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드레이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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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
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테드 드레이크 Ted Drake | |
본명 | 에드워드 조지프 "테드" 드레이크 Edward Joseph "Ted" Drake | |
출생 | 1912년 8월 16일 사우스햄튼 | |
사망 | 1995년 4월 30일 (향년 82세) | |
국적 | 잉글랜드 | |
직업 |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사우스햄튼 FC (1931~1934) 아스날 FC (1934~1945) |
감독 | 헨든 FC (1946~1947) 레딩 FC (1947~1952) 첼시 FC (1952~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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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날 소속으로 167경기 124골.
왼쪽기준 2번 째칸에 있는 테드 드레이크
영국(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첼시 FC 감독을 맡았다.
1930년대에는 아스날 최고의 골잡이로, 1950년대에는 첼시에 우승컵을 남겨준 명감독으로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현역 시절의 모습.
1915년에 사우스햄튼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에 윈체스터 시티 유소년팀에 입단하여 선수로 활동하는 동시에 가스 점검원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 와중에 토트넘 핫스퍼로의 입단을 위해 연습 경기를 했으나 부상으로 입단은 좌절되고 만다.
본격적인 선수 데뷔는 1931년에 고향팀 사우스햄튼 FC에 입단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세인츠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자 1934년 3월에 6500파운드로 아스날에 입단, 이후 드레이크는 입단 첫 시즌인 1934/35 시즌에 팀 역대 최고의 기록인 44골을 달성했다. 그리고 1934년 11월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이탈리아를 상대로 3-2로 이길 당시에도 1골을 넣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드레이크는 골도 골이지만 몬티의 전성기를 끝낸걸로도 유명하다.
게다가 당시 드레이크의 골사냥에 희생된 팀은 아스톤 빌라였는데, 1935년 12월 14일에 빌라 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 경기에 7골이라는 무시무시한 대기록을 보여준 바 있는데, 이는 잉글랜드 축구에서 2024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이다. 이후 1935/36 시즌에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FA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었고, 1937/38 시즌에 팀 우승까지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공군으로 들어갔고, 전쟁 와중인 1945년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객원 선수로 출전하여 레딩 FC를 상대로 대결하다 부상을 입었고, 결국 은퇴하고 만다.
그 외에도 1931년부터 6년간 크리켓 선수로도 활약한 바 있었다.
2. 감독 시절
은퇴 이후 1946년에 아마추어 팀인 헨든의 감독으로 시작하여 이듬해에 레딩의 감독으로 앉아 5년을 이끌다가 1952년부터 첼시 FC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 초부터 팀을 현대화하는 작업에서 팀 로고를 사자 문양으로 바꾸고, 그 동안의 스타 플레이어 영입에만 의존하던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 켄 암스트롱[1] 같은 전도유망한 유망주들을 수집하고, 유스 시스템을 재정비해 팀의 기초를 탄탄히 다지기 시작했다.[2] 이 같은 드레이크 감독의 노력에 힘입어 첼시는 1954/55 시즌, 드디어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거둔다. 하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 전신인 유러피언 컵 1회 대회(1955년)는 당시 대회 자체를 무시하던 FA의 압력으로 참가를 포기해야 했다.1954/55 시즌 우승 이후 지미 그리브스, 바비 탬블링, 피터 브래브룩 등의 유소년 출신을 중심으로 리빌딩하려 했으나 우승은 한 번도 못했고, 1960/61 시즌 FA컵 3라운드에서 당시 4부 리그 팀인 크루 알렉산드라에게 2-1로 패배한 게 화근이 되어 시즌이 끝나고 경질당했다.
3. 은퇴 이후
1961년에 첼시를 떠난 이후 1963년부터 1968년까지 풀럼 FC의 코치로 일하다 1970년에 FC 바르셀로나의 코치로 6달간 일했고, 이후 보험 사업을 하다가 1975년부터 풀럼으로 돌아와 스카우트 담당 겸 명예회장을 맡다가 1995년 4월 30일에 타계했다.4. 여담
- 감독으로서 첼시에 부임하면서 첼시의 별칭이었던 '팬셔너즈'를 버리고 '더 블루스'라는 새로운 별칭을 사용하도록 했고 첼시의 로고를 기존의 팬셔너(연금수령자)의 모습에서 지팡이를 쥔 사자의 모습으로 바꾸는데 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