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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오양-이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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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棗宜會戰(조의회전)
일본어: 宜昌作戦(의창작전)
영어: Battle of Zaoyang–Yichang
짜오양-이창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중일전쟁의 일부
파일:08f790529822720ebb1053597fcb0a46f31fabb3.jpg
▲ 짜오양-이청 전역도
파일:20130620010152334.jpg
▲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 병사들
파일:guojun_2.jpg
▲ 참호 속에서 전투 중인 국민혁명군 병사
날짜
1940년 5월 1일 ~ 1940년 6월 18일
장소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짜오양 및 이청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png 리쭝런
파일:대만 국기.png 천청
파일:대만 국기.png 장쯔중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소노베 이치로
결과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군의 짜오양, 이청 점령
영향
중화민국의 최대 위기
병력 파일:대만 국기.png 38만명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8만명
피해규모 파일:대만 국기.png 36,983명 사망, 50,509명 부상, 2만 3천명 실종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2,700명 사망, 7,800명 부상

1. 개요2. 배경3. 전력
3.1. 일본군3.2. 국민혁명군
4. 작전
4.1. 일본군4.2. 국민혁명군
5. 경과
5.1. 짜오양 전투5.2. 이청 전투
6. 결과7. 참고 문헌

1. 개요

1940년 5~6월 짜오양-이청에서 국민혁명군 38만명과 일본군 8만 명이 격돌한 전투. 국민혁명군은 이 전투에서 심각한 졸전을 선보이며 참패했고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했던 장쯔중이 전사했다.

2. 배경

이청은 우한과 충칭 사이에 위치한 가장 중요한 내하 항구로, 전시 중국의 수도인 충칭의 문호를 지키고 장강과 남북 각 전역을 교류하는 후방 보급의 거점이다. 또한 짜오양은 이청 맞은 편에 위치한 곳으로 역시 중국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939년 말 국민혁명군이 1939년 동계공세작전을 개시하자, 일본군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일본 육군 중앙부 참모차장이었던 사와다 시게루는 중화민국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본 육군은 중국의 병력을 다소 줄여도 중국군의 공격을 격퇴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중국 주둔 병력의 감축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적 주력의 공격을 받은 제11군의 보고를 받은 이후 중국군이 아직 건재해 있다고 판단되어 즉각적인 대반격을 추진하게 되었다. (...) 그 자주적 공세력을 대외에 천명시킨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적군의 통치역량이 아직까지도 쇠퇴하지 않았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때 일본 육군은 할힌골 전투 이후 소련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85만에 달하는 대군을 소련과의 국경 지대에 배치하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혁명군의 갑작스런 공세에 당황한 일본 정부는 소련의 침략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중국 전선 마저 위태로워질 위험을 우려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충칭의 국민정부와 평화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충칭을 폭격해 국민정부를 압박하기로 결정했다. 이청은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충칭을 직접 폭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일본 측은 이 곳에 비행장을 세운 후 충칭 공습을 감행하면 장제스도 굴복할 거라고 봤다.

4월 10일, 일본군은 제5군의 주력군을 동원해 이청 방면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군사 역량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청을 공략한 후엔 더이상 공세를 개시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1939년 5월, 일본군은 전격적으로 이청 공세를 개시한다.

3. 전력

3.1. 일본군

우한 전투 후, 일본은 갈수록 불어나기만 하는 전쟁비용에 허덕였다.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은 중국 방면에 40개 사단을 투입했다. 하지만 1938년 말에는 65개 사단으로 불어났고 1942년까지 164개 비행 중대 준비 작업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이렇듯 갈수록 불어나기만 하는 군비 확장으로, 1939년 일본정부 예산안에 8억엔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국방비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일본 정부로선 더이상의 재정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이렇듯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전쟁 비용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화북, 화중 지역에 친일 중국인 관료로 구성된 국가를 수립해 중국의 민심을 자신들에게 끌여들이려고 애썼고, 급기야 국민당 내 최대 거물이었던 왕징웨이를 회유해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함으로서 충칭의 국민정부를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난징 대학살로 대표되는 일본군의 악행으로 인해 일본군이라면 이를 갈았을 뿐 그들을 따를 마음 따윈 전혀 없었다. 심지어 과거 장제스와 대립했던 군벌들 조차 일본과 협조할 생각은 전혀 품지 않았다.

중국 민심이 생각만큼 쉽게 회유되지 않자, 일본 정부는 각 부대 내 병력 숫자를 감축했다. 1939년 무렵 상비 사단이나 A급 예비사단(4연대)는 2만 2천명, 새로 차출된 수비 사단(3연대)은 약 1만 5천명으로 줄었고, 독립 혼성여단은 약 6천명에 불과했다. 일본정부는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최대 40만명까지 감축하려 했다. 그러나 군부 내에서 반발이 일었던 데다 1939년 말 국민혁명군의 동계 공세를 겪은 일본 정부는 감축 계획을 포기했고 대본영은 지나 파견군의 이청 공세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이청 공세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이청 공세에 투입된 병력은 4개 사단(제3사단, 제13사단, 제39사단, 제40사단) 8만여 명이었다.

3.2. 국민혁명군


총병력: 6개 집단군 21개 군, 56개 사단, 약 38만 명

4. 작전

4.1. 일본군

일본군 제 11군은 1940년 2월 25일에 <회전지도방책>을 제정했다. 이 작전의 목적은 우기가 오기 전에 한수 양안 지역에서 적 5전구의 주력을 격파하고 장제스의 군대를 더욱 약화시켜 대중 선전, 정치 공작의 진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회전지도방책>은 작전의 진행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최단 기간 내에 준비해서 5월 상순에 공격을 시작한다. 백하 이남에서 좌안의 적을 먼저 포착하고, 이어 의창 부근에서 한수 우안의 적 핵심부대를 철저하게 섬멸한다."

4월 7일 제11군은 <회전지도방책>에 근거하여 더욱 구체적인 작전계획 대강을 수립했다. 4월 10일, 대본영은 "제426호 승인 명령"을 통해 중국 방면 사령관이 5월과 6월에 중국 중부 및 중국 남부의 전투 지역을 넘어서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11군의 작전에선 이청을 공략한 후 이창을 장기 점거할 지에 대해선 사전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본군은 이창 공략 작전을 2단계로 나눠 진행하기로 했다. 1단계는 짜오양 지역의 국민혁명군 제5전구 주력에 타격을 가하고, 2단계는 웨이허강을 건너 이창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단계의 작전 지침은 신속한 공격으로 제5전구의 주력을 수행현, 양양 이북 지역에서 섬멸한 뒤 한수 이서의 중국군을 이청 지역으로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병력 배치는 다음과 같다.
제 3사단(제 40사단 예속 3개 보병대대, 1개 산포대대, 제34사단 예속 2개 보병대대)는 신양 경명항에서 당하 좌선까지를 차단하고 신야 남백하 지역을 공격한다.
제 13사단(제 15사단 예속 4개 보병대대, 22사단 예속 3개 보병대대, 1개 산포대대)은 대홍산을 따라 한수 동안으로 북진해 번성 일대를 우회 포위한다.
제 39사단(제 6사단 예속 3개 보병대대, 1개 산포대대)은 짜오양 정면에서 작전을 개시하고 양익 사단과 함께 포위를 형성한다.

한편, 작전에 투입되지 않은 일본군 각 사단은 중국군을 견제, 현혹하기 위해 공격 전에 중국 진영을 침입해 적의 시선을 잡아끌고, 짜오양 지구에서의 작전이 종료된 직후에 투입된 병력을 원래 진영으로 돌아오게 해 중국군이 2단계 작전이 계획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2단계로 예정된 병력 배치는 다음과 같다.
제 3사단은 양양, 의성 사이 한수 부근으로부터 강을 건너 당양으로 전진하여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한다.
제 39사단은 의성 부근에서 강을 건너 형문으로 진입한다.
제 13사단은 사양진 부근에서 강을 건너 십리포에서 하용 부근까지 진군한 뒤 기회를 노려 이청을 공격한다.

4.2. 국민혁명군

1940년 3월, 국민혁명군은 일본군 11군이 신양과 우한에서 허베이 북서쪽을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4월 10일, 장제스는 제5전구 지휘관 리쭝런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적이 사(沙), 의(宜) 지역을 쳐들어오려 하는 듯하다. 즉시 이를 대비할 배치를 하고 먼저 적을 제압할 준비를 해야 한다. (중략) 제5전구는 적이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가해 적을 제압해야 한다. 탕언보와 왕윤서가 주력을 이끌고 대홍산 양쪽에서 경산, 중샹, 한양 방면에서 적 공세를 시도해 적의 서진 시도를 제압하라. 공격을 시작할 때 전장에서 적의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여 적시에 감행하되, 4월 중순에 공격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일본군이 서쪽으로 공세를 개시하려는 의도는 이청 점령을 기도하는 데 있지 않고 양하 동쪽의 짜오양 일대에서 제5전구의 주력부대를 섬멸한 후 즉시 철수를 하여 전황을 회복하려는 데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군사위원회는 탕언보의 부대로 하여금 양화로에서 적에 정면으로 맞서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고, 다른 주력은 바로 그 지역을 향해 출발하여 빠른 속도로 핑징관, 무승관 방면으로 진군한 후 다시 남쪽으로 향해 광수이, 응산, 화원, 안륙의 적을 공격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적군의 후방 지역을 압박, 위협한 후, 유격대는 적 후방의 교통선을 차단하라. 탕언보 부대의 주력은 적군의 주력이 나아가는 방향을 찾고 그 측면을 공격하라. 아군이 무승관 부근에 도착하고 적군이 여전히 응산, 화원, 무승관 일대에서 나와 싸우고 있다면, 우리군은 속전속결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적군을 격퇴한 후(그러나 정면 결전은 필요없다), 핑한로 동쪽 동북 및 동남쪽 방면으로 군대를 나누어 예산, 황안, 마성, 경부 일대에서 핑한 철도 남쪽 구역에 있는 적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되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이것은 제일 중요한 사항이니 즉시 문서로 보고하기 바란다."
"이번에 적군이 서진한다면, 그 목적은 결코 이청과 짜오양, 번성을 빼앗는데 있지 않고 아군을 타격한 후에 안전하게 물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형세이다. 설령 그중 한 부대가 양허 서쪽을 향해 진군하더라도, 반드시 (우리의 공세에) 흔들릴 것이다. 그러므로 아군은 양허와 강 방어부대에서 유력한 2군을 차출하여 대홍산 부근을 재빨리 이동하여 잠복한 후 탕언보 부대의 임무를 기다리다가 기회를 엿보는 형세로, 오로지 적의 서진이나 동퇴할 때를 노려 요격한다."
"만약 각 부대가 평상시와 같이 배치하여 적군이 공격해 올 때를 기다리거나 적군이 안전하게 후퇴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이것이 가장 어리석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만약 한 두가지 작전을 시행한다면, 각 부대는 즉시 이동하여 신속하고 극비리에 행동해야 한다."

이 전보는 5전구가 수동적으로 적을 기다리지 말아야 함을 분명히 하며 일본군의 서진을 적극적인 반격 및 우회 작전으로 좌절시켜야 한다는 장제스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5전구는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을 향한 선제공격을 개시해 적의 후방을 적극적으로 교란시키고 일본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를 위한 작전 배치는 다음과 같다.
강 방위군장 궈위는 웨이허강과 다링강 우안에서 26군, 75군, 94군, 국민혁명군 제128사단, 제6 유격종대, 제7 유격종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서진해오는 일본군과 격돌해 소모시킨다.
우 집단군 총사령관 장쯔중은 제29집단군, 제33집단군, 제55군을 지휘하여 양허 양안의 진지를 고수하고 대홍산 남쪽의 길목을 공고히하여 주력으로 하여금 장수점 이북 방면에 진입시킨다.
중앙집단군총사령관 황기상은 제11집단군, 제45군, 제127사단과 제1 유격부대를 이끌고 가오청에서 쑤이셴 이서 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한다. 부득이 탕어현을 공격해야 할 때, 예비군과 협력하여 양쪽 측면에서 일본군을 포위섬멸한다.
좌 집단군 총사령관 쑨롄중은 제2집단군 및 오동 유격대 등을 지휘하여 신양에 견제 공격을 하고 주력부대로 양화로를 향해 작전을 펼칠 준비를 한다.
기동병단 총사령관 탕언보는 제31집단군을 지휘하여 짜오양 동북지역에 집결하여 대기한다.
예비병단 총사령관 쑨젠은 제22집단군을 지휘하여 잠시 양 도랑에 위치한다.
다볘산 유격대 사령관 리핑샨은 일본군 기지와 양쯔강을 가로지르는 철로에 대한 공격을 감독하고, 핑한 철로의 남쪽 지역을 주력군과 함께 공격하여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한다.

5. 경과

5.1. 짜오양 전투

일본 육군은 자신들의 공세 계획을 은폐하고 중국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1940년 4월 말 구강 근처에서 위장 공세를 수행했다. 또한 해군은 포양호와 둥팅호를 습격했으며 공군은 후난성과 구이저우의 요충지를 폭격했다. 이후 1940년 5월 초, 일본군은 제5전구 주력을 짜오양 지역에서 포위섬멸시키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일본군 우익의 제3사단이 먼저 필양을 공격한 뒤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또한 일본군 좌익의 제13사단은 중샹시를 공격해 국민혁명군 33집단군의 전면을 뚫고 북쪽으로 향해 짜오양으로 진군했다. 국민혁명군 제33집단군과 제2집단군은 이런 일본군을 추격한 뒤 매복, 습격 방식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5월 4일, 일본군 39사단이 중앙 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국민혁명군 11집단군의 정면을 돌파했다. 11집단군은 즉시 제45군과 함께 남서쪽으로 이동해 84군의 서북 지역으로 이동해 짜오양 방어에 착수했다. 이러한 전투 배치는 1939년 5월에 벌어졌던 쑤이셴-짜오양 전투와 동일했다. 이후 일본군의 진로를 지켜본 장제스는 5월 5일 리쭝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일본군은 여러 갈래로 침입했다. 적의 3사단은 다른 방면에서 긁어모아 핑한, 신양, 양화, 경종, 한의 각 방면의 젋은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각각의 장점은 있지만 한 부문당 여단, 기껏해야 사단 뿐이며 적극적인 공격 시도는 없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중략)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시기를 잡아야 한다.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가면 반드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의 각종 진지를 돌파한 뒤 하루 30~40km의 속도로 전방을 향해 돌진했다. 5월 7일, 3사단이 탕허현을 점령하고 13사단은 왕집을 장악했으며, 39사단은 순양점으로 들어가 짜오양을 포위했다. 그러나 일본군 사이의 공백이 커서 수비군은 탈출을 감행했다. 제84군 제173사단은 짜오양 부근에서 주력군의 철수를 엄호했으나 사단장 종의(钟毅)가 전사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5월 8일, 일본군은 짜오양을 점령한 후 자신들의 목적이 완료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제5전구의 주력을 포착하지 못했고 5전구는 23개 사단을 일본군 3개 사단 주변에 배치해 강제로 승부를 벌일 예정이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일본군이 본래 위치로 후퇴할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주 후퇴로는 양화로 뿐이었고, 비가 내려 차량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진흙 투성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일본군은 후퇴할 길이 끊긴 상황에서 제5전구를 격파한 후 양성과 정원으로 향하는 길을 개척하려 했다. 제5전구는 즉시 일본군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5월 8일 밤, 일본군은 정해진 위치에 당도했다. 그들은 작전에 따라 저녁 8시에 탕허-바이허 라인에 도착한 후 원래 위치로 후퇴하는 동시에 밤 11시에 한수 서안 포위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외곽에 국민혁명군이 도사리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충칭의 국민정부는 5전구에게 총공격령을 내렸고, 남양 지역에 있던 제31집단군의 6개 사단이 급속히 남하했다. 또한 제33집단군 5개 사단은 남쪽에서 치고 올라왔고 남동쪽에서 일본군을 쫓아다니던 45군과 94군의 5개 사단은 일본군을 거의 따라잡았다. 이로서 국민혁명군은 일본군을 거의 둘러쌌고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철수를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은 5월 10일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던 33집단군 주력군과 처음 접촉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목격한 뒤 중국군을 격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이에 일본군은 13, 39사단과 이케다 지대를 남하시켜 33집단군을 격퇴시키게 하면서 3사단으로 하여금 북익을 엄호하게 했다. 5월 12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 제 33집단군의 5개 사단을 2개 사단으로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와 5전구가 33집단군에게 보내는 전보를 중도에서 가로챘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장쯔중의 33집단군 다섯개 사단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에 소노베 이치로 사령관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제13, 39사단 병력을 모아 한수 동안을 따라 남하하고 있는 장쯔중 집단군을 역습한다. 그동안 신야 이남의 제3 사단을 짜오양 부근으로 철수시켜 후방을 엄호한다."

한편, 일본군 정보부는 국민혁명군 라디오 전파의 방향을 조사한 결과 33군 총사령부의 위치가 짜오양에서 북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공군을 동원해 그 지역을 폭격하게 했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33집단군 섬멸 작전을 전개했고, 33집단군 사령부는 5월 16일에 일본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으며 사면에서 포위 공격했다. 이에 국민혁명군 제74사단은 용감하게 저항하며 계속해서 반격을 실시했다. 격전이 오후까지 이어지자, 특무 대대도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5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수비군을 차례차례 섬멸했고 20여 대의 비행기와 포병대를 동원하여 수비군의 최종 방어선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장쯔중은 여러 곳에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침착하게 군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74사단과 특무대대는 전멸했고 장쯔중은 가슴에 총상을 입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리하여 제33집단군의 주력 병력은 섬멸되었고 국민혁명군 남쪽 포위망은 무너졌다. 일본군은 즉시 병력 배치를 조정하여 짜오양 방위에 집중했다.

한편 짜오양 이북 지역에서는 제31집단군 등 6개 사단이 동, 남, 북 세 방향에서 일본군 3사단을 둘러쌌다. 당시 일본군 3사단은 식량을 많이 휴대하지 못했고 보급로가 차단당해 상황이 위급했다. 29여단은 사단 본부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적의 전투의지가 매우 왕성하다. 현재로선 무사히 귀환하기 어려우니 1개 대대를 증원해주길 바란다."

이때 일본군은 33집단군 주력을 섬멸하긴 했지만 아직 잔존 병력과 전투 중이었고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3사단은 단독으로 퇴각하거나 지원을 기다리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제13, 39사단은 일단 전투를 마무리한 뒤 북진하여 3사단을 구원하려 했지만 3사단의 상황을 조사한 후 예비 계획을 채택하고 더 큰 함정을 준비했다. 즉, 제 3사단이 동남쪽의 짜오양 방향으로 이동하게 하고 국민혁명군이 그들을 따라 짜오양으로 깊숙히 들어오도록 유도한 것이다.

5월 16일부터 18일까지, 일본군 제 3사단은 짜오양으로 퇴각했다. 국민혁명군은 그들을 추격했지만 화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3사단은 18일 밤 짜오양 동북쪽에 도착해 반격 준비를 마쳤고 국민혁명군 33집단군을 섬멸하고 북상한 13, 39사단도 짜오양에 도착해 공격을 전개했다. 국민혁명군은 그런 적의 함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짜오양으로 진입했다가 13사단과 39사단이 측면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 반격을 개시하자 당황했다. 5월 19일, 일본군 3사단과 13사단, 39사단의 협공으로 국민혁명군은 대혼란에 휩싸였고 곧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5전구는 급히 각 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퇴각하는 적의 뒤를 바짝 추격했고 5월 21일에는 제3사단이 텅현, 13사단은 라오커우 동쪽, 제39사단은 번성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5월 21일 새벽, 제39사단이 백하를 건너다가 강 건너편의 중국군에게 반격 당했고 신사키 데지로 연대장 등 300여 명이 전사했다. 이에 일본군 11군은 5월 21일 밤 각 사단에 추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고, 이렇게 짜오양 전투는 막을 내렸다.

5.2. 이청 전투

한수 동안에 도착한 일본군 제11군은 예정된 전투 기일에 비해 두배가 넘는 시간동안 전투를 치르느라 병사들의 피로가 극심했다. 이에 11군 사령부는 짜오양 근처에서 병사들을 쉬게 한 뒤 한수 서쪽의 이청을 공략할 지의 여부를 토론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이청 공략 계획을 포기할 경우 일본군 수뇌부와 천황의 신뢰를 잃을 테니 군대의 피로에 대해 걱정할 것 없이 2번째 단계를 계속 수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들은 6개 자동차 중대를 동원해 최전선에 1000여 톤의 군수품을 긴급 수송했다.

이후 일본군은 1시간 반동안 한수 서안을 포격한 후 39사단은 의성 이북의 왕집에서 한수를 도하했다. 같은 날 24시, 제3사단은 양양 남동쪽에서도 강을 건넜다. 두 사단은 국민혁명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고 새벽녁에 강을 건넜다. 11군은 40사단에게 대홍산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적을 '소탕'하라고 명령했고 소천지대와 창교지대로 하여금 경계 임무를 맡게 했다.

한편, 국민혁명군 제5전구는 일본이 이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고 한수 서쪽에 대한 공격이 있더라도 이는 위장 공세라고 여겼다. 그래서 제33집단군 잔여 병력과 강 방어군은 서쪽으로 이동했고, 한수를 지키는 군대는 거의 없었다. 또한 이창을 수비하는 군대도 거의 없었고 이창 근처의 요새화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한수 서안을 돌파하자, 5전구 총사령관 리쭝런은 제2, 제22,제31집단군과 68군에게 양화로, 중샹로 및 한이로를 공격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주력군에게 양양, 의성 간 일대를 공격하게 했으며, 우병단의 정치부장 천청으로 하여금 제33, 제29집단군과 강 방어군을 지휘해 이청을 지키게 했다. 이와 동시에, 제75군과 제94군으로 하여금 한수 동쪽에서 한수 서쪽으로 돌아가 적을 요격하게 했으며, 쓰촨성에서 훈련받고 있던 제18군을 긴급히 이청으로 이송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이청을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국민혁명군 41사단의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했고 다음날 샹앙(襄阳)에 진입했다. 이후 일본군 2개 사단은 즉각 남쪽으로 진군하여 국민혁명군 33집단군의 후위로 들어가서 국민혁명군을 압박해 정면으로 전출시키게 했다. 이러한 일본군에 기동전에 휘말린 국민혁명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33집단군의 여러 사단은 각개격파되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31집단군에게 급히 5개 사단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게 했다. 그들은 일본군의 행동을 제약하길 희망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6월 3일, 일본군은 제33집단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후 3사단은 남장에, 39사단은 의성에 진군했다. 6월 4일 밤, 일본군 제 13사단과 이케다 지대, 한수 지대는 중샹 이남의 사양 부근에서 한수를 도하하여 당양으로 진출해 3, 39사단과 함께 국민혁명군을 협공할 준비를 갖췄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형문, 셴쥐 전선으로 이동해 동북 방향에 군대를 배치하여 국민혁명군 강 방어군을 요격할 계획이었다. 이때 강 방어군은 한수 서쪽에서 한수 이남까지 일본군의 진군을 저지하다가 여의치 않자 제33군과 합세하여 깊숙히 침입해오는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다. 또한 제29집단군은 샹앙을 기습해 일본군의 교통로를 차단하려 했다.

일본군은 리사시, 형주, 이청으로 향하는 도로를 점령한 후 동남쪽의 이청으로 진군했다. 6월 9일, 제3, 제39사단이 북동쪽에서, 제13사단이 남쪽에서 당양을 공격했다. 수비군은 온종일 격전을 치렀으나 거의 괴멸되었다. 6월 10일, 일본군은 당양을 공략한 직후 이청 공격을 개시했다. 국민혁명군 제18군은 이틀 전에야 이청에 도착하여 방어를 서둘렀고, 제18사단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고 제199사단을 이청 외곽에 배치했다. 일본군 3개 사단은 전차 부대와 공군을 앞세워 맹공격을 퍼부었다. 제 18군은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청 부근의 산간 지역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이청을 점령하긴 했지만 그 후에 이청 지배를 확고히 해야 하는 지의 여부는 사전에 명확하게 정해두지 않았다. 우한의 일본군 본부에 의해 결정된 일반적인 작전지침에 따르면,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혀 전쟁을 지속할 의지를 파괴하는데 초점을 밪춰지 점령지역을 확장할 의향이 없었다. 그래서 11군은 이청을 점령한 군대에게 "이번 작전 목적에 도달했으니 부대를 즉각 정비해 추후 기동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11군은 이청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도록 명령헀고, 휴대할 수 없는 노획 물자를 소각하거나 장강으로 던지게 하고 귀로를 준비하게 했다. 6월 15일 22시, 일본 제11군은 한수 동안으로의 철수 명령을 공식적으로 내렸다. 이에 제3, 39사단이 당양, 형문 전선으로 먼저 철수하고 제13사단은 국민혁명군의 습격을 저지하면서 뒤따라갔다.

일본군이 철수하자, 국민혁명군은 즉각 추격에 나서 제18군이 6월 17일에 이청을 수복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일본군 11군 본부에서는 이청을 점령해야 한다는 지휘관들의 주장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일본과 동맹을 맺었던 나치 독일프랑스 침공을 성사시켜 서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이 이청을 공략했던 6월 12일에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해 세계 정세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에 일본 군정 당국은 위신을 세워 일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하루빨리 충칭의 국민정부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려면 이청을 완전히 점령한 후 장제스 정권을 위협해 협상장에 끌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6월 15일 천황을 모신 채 열린 어전 회의에서, 일본 수뇌부는 이청을 완전 점령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 참모본부는 6월 16일 이청을 1개월 동안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11군 각 사단은 본래 위치로 돌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이청에서 52km 떨어진 지점까지 철수했던 13사단은 이청을 도로 공략하라는 명령을 받자 3사단 1개 부대와 함께 6월 17일 이청으로 재차 진군했다. 7월 1일, 일본 지나파견군 수뇌부는 흑룡강에 주둔한 제4사단을 제11군과 합류시켜서 11군이 점령지를 확대할 여력을 갖추게 했다. 이후 11군은 이청을 장기 점령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들어 7월 13일 안경, 신양, 이청, 악양, 남창으로 진군했다. 11군은 13사단이 이청을 점령하게 하고 4사단은 안륙에 주둔시켰으며 제18여단을 창설해 양동 서안 일대를 경계하게 했고 나머지 부대는 모두 원래의 방어 지대로 돌아갔다.

이렇듯 일본군이 이청 완전 지배를 목표로 밀려오자, 앞선 전투에서 참패해 막을 여력이 없었던 국민혁명군은 전면 철수했다. 그후 국민정부는 충칭을 보위하고 쓰촨성을 방어하기 위해 제6전구를 증설했다. 이렇게 짜오양-이청 전투는 막을 내렸다.

6. 결과

짜오양-이청 전투는 일본군이 국민혁명군보다 훨씬 뛰어난 전투력을 갖췄음을 입증한 전투였다. 11군의 보고에 따르면, 이 전투로 인한 사상자 수는 2,700명 사망, 7,800명 부상이었다. 반면 국민혁명군은 이번 전투에서 36,983명 사망, 50,509명 부상, 2만 3천명 실종이 발생했음을 인정했다. 일본군은 56개 여단을 배치했는데 사상자는 전투 병력의 12.5%를 차지했다. 반면 국민혁명군은 약 54개 사단, 약 38만 명을 이 전투에 투입했는데, 이 병력은 전체 병력의 29%이며 실질적으로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45%를 차지했다. 그런데 그중 11만여 명의 사상자 및 실종자가 발생했으니 동원 병력의 28.9% 이상을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게다가 본래 작전 목표였던 짜오양, 이청 방위를 실패했으니, 국민혁명군의 명백한 패배였다.

게다가 국민혁명군 제5전구는 이번 전투의 패배로 인해 주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몇년간 복구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국민혁명군을 약화시키겠다는 일본군의 의도가 달성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이청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충칭 대공습을 반복적으로 시행했다. 장제스는 훗날 이때가 중화민국 최악의 위기였다고 회고했다. 만약 일본군이 우한 전투 때처럼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충칭을 공격했다면, 국민혁명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중일전쟁이 조기에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일본은 소련의 침략 가능성을 고려해 충칭에 대규모 공세를 가하는 걸 꺼려했고 충칭 공습을 통해 장제스를 굴복시키는 쪽을 택했다. 일본 공군의 충칭 대공습은 중화민국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혔으나, 장제스는 끝까지 일본과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고 중국 민심 또한 일본군에게 적개심을 더욱 굳게 품었다. 게다가 백단대전이 발발해 일본군 후방에서 뜻하지 않은 피해가 발생하자, 일본군은 충칭으로의 공세를 무기한 중단시켰다. 이후 양측은 1941년 제2차 창사 전투가 발발하기 전까지 전투를 중단한다.

7.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