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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21:12:02

지펑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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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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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姬鹏飞_unnamed.jpg
중화인민공화국 3대 외교부장
정체 姬鵬飛
간체 姬鹏飞
한국식 독음 희붕비
영문 Ji Pengfei
출생 1910년 2월 2일
청나라 산서성 임진현
사망 2000년 2월 10일 (향년 90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서북육군군의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외교관
종교 무종교(무신론)
외교부장
재임기간
3대 1972년 1월 6일 ~ 1974년 11월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외교관의 길2.3. 말년
3. 가족4. 여담5. 참고문헌6. 주요경력

1. 개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외교관. 중화인민공화국 3대 외교부장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10년 산서성 임진현에서 태어났다. 1926년 서북 육군군의학교를 졸업했으나 1931년 홍군에 합류, 193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2년 제3야전군 제7병단 부정치위원에 임명되었으며 후에 정치위원으로 승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군문에 남아있었으나 1950년 봄 황전, 겅뱌오, 웬중셴, 왕여우핑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외교부에서 근무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지펑페이는 군에 잔류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직속상관 쑤위가 군인에겐 국가의 부름을 선택할 자격이 없다고 하자 외교부로 소속을 옮겨 동독대표단 단장을 지냈다.
파일:1940년희붕비.jpg
1940년의 지펑페이(가운데 인물), 왼쪽은 예페이.

2.2. 외교관의 길

1953년에 주 동독 중국 대사에 임명되었으며 1955년 국무원 외교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문화대혁명 발생 이후 1967년 8월 관펑과 왕리 등 중앙문혁소조 급진파들이 주도한 탈권 현상에 휘말려 차오관화와 함께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사무실에 감금당하는 등 박해를 당했으나 마오쩌둥이 관펑과 왕리를 숙청하고 국무원의 업무가 정상화되자 다시 집무를 보았다. 천이가 홍위병들의 조리돌림으로 사실상 직무를 보지 못하게 되자 외교부장 대리를 맡았고 1968년 천이가 잠깐 복직하면서 외교부장 대리에서 물러났으나 천이가 2월 역류의 타격과 여러 질환으로 업무를 보지 못했으므로 실질적인 외교부의 수장으로 있었다. 1970년 천이가 대장암에 걸려 앓아눕고 1971년 12월 26일 마오쩌둥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수면을 먹었다가 위독해지자 다시 외교부장 대리가 되었다.
파일:1952년희붕비.jpg
1952년 베를린에서의 지펑페이

1971년 유엔에서 중국의 대표권을 중화민국에 둘지 중화인민공화국에 둘지를 붇는 총회 투표가 실시되자 차오관화, 슝샹후이, 탕원성 등과 함께 마오쩌둥의 호출을 받고 차오관화를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유엔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린뱌오가 소련으로 망명하라다가 죽는 9.13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대사 허문익으로부터 린뱌오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지펑페이는 이를 저우언라이마오쩌둥에게 보고하며 절묘한 최후라고 논평했다. 1972년 천이가 사망한 이후 정식으로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73년 8월 24일 개최된 중국 공산당 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 저우언라이의 현실 외교 정책을 지지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지만 11월에 마오쩌둥이 인민대회당에서 소집한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저우언라이를 맹렬하게 규탄해야 했다. 1974년 차오관화에게 외교부장 자리를 내준 다음에 1975년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비서장을 지냈고 1979년 중앙대외연락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등을 역임했다.

1980년 국무원 비서장이 되었으며 1982년 국무원 국무위원, 중국 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1] 상임위원이 되었다. 1983년 후야오방이 홍콩과 마카오 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지라는 덩샤오핑의 지시를 받게 되자 중공중앙 홍콩-마카오공작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리셴녠, 자오쯔양, 양상쿤, 완리, 지펑페이, 후치리 등이 홍콩의 과도기를 영도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지펑페이는 국무원 홍콩-마카오 판공식 주임에 임명되어 베이징에서 홍콩 문제를 처리하는 일상공작을 맡았으며 이 직위를 1990년까지 역임했다.
파일:희붕비.jpg
1993년 3월 제8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카오 기본법을 설명하는 지펑페이

2.3. 말년

1999년에는 그의 아들인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정보부장인 지성더 소장이 푸젠성 샤먼에서 외국에 정보를 판매하고 대규모 밀수를 했다는 <위안화 사건>에 연루되어[2] 2000년에 사형집행유예선고를 받았다. 지펑페이는 4차례나 장쩌민에게 아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달라고 친전을 보내 간청했으나 거절당하자 2000년 2월 10일 오후 1시에 자택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3] 그의 죽음은 외부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으며 추도회는 정부의 유력 인사들이 불참하고 주요 기관들도 화환을 보내지 않아 썰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성더는 수십명의 공범을 폭로하여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아냈고 심장병을 이유로 가석방되었다.

3. 가족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지성더는 인민해방군 소장이었으나 비리로 무기징역을 받았고 이후 심장병으로 가석방되었다.

차녀는 국가개발은행에서 수석경제학자로 근무했다.

4. 여담

파일:희붕비100주년.jpg
2010년 2월 2일, 인민대회당에서 국무원 총리 리커창이 참석한 가운데 지펑페이 탄생 100주년 기념회가 열렸다.

5. 참고문헌

6. 주요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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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3대 4대
천이 지펑페이
(1972년 1월 6일 ~ 1974년 11월)
차오관화

[1]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덩샤오핑,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덩샤오핑, 천윈이 이 위원회의 주임을 맡던 시절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 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즉 정식적인 국가주석은 따로있지만 주임을 맡던 덩샤오핑이나 천윈이 뒤에서 그 역할을 하고 당을 총관리하는 총서기도 후야오방 같이 따로 있지만 실제적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 실무 책임인 위원회의 상무부주임 보이보가 이 역할을 한 것).[2] 류화칭의 며느리 정리와 딸 류차오잉도 휘말렸으며 이에 대해서 장쩌민 파인 슝광카이의 모략이라는 썰이 있다.[3] 아들이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을 예감하고 자살했다고 하는데 아들이 음해당한 것에 대한 항의 표시라는 썰도 있다. 어디까지나 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