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는 오늘날 대중들 사이에서 '천한 성씨'로 알려진 7개의 성씨를 이르는 말로, 인터넷에 유포되는 출처 불명의 낭설에 따르면 천(天)은 무당, 방(方)은 목수, 지(地)는 지관, 축(丑)은 소백정, 마(馬)는 말백정, 골(骨)은 뼈백정, 피(皮)는 가죽백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이든 노인들도 청년 시절 이미 알았을 정도며, 언제 생겨났는지 불명이지만 근대화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워낙 논란이 될 용어 이기에 옛날 신문(1920년대~)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1]성씨 등록을 할 때 일반인들은 주인 집의 성을 따갔지만, 특수한 일을 하던 천방지축마골피는 직업에 의해 부여된 성씨라는 추측이 있다. 다만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골씨의 경우, 그 유래라 할 수 있는 강화 골씨가 임진왜란 이전에 참봉과 진사를 배출한 양반 가문이라는 기록이 존재해, 천방지축마골피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2. 사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성씨는 일반 대중들도 성을 갖게 된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 온갖 성씨라는 말에서 유래한 백성(百姓)이 원래는 귀족을 가리키다가 일반 서민을 뜻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유래한다.이때도 천민은 성씨를 쓸 수 없었으나, 임란 이후 조선시대는 여러번의 환란으로 지방 관아에 있어야할 호적이 불타 사라지거나 유실되고, 경제구조가 점차 밑바닥부터 흔들려 신분제가 흔들리고 공명첩의 발행으로 천민들도 조선 후기 족보 위조 현상에 가세하여 주로 몰락한 잔반의 족보를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선 시대 양반 신분의 가치는 매우 높은 것이었고, 무엇보다 양반의 신분은 세습되는 것으로 볼 수 없으므로 그것으로 양반의 신분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 김해 김씨가 가장 많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족보 위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다 한국은 서양의 성씨나 인도 카스트의 근간인 자띠와 비슷하게 직업과 관련된 성씨문화가 아니었다. 성씨는 권위자에게 하사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 직업과는 관련도 적었고 독음이 같은 한자어 성씨의 경우는 그 사람의 본관 추정도 바로 되지 않는다.
이때까지는 그나마 출신지역을 통해 원래 신분을 대충 짐작은 가능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 한국 전쟁 때 일제가 정리한 행정 기록이 상당부분 유실되고 반촌이고 향, 소, 부곡이고 상관없이 피난민이 대량 발생하면서 한반도에 유례없는 인구이동과 혼란이 펼쳐졌고[2], 그렇게 전쟁이 끝날 때 쯤엔 완전히 뒤섞여서 정착하는 바람에 누가 어디 출신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상태에서 종전후 다시 급하게 행정질서를 세우고 인구조사를 하는 단계에서 한국인들의 과거 신분질서같은걸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론은 더 이상 누가 귀족 집안이고 누가 천민 집안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어졌다. 족보가 확실하게 전해내려오고 있다고 하는 몇몇 가문의 출신들도 그의 가문 대대로 유전자 샘플이라도 보관하고 있지 않은 한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추정을 해보자면, 한국에 가장 많은 김, 이, 박, 최같이 인구 집단 대다수를 차지하는 성씨들에 오히려 천민 출신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천민 대부분은 성씨가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갑오개혁(1894년)때 의무적으로 성씨를 만들어야 되면서 그냥 자기 주인의 성씨를 쓰거나 사람많은 성씨로 대거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신분제가 폐지 되었지만 생계 때문에 대부분 그대로 양반 집에서 일을 하며 계속 살았다. 대중매체에도 잘 나오는데 오래 전 부터 1980년대 까지 양반 집안 출신과 천민 출신이 계속 같은 집(기와집)에서 살아오고 천민 출신은 허드렛일을 맡는 장면들이 있다. 성도 둘이 같다. 신분제가 폐지되었어도 생계 때문에 양반제가 남몰래 이어진 것은 오래되지 않은 편이다.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일자리가 많아진 뒤로는 더이상 양반이니 천민이니 의미가 없어졌다. 서양의 고용인과 비슷한 부분이다. 애초에 몰락양반이 아닌 이상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직계 후손들은 당시에도 부유했고, 현재도 부유할 확률이 높다. 대대로 부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3. 기타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 중죄인에게 동물을 뜻하는 성씨[3]가 부여되었긴 하다. 그러나 후대에 전혀 계승되지 않고 모두 성을 바꿨기 때문에 오늘날의 "천방지축마골피"씨들과는 상관없다.다만, 수필가 피천득의 수필 피가지변(皮家之辯)에 의하면 그의 집안은 원래 성씨가 없어서 그의 조상이 제비를 뽑아 성씨를 정했는데, 피(皮) 씨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자 속으로 '(무슨) 피가가 다 있어!' 생각하고, 면직원에게 간청해서 다시 제비를 뽑았는데, 이번에는 모(毛) 씨가 나왔다고 한다. 모 씨도 좋지만, 모(毛, 털)는 피(皮, 가죽)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여 도로 처음에 나온 피 씨를 가져왔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1] 보통 재밌는 유머는 신문에 쓸 수 있지만, 이건 일제시대라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민족이 다른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등이 합쳐져있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폐지되었는데 성씨로 과거 출신 성분을 차별하면 당연히 들고 일어난다.[2] 사실 향, 소, 부곡은 고려시대에나 있었고 조선대에 오면 거의 사라져서, 이미 성종대에 고작 14개 향, 소, 부곡만 남아 있었다.[3]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의 태조가 목천(木川) 지역의 호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우(牛), 마(馬), 상(象), 돈(豚), 장(獐) 등의 짐승의 뜻을 가진 성씨를 부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