칙을 제시한다. 장로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을 만드는 원칙으로, 장로교는 성경이 불분명하게 나타낸 부분도 명료하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3층천을 오르며 천국의 비밀을 알게된 사도바울조차도 자신의 지식이 청동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것처럼 불분명하다고 서술한 이 구절에 근거해 성경이 모호하게 말한 것을 절대로 명료하게 만들지 않는다. 만약 침례교에서 이단을 정죄한다면 이렇게 모호한 부분을 명료하게 만들겠다고 인간의 해석을 더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80년대 말 소속교단이던 기독교한국침례회에서 이단 결의되고 교단을 탈퇴한 김기동(목사))

이 원리 때문에 장로교가 논증으로 성경의 모호한 부분을 명료하게 선언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침례회는 더이상의 해석을 멈춘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장로교인이 보는 침례교 신학은 허술하고 느슨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단점이 아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침례교 정신은 성경에서 멈추는 그 곳에서 더이상 나가지 않고 멈추는 것이 올바른 신학임을 주장한다.

3.2. 민주적 교회정치

만인제사장 원칙에 의하여 모든 신자들이 평등하므로 교회정치 또한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당회라는 소수의 구별된 선민(지도자)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거부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모든 신자들은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가진다. 이를 회중교회 정치라 한다. 왜냐하면 침례교 정신에 입각할 때,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 가운데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계층의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조직구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모든 교회들은 정치적으로 평등하다.

장로회는 교회 위에 노회를 두고 감리회는 지방회와 감독을 두어 각 교회들이 이들 조직의 관리를 받지만 침례회는 이런 상위조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교단 밑에 지방회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교회들이 힘을 모아 교회 본연의 역할을 더 잘 하기 위해 조직된 지역 연합의 성격이지 노회처럼 권력이 있어서 개교회에 터치를 하거나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교단이라는 것도 다른 교파들과는 성격이 좀 다른데 타 교파에서는 교단이 총회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식의 수직적 정치구조 위에서 일사불란하고 통일된 행동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침례회에서는 일종의 연합회 성격으로 개별 교회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적 권한을 가지며 이를 개교회주의라 한다.

침례회에서는 신학적으로는 여성안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요 장로회에서 여자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금지하는 구절에 근거하여 장로와 목사안수를 거부하며 심한 경우는 학생회나 청년회의 회장도 남자만 맡을 수 있도록 규정하지만 침례회의 목사는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안수가 시행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순수하게 정치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성안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여자 성도는 주일학교의 교사직분 조차도 맏을 수 없게 된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장로교의 경우 성찬론(영적임재설)과 이러한 구절에서는 성경을 완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근거가 불충분한 목사직의 사도적 전승을 성경이 명백하게 이야기하는 만인제사장 선언보다 우선시 한다는 점이다.

4. 보수적 신학

하지만 이런 배경과는 달리 침례회의 신학은 대체로 보수적이다.[16] 미국에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개신교 신학교들은 대부분 남침례회 소속이다. 물론 진보적인 침례교 교단들도 미국과 유럽에는 꽤 있다.

역사를 보면 진보신학에 대한 반발로 보수적 신학교가 세워지는데,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진보적 신학이 유입되어 이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보수적 신학교가 설립된다. 그리고 진보 신학의 유입과 새 보수 신학교 설립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다양한 신학이 늘상 충돌하고 있는 탓인지 침례회에서는 일관되게 보수적 신학이 유지되고 있다. 교리를 거부하는 침례회의 성향은 전술하였듯이 필연적으로 신앙의 혼란을 유발한다. 침례회 신학자들은 구도적인 성경 공부를 통해서 이러한 신앙의 혼란을 극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확신이 남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과 미국의 일부 대형 침례교단들의 침례회 신학의 보수성은 이들이 정통 신학에서 신앙의 혼란을 극복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침례회 신학은 초심자는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혼란의 극복 과정을 통해서 누구보다 확고한 신앙을 선물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신앙이 정말로 진리에 서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위에 서술한 원칙을 따라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반드시 멈출 경우, 신앙고백서들에서 입을 모아 고백하고 있는 성경의 명료성으로 인하여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즉 잘못된 결론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4.1. 원인 : 성경의 명료성 고백

침례교의 신학이 보수적인 핵심 원인은 진보적인 장로교인들과는 달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의 성경의 명료성 진술을 1.6 성경의 충족성[17]에 부가되어 있는, 전통의 권위 배격 선언에 무리하게 억지로 연관지어서, 이에 종속되는 하위 의미로 고백하지 않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1.7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그 자체가 동일하게 평이한 것도 아니며 모두에게 동일하게 분명한 것도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꼭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은 성경의 여기 저기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열려 있어서, 유식한 사람뿐 아니라 무식한 사람도 평범한 수단을 바르게만 사용하면 그것들의 충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고백의 문자적 의미 그대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믿음만 있다면 배경지식이 전무한 어떤 인간이 읽더라도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완전하고, 또한 인간의 추가적인 해석을 조금도 덧붙일 필요가 없이 원문 그대로도 완벽하다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는 인간에게 (기계적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영감하셔서 성경의 모든 구절을 그분의 뜻대로 직접, 완벽하고 완전하게 기록하셨고, 교회를 통해서 그 내용을 현재까지 한치의 변함없이 보존시키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사본의 무오성 주장이 아니다. 인간의 실수로 인한 사본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자신의 계시를 완전하게 보존하셨다는 의미이다.

한국의 예장통합(장로회신학대학교)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진보적인 장로교에서는 완전영감론을 주장한 칼빈이 아니라 바르트의 성경관(부분적 영감설)을 받아들여 성경 전체가 유일무이하며 통합된 하나의 온전하고 완벽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계시들인 하나님의 말씀을 굉장히 많이 담고 있고, 계시가 아닌 사탄의 말도 들어있고, 역시 계시가 아닌 인간의 교훈과 진술도 굉장히 많이 담고있는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무수한 책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가장 많이 들서있는 문서라고 주장한다.# 이 문서에서 기본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칼빈주의 장로교(칼빈의 성경관을 철저하게 따르며 바르트의 신학을 배척하는 합동,합신,고신 등)는 하나같이 침례교와 동일한 의미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있으며,[18] 이들에게 있어 부분적 영감설은 기독교 신앙의 이탈 내지는 거부를 의미한다.[19][20]

침례교의 특징에서 앞서 이야기한 신앙의 자유와 만인제사장 원칙을 성문법, 그리고 이 문단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관을 불문법(모든이들이 하나같이 인정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 조차 없는 자명하고 당연한 원리)에 비유할 수 있다.

교리 대신 성경 자체를 레퍼런스로 삼는 침례교의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침례교에는 부분적 영감설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진보적 장로교 신학자들처럼 독자의 해석에 따라 성경을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로 만드는 것을 인정하는 부분적 영감설이 참이라고 믿는다면, 침례교와 같이 조직화된 교리가 아닌 날것의 성경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원리는 구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좌파 기독교인들처럼 개인이 처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하는 주관적인 영감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다면, 결국 개개인의 주관적인 해석과 판단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 버리는 셈인데, 이는 바로 사사기에서 지적하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죄악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을 전달하는 완전하고 유일한 계시임을 받아들일때, 비로소 오로지 성경에만 의존하는 침례교의 원리가 구현 가능해 진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보수적 장로교는 침례교와 동일한 이 전제 아래에서 유일하고 완전한 뜻을 발견하기 위해 모호한 부분들을 논리적으로 끝없이 파고든다. 침례교는 성경의 모호한 부분은 억지로 파고들지 않고서 모호한 채로 그냥 놓아둔다. 이것을 억지로 풀어내는 것은 성경이 멈춘 그 곳에서 멈추지 않고서 임의로 새로운 길을 더 만들어 내는 행위이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중략)...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바로 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 같은 더 확실한 예언, 의심의 여지없이 명료한 단 하나의 해석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선언하는 성경의 명료성이다.[21]


[1] 미국 (남)침례회는 RSV, NRSV가 자유주의적으로 번역되었다고 해서 채택을 거부하였다. 이래서 생긴 것이 NASB.[2] 침례회에서 인정하는 예전은 '침례'와 '성찬식'(침례회는 주의 만찬이라고 부른다) 뿐이다.[3]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복음주의 신학자[4] 다만, 교의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책을 성경으로 여겨야 할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전통적인 권위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침례회 신자가 보는 66권의 성경 중 그 어떤 책에도 나머지 65권의 목록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토마스 복음서 등을 정경으로 주장했다가는 얄짤없이 이단이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적 권위 그 자체에 대하여 완전한 부정은 아무리 침례회라도 힘들며, 성경의 목록 등에 있어서는 교부들의 권위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침례회 신학은 교의 그 자체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라기보다는, 교의(혹은 권위)에 대한 매우 소극적인 해석에 가까울 것이다.[5] 이는 재미있는 호칭이다. 애초에 칼빈주의가 웨슬리주의보다 오래되었고, 침례회가 성장하던 시기는 웨슬리가 죽은 뒤인 감리회의 태동기와 겹친다. 또한 찰스 스펄젼은 가장 유명한 침례회 설교자이건만 프랑스 위그노의 후손에 스스로도 칼빈주의자인 청교도라 자처했다. 그런데 감리회 신학을 따르는 자들이 일반 침례교인이라 불리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는 침례교의 시초격으로 꼽히는 존 스미스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칼빈주의를 따르는 침례교인들이 분리해서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례교운동에서 먼저 시작된 알미니우스주의 침례교가 일반, 분리된 개혁주의 침례교가 특수라는 호칭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침례교는 구원론보다 교회론을 문제의식으로 삼고 출발했기 때문이다.[6] ...고 하지만 현실은 침례회 신학생에게 자신은 반대편 신학을 믿는다고 이야기 하면 싸우자는 걸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는 상대방을 진정시키고 침례회 정신을 잘 설명해 주자. 그리고 신학의 자유 원칙 덕택에 침례회 신학교에서는 학부 때부터 여러가지 신학을 가르친다. 하나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깊은 공부가 필요한데 학부에서 여러가지 신학을 다루려면 어쩔 수 없이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신학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것저것 다루다 보니 혼란만 가중될 수밖에 없고 신학 공부가 결국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다른 교단보다 월등히 많다. 이는 결국 침례교의 좋지않은 인습인 신학 무용론으로 이어진다.[7] 만인제사장 원칙에 의하면 교황은 물론 일반 사제, 자신을 거스르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등 자신이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하며 성도와 하나님의 중간자 행세를 하는 권위주의 목사들 모두 적그리스도에 해당된다[8] 침례교 신학에 따라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이만희나 교황이나 그 본질은 동일하게 적그리스도에 불과하며 카톨릭과 신천지는 동등하다. 물론 침례교 정신에 따라서 침례교인은 이웃에게 냉정하게 굴어서는 안되나, 만에하나 냉정하게 이야기 한다고 가정하면 그렇다는 거다.[9]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사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가치의 대립은 자연적으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 때문이다. 따라서 침례교인은 자신의 신학은 물론 다른 신학이나 철학 사상들에 대해서도 무지해서는 안된다.[10] 단순히 신학과 철학 사상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을 넘어서 그 의미까지 이해해야 한다.[11] 그러나 현실은 침례회 신학생들도 배우자 조건을 이야기할 때 신앙의 전통을 운운하며, 침례회 목사들이 기독당 홍보에 누구보다 가장 앞장서고 있다.[12] 어디까지가 정교분리를 어기지 않는 선이냐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긴 한다. 단순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나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와 같은 예수의 말씀에 기반하여 경제나 복지 분야의 정책을 펴는 것은 기독교 민주주의의 범주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다. 한 그리스도인 정치가가 예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정치 행위를 하려 노력하는 것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예수를 이용하여 (표를 얻든 명성을 얻든) 무언가 덕을 보려한다면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지,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다.[13] 물론 현재의 천주교는 세속적인 권력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잉글랜드의 군주가 성공회 수장 자리에서 내려온 것도 수백년 전의 일이다.[14] 안타까운 것은 유명한 침례교 목사 가운데에도 이렇게 스스로 제사장 행세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교단만 침례교이지 침례교인은 아니다.[15]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신앙 생활에 적용할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어떠한 관계인지 등, 절대로 사소하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대목들이 성경에는 분명하게 있다. 이 경우 극단적인 해석으로는 다신교적 결론에 도달할 것이며, 반대쪽으로 극단적 해석을 취한다면 '아버지와 아들'로 분명하게 성경에서 표현되는 관계를 부정해버릴 수 있다.[16] 이와 대조적으로, 개신교 중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갖춘 성공회는 정작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 편에 속한다.[17]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 곧 사람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에 관한 그의 모든 뜻은 성경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거나 건전하고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으며, 어느 때든지 성령의 새 계시들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전통들에 의해서 아무것도 거기에 첨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에 계시된 그런 것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이해하는데 하나님의 영의 내면적 조명(照明)(좌파신학에서는 이 하나님의 영을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한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또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교회의 정치에 관하여는 인간의 행위들과 사회들에 공통적인 어떤 사정들이 있어서, 항상 지켜져야 할 말씀의 일반적 규칙들에 따라 자연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에 의해 그것들이 정돈되어야 함을 인정한다.[18] 성경이 완전한 계시임을 부정하는 바르트의 성경관을 받아들이면(유일한 계시라는 것은 이들도 인정한다.), 논리적으로, 타 종교에도 하나님께 속한 참된 원리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고신 소속의 기독교 철학자이자 미국 칼빈신학교의 교수인 강영안 박사 등도 바르트의 성경관을 받아들인 결과, 소속 교단의 신학과 달리 종교 다원주의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성경관에 따르면 인간에 의해서 인간적으로 기록된 성서(성경이 아니다)는 일부의 종교적 진리도 담고 있지만, 저자의 인간적이고 주관적 견해들이 섞여있으므로 특별한 가공을 거쳐야만 진짜 계시(즉 교리)를 추출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있어 날것 그대로의 성서 본문은 절대로 계시가 아니다.[19]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거부했으므로 같은 것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20] 침례회 신학에서는 은사지속론, 은사중단론, 선행은총론, 이중예정론 등이 모두 함께 공존하고 있으나 부분적 영감설만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21] LEE AMOS JOHN, 세일즈맨으로 오신 예수님 : 잃어버린 초대교회의 복음,반석위에서 완성된 이레나이우스의 신정론, 창조와지식, 2023,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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