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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1:44

지미 던(1905)

아일랜드의 前 축구감독
파일:Jimmy Dunne.jpg
<colbgcolor=#eee><colcolor=#000> 이름 지미 던
Jimmy Dunne
본명 제임스 던
James Dunne
출생 1905년 9월 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블린 링센드
사망 1949년 11월 14일 (향년 44세)
아일랜드 더블린
국적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신체 178cm / 체중 74kg
소속 <colbgcolor=#eee><colcolor=#000> 선수 샴록 로버스 FC B (1923-1925)
뉴 브라이튼 AFC (1925-1926)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1926-1933)
아스날 FC (1933-1936)
사우스햄튼 FC (1936-1937)
샴록 로버스 FC (1937-1942)
감독 샴록 로버스 FC (1937-1942)
보헤미안 FC (1942-1947)
샴록 로버스 FC (1947-1949)
국가대표 7경기 4골 (1928-1932 / 아일랜드(IFA))
15경기 13골 (1930-1939 / 아일랜드(FAI))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사생활6. 수상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
6.2.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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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던은 1910년대 후반부터 축구를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더블린의 파크뷰 FC(Parkview FC)와 리버사이드 아틀레틱(Riverside Atletic)을 거쳐 1923년부터 샴록 로버스 FC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샴록 로버스 2군에서 2시즌 반을 보낸 던은 1925년 10월, 잉글랜드로 건너가 뉴 브라이튼 AFC에서 4개월을 보내며 8경기에서 6골을 넣었다. 1926년 2월, 던은 800 파운드의 이적료로 1부 리그셰필드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지만 3년은 주로 리저브팀에서 뛰었다. 9월 4일에 아스날 FC를 상대로 셰필드 1군팀 데뷔전을 치렀고 1927년 10월 15일의 더비 카운티 FC전에서 첫 골을 넣었지만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1929-30 시즌부터 던은 셰필드의 1군 멤버로 본격적인 활약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레스터 시티 FC와의 3대3 무승부와 블랙번 로버스 FC에 5대7로 패배한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했고 7대1로 이긴 레스터 시티 FC와 4대2 승리를 거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전에서는 4골을 터뜨렸다. 던은 39경기에서 36골을 기록하며 클럽의 최고 득점자로 시즌을 마쳤는데 그의 활약으로 골득실에서 번리 FC를 따돌리고 셰필드 유나이티드 FC는 강등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3시즌간 던은 리그에서 각각 41, 33, 26골을 기록한 셰필드 유나이티드 팀 내 최고 득점자였다. 그리고 1931년 10월 24일부터 1932년 1월 1일 사이에 그는 12번의 계속된 리그 경기에서 적어도 한 골 이상을 득점했다.[2]

던의 활약에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를 주름잡던 아스날의 명장 허버트 채프먼이 1932년 초, 1만 파운드의 이적 제안을 했지만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거절했다. 하지만 셰필드는 재정 문제로 인해 1933년에 던을 8,250 파운드에 아스날로 넘겨야 했다. 아스날은 1934년 1월에 채프먼 감독이 폐렴으로 급사했음에도 리그 우승을 놓치지 않았고 던도 21경기에 출전, 9골을 넣어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테드 드레이크가 아스날에 오면서 던은 주전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언론으로부터 가장 비싼 교체 선수라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클리프 배스틴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35년 2월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던을 다시 사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아스날이 거절했고 결국 1936년 7월, 던은 2부 리그 소속인 사우스햄튼 FC로 이적했다. 그는 사우스햄튼에서 36경기에 출전했고 14골을 기록했다.

1937년 중반, 그는 사우스햄튼의 새 계약 제안을 거부하고 샴록 로버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돌아갔다. 던은 5년간 샴록 로버스의 선수 겸 코치로 있다가 1942년에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2.1.2.1. 아일랜드(IFA)
던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IFA가 관리하는 아일랜드 대표팀[3]에서 뛰었다.

1928년 2월 4일, 벨파스트에서 있었던 웨일스에 1대2로 패한 경기가 던의 데뷔전이었다. 1930년 10월 20일, 셰필드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던은 국가대표팀 첫 골을 넣었지만 IFA는 1대5로 패했다.

던은 총 7경기에 출전해 4골을 넣었고 그는 3경기에서 팀의 주장이었다.
2.1.2.2. 아일랜드(FAI)
1930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FAI 연맹이 관리하는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다. 그는 1930년 5월 11일, 브뤼셀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2골을 넣었다.

던은 아일랜드 자유 주 소속으로 1938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 참가했지만 노르웨이에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던은 1938년 9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팀의 주장이었고 전체적으로 그는 아일랜드 자유 주 소속으로 15번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했다.

2.2. 감독

던은 샴록 로버스 FC선수 겸 감독으로 5년을 재직하면서 리그 오브 아일랜드 퍼스트 디비전 우승 2번, 준우승 2번, FAI컵 우승 1번 등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팀 이사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샴록을 떠나 1942년, 보헤미안 FC의 감독이 되었다.

던은 1947년에 다시 샴록에 복귀했고 감독 커리어를 이어갔지만 1949년 11월 14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헤더에 능한 센터 포워드.

잉글랜드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보인 아일랜드 선수로 현재까지 아일랜드 출신 선수 중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4. 뒷이야기

5. 사생활

그는 4명의 자녀를 두었고 조카 토미 던과 크리스티 도일도 모두 축구 선수였다.

6. 수상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프리미어 리그로 한정하면 제이미 바디의 11경기 연속 득점 기록이 최다이고 잉글랜드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스탄 모텐슨이 1950-51 시즌에 기록한 15경기이다.[3] 1950년 이후로 이들은 명맥이 끊기고 데이터는 북아일랜드에서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