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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4:30:13

주체사상/역사



1. 개요2. 창립기(1955~1970)3. 발전기(1970~1982)4. 굴절기(1982~1990년대 중반)5. 완성기(1990년대~)와 그 이후6. 참고문헌7. 관련문서
7.1. 이념7.2. 사건

1. 개요

주체사상의 시초부터 발전까지를 다루는 문서. 일반적으로 주체사상은 총 4단계 발전 단계를 거쳤다고 평가되며 본 문서는 이를 시간순서대로 소개, 관련 저작과 부차적인 역사적 설명으로 보완할 것이다.

2. 창립기(1955~1970)

북한은 주체사상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이 창시하여, 1930년 6월 30일, 만주 카륜에서 열린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 에서 김일성이 제출한 <조선혁명의 진로>를 통해 처음 발표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1] 훗날 김정일은 1982년 발표한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김일성이 '고루한 민족주의자, 행세식 맑스주의자,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에 맞서 혁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40년 소련으로 이동하여 스탈린에 의해 정립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육받았다. 이 시기 경험은 주체사상에 뿌리 깊게 녹아 있는 스탈린주의, 마오주의적 요소의 바탕으로 평가된다.

이후 김일성은 소련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에 옹립되었으며, 정치적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차차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열렬한 스탈린주의자로 행세하였으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를 소집하여 스탈린의 1인 독재와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역사적인 연설 <개인 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김일성 역시 소련의 새 노선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 자신의 개인숭배에 대해서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김일성은 근본적으로 지도노선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이 시기 김일성은 가중되는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연안파, 소련파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을 전개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55년 12월, 김일성은 당 선전선동 일군들을 소집하여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한다. 문제의 연설문은 10년이 지난 1965년, 신진균이 근로자 1965년 10월호에 실은 논문 <주체사상은 공산주의적 자주, 자립의 사상이다>로 그 의의가 규정되었다는 점 때문에 와다 하루키 등은 해당 연설에 대해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1955년 12월 주체연설은 주체사상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사업을 반드시 조선혁명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소련공산당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나 중국혁명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연구하는 것은 다 우리 혁명을 옳게 수행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김일성,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

여기에는 1955년 12월, 티토자주노선 선언, 1956년 6월 포즈난 사건, 1956년 헝가리 혁명 등의 굵직한 국외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며,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8월 종파사건의 배경과 반 김일성 그룹의 의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분명한 점은 8월 종파사건 당시 중국과 소련은 매우 강도 높은 내정간섭을 행했고, 김일성은 이를 매우 큰 치욕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1958년까지 당, 군에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면서 국내의 소련, 중국 영향력을 제거하면서 독자노선을 확립해나갔고 훗날 8월 종파사건을 제2의 해방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김일성의 이러한 모습은 1957년 천리마 운동의 실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 4대 노선의 발표 등으로 실제 정책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론화 작업 역시 (김일성이 직접 했다는 북한의 주접과는 달리) 사상비서 김창만, 김일 등 인텔리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황장엽 역시 1958년 노동당 비서실 이론서기로 임용되어 나치의 파시즘을 참조해 주체사상을 다듬는 임무를 맡았다. 다만 민족주의를 강화하여 외부의 간섭을 막아야 한다는 핵심 담론은 분명히 김일성이 제시한 것이다.

이후 북한은 중소결렬을 틈타 독자노선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1962~1964년 사이 소련과, 1967~1969년 사이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주체사상은 1962년 12월 19일자 노동신문의 기사인 <1952년 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의 역사적 의의>을 통해서 언론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우리 당이 자기행동에서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는 근본 원칙'으로 규정되었다. 1965년 4월, 인도네시아의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을 방문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남조선혁명에 대하여>란 연설을 통해 자신의 4대 노선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를 북한의 지도사상으로 정식으로 제시하였다. 1966년 8월 12일 로동신문은 <자주성을 옹호하자>란 기사를 통해서 주체 확립을 위한 8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7년 5월 갑산파 숙청 사건으로 최후의 방해꾼들을 제거한 김일성은 196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1차 회의를 소집, 주체사상을 '공화국 정부의 모든 정책과 활동에서 확고부동한 지침'으로 선언하였다.

이 시기의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북한 사정에 맞는 '창조적 적용'을 위한 반사대주의 실천 이데올로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성립과 발달 배경은 외세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혁명전통을 강조하면서 김일성 우상화를 뒷받침하였다. 다만 분명한 민족주의적 담론의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민족주의란 용어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사상으로 거부하면서 이때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란 용어를 사용했다.

3. 발전기(1970~1982)

1970년대에 들어서 주체사상은 후계 구도의 정립 과정에서 순수 이데올로기, 국제적 이데올로기로의 확장을 거듭하게 된다. 황장엽의 인간중심론이 가미되면서 관념론적 성격이 더해진 것도 이 시기다.

황장엽은 1966년 필화 사건으로 곤욕을 치를 뻔 했으나 스탈린 개인독재와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 기초하여 마르크스의 계급 중심 이론을 인간 중심으로 수정한 새로운 사상이론을 가져오게 된다. 황장엽의 이론은 1968~1970년 사이에 완성되었으며, 1970년 10월,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5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주체사상이 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사상이라고 선언했으며, 19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 헌법 제4조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조선로동당의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고 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간중심론이 드러난 것은 1972년 9월, 김일성과 일본 마이니치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였다. <우리 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정부의 대내외정책의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라고 명명된 서면 인터뷰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주체사상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 있다는 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입니다. (...) 이와 같은 사상은 결코 우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이와 같은 사상을 특별히 강조하였을 뿐입니다."

황장엽과 그의 주장을 수용한 정성장, 백학순 등의 설명에 따르면, 황장엽의 인간중심론적 주체사상은 김정일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조직지도부장으로 2인자였던 김영주는 주체사상에 대해 반대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김일성이 김정일의 손을 들어주면서 숙청당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선전선동부 부부장 출신 탈북자 박병엽과 그의 주장을 적극 수용한 정창현 등은 김영주 은퇴의 원인에 대해서 다른 설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황장엽의 영향을 받은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1974년 2월 12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극하여 당중앙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동등, 심지어 우월하다는 주장을 슬금슬금하기 시작했는데, 2월 19일 개최된 전국선전일군강습회에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50년 전, 100년 전의 낡은 사상으로 비판하며 새 시대에는 새 사상이 필요하다는 뉘앙스의 연설을 하였다. 이는 당연히 주체사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연설제목을 보면 김일성주의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김정일은 1973년부터 김일성주의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2] 이렇듯 김일성주의로의 격상은 김정일의 손으로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3] 이는 명백히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도체제를 김정일 자신이 물려받기 위해 '재생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정일은 여기에 더해 조총련을 통해 일본으로 주체사상을 전파하였고, 아프리카, 동남아, 남아메리카 등 세계 각국으로 주체사상 수출에 나섰다. 1970년대 후반에 설립된 주체사상연구소가 주체사상 수출을 주도했다. [4]

하지만 김일성주의 선포와 김정일의 주체사상 해석 독점 노력은 환영받지만은 않았다. 김정일은 1976년 "김일성주의의 독창성을 옳게 인식할 데 대하여"란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1991년 발표된 <조선로동당력사>에서는 김정일의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로 수정돼서 출판되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전혀 굴하지 않고 주체사상의 정립화를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는데, 사회 유기체론을 도입하여 수령을 국가의 뇌수로 규정하고, 수령으로부터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기독교 영생관스러운 개념을 도입한 것이 1970년대 초중반의 이론화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김정일은 삼촌 김영주가 1967년 작성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수정하여 1974년 4월에 다시 발표하였다. 이 10대 원칙의 10번 조항은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라는 문구를 통해서 김정일 세습을 노골적으로 암시하였다.

1980년 개최된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는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승격시켰으며, 그해 조선로동당규약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지도이념에서 삭제하였다. 1982년에는 평양에 주체사상탑이 세워졌다.

4. 굴절기(1982~1990년대 중반)

1980년대는 김정일의 세습 구도 공고화, 동구권의 붕괴와 맞물려 주체사상의 굴절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1982년, 김일성의 칠순을 기념해서 열린 전국주체사상토론회에서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논문을 제출하였다. 주체사상을 창시,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적 원리, 지도적 원칙, 역사적 의의 등 5개 부분으로 나누어 논리적으로 정립한 이 논문에서 김정일은 인간 중심이라는 주체사상을 노골적으로 수령 중심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역사의 주체는 근로인민대중이지만, 근로인민대중은 착취사회에서 단결하지 못했고, 이들을 올바른 영도를 통해 혁명과 건설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수령이라는 것이었다. 1985년 김정일은 주체사상 총서 10권을 발매하였으며, 1986년 제출된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혁명적 수령론을 노골화하였다.
수령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종합, 분석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는 중심인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입니다. (...) 혁명적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함없이 오직 자기 생각의 모체인 수령-당-대중과 생사운명을 같이해 나갑시다.
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1988년 김정일은 <혁명의 주체>란 단행본을 내놓아 자신의 논문을 해설하면서, 역사의 주체와 역사의 자주적 주체를 구분하였다. 이는 당연히 혁명은 혁명의 최고영도자이며 뇌수인 수령과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실현하는 당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으로, 수령, 당, 인민의 3위일체론으로 정립되었다. 수령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하며, 수령에 대해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를 지켜 수령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내용 등도 여기에 담겨 있었다. 결론적으로 노동계급의 이익은 당이 대변하고, 당의 이익은 수령이 대변하니 수령을 잘 따르라는 소리인데 구구절절 적지 않아도 김정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다들 잘 알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조선민족제일주의같은 하위담론들을 발전시켜가며 주체사상의 당위성을 보완했다.

물론 김정일이 단순 권력욕에 빠져서 이런 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에서는 미하일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를 시도했으며,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하고 있었다. 북한의 경제사정이 날로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두 사회주의 대국의 변화는 북한 정권으로 하여금 현재 통치 노선을 좀 더 강하게 뒷받침할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구호에 집착하게 되었다.
위대한 주체사상을 구현하고 있는 우리 당의 로선과 방침은 우리식대로 살아나가기 위한 강령적 지침이다. (..)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에 어긋나는 그 어떤 사상도 우리 내부에 침습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온 사회에 주체사상과 그 구현인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만이 차넘치게 하여야 한다.
조선중앙방송,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사고하며 일해가자>(1991.9.2)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유물변증법, 생물학적 진화론을 비판하며 주체사상의 독창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상론을 강조하면서 물질적 결핍을 실드치고 사회주의는 사상을 틀어쥐어야 승리한다는 사상론을 내세웠다. 1992년 헌법개정을 통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언급은 최종적으로 삭제되었으며 '인간중심의 철학적 원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5. 완성기(1990년대~)와 그 이후

일단 주체사상의 발전은 총 4단계로 구분되지만 마지막 단계인 이 4단계에는 사실 그다지 쓸 것이 별로 없다. 1991년 소련 붕괴, 1994년 김일성 사망, 그 직후 닥쳐온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은 처참한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1997년에는 주체사상의 실질적 창시자인 황장엽이 망명하기까지 했기 때문다. 이런 와중에 김정일은 정권 유지와 안보를 위해서 군에 모든 것을 몰아주자는 선군정치를 자신의 통치사상으로 내걸며, 주체사상을 직접 언급하는 빈도는 확연히 줄었다.

김정일은 1996~1998년 사이 '붉은기' 사상을 내세워 한때 주체사상을 폐기했다는 주장이 나오게 만들었지만 1998년 헌법을 통해 주체사상을 재확인하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김일성주의인 주체사상을 강화하기보다는, 자신의 통치사상을 확립하는데 앞장섰고 주체사상은 다소 이름만 남은 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북한은 원래부터도 극도의 군국주의 사회였고,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을 군대를 이용해서 돌파한다는 선군후로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김정일은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지목하고, 2000년대부터 선군사상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이를 김일성의 군사사상을 계승하여 혁명과 투쟁방법을 혁명군대를 중심으로 새로 밝힌 사상이론으로 내세웠다. 여기서 주체사상까지 수정하여 혁명역량이 인민군대를 앞세운 주력군에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선군사상의 정립은 10년 정도 밖에 걸리지 못했고, 김정일의 죽음으로 주체사상만큼 체계적인 사상이 되진 못했다.

선군사상은 2009년 헌법에서 지도이념으로 격상되었고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도 선군혁명이 국가적 목표로 언급되었으나, 2011년 김정일의 사망으로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흐지부지 사라졌고 현재는 김정은이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내세워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논리적 연결을 진행하는 중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별로 논리적 상관도 없고, 내용적으로 더 개정된 부분도 없다.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7.1. 이념

7.2. 사건


[1] 그러나, 김일성이 저술했다고 주장하는 <조선혁명의 진로>는 1978년에서야 원문이 공개되었기에 실제로 1930년에 집필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또한 다른 자료들과 교차 검증되지 않으므로, 이것은 일반적으로 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치켜세우기 위해 자행한 수많은 역사왜곡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하지만 김일성이 만주에서 훗날 주체사상의 문제의식들과 담론들을 이룰 만한 중요한 경험을 한 것은 사실이다.[2] 다만 해당 주장이 나온 김정일선집은 1992년인데 반해, 1987년의 김정일선집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는 것은 유의해야 할 점.[3] 김일성은 이에 대해서 자신이 마르크스, 레닌보다 위대하다는 소리냐면서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4] 이러한 노력이 아주 헛되지는 않은지 지금도 미국, 서유럽에 주체사상 연구소조니, 선구사상 연구회니, 김일성-김정일주의 연구회니 하는 괴조직들이 상당수 남아있으며 이들은 남북관계에 불화가 생길 때마다 열심히 북한을 옹호하는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도 보답인지 이들을 북으로 가끔 초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