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문화유산 | 2013년 알 주바라 고고학 유적 موقع الزبارة |
1938년에 세워진 주바라 요새
앗 주바라 주거지 유적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 |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알 주바라 고고 유적 | |
| 아랍어 | الزبارة | ||
| 영어 | Al Zubarah Archaeological Site | ||
| 프랑스어 | Site archéologique d’Al Zubarah | ||
| 국가·위치 | 앗 샤말 주 |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 지정번호 | 1402 | ||
| 등재연도 | 2013년 | ||
| 등재기준 | (ⅲ)[1], (ⅳ)[2], (v)[3] | }}} | |
1. 개요
카타르 북부의 유적이자 유일한 세계유산. 18세기 쿠웨이트, 바레인의 건국 세력인 바니 우트바 연맹이 세웠고 19세기에 세계적인 진주 생산지 중 하나로서 번영했다. 바레인 왕가인 알 칼리파 가문이 1783년 바레인 섬을 정복하기 전에 거점으로 삼았고, 이후로도 바레인 령을 남았으나 1937년 카타르의 알 타니 가문이 무력으로 점령해 카타르 령으로 남았다. 다만 20세기 들어 식수 부족으로 도시는 점차 버려졌고, 1980년대에 이르면 일부 베두인 천막과 해안 경비대 정도만 상주했다. 21세기 들어서는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2. 역사
유적지 전반부
지명은 아랍어로 모래 언덕을 뜻한다. 남쪽 20km 지점의 만에 위치한 움 알마에서는 청동기 시기 딜문 문명의 유적지가 발견되었고, 이슬람 제국 시기 카타르 반도 북부에는 해안을 따라 여러 마을이 세워졌다. 다만 1627-28년 포르투갈 제국 함대가 일대를 습격하며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그러던 1690년 무렵 네지드의 가뭄을 피해 라일라를 거쳐 걸프 해안으로 이주하던 아나자 부족 계열의 바니 우투브 연맹[4]이 주바라 북쪽 2km 지점의 프레이하 (فريحة)에 정착해 요새화 했고, 바니 칼리드 연맹에 복속해 있는 현지 마아디드[5]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곧 마이디드 부족과 대립하게 된 바니 우투브 연맹은 1716년 이라크 방면으로 떠나 방랑하다가 쿠웨이트에 정착한다.
그렇게 반세기 가량이 흐른 후 바니 우투브 연맹 중 알 사바흐 가문이 주도권을 쥐게 된 것에 반발한 알 칼리파 및 알 잘라흐마 가문이 1760년대 초엽에 쿠웨이트를 떠나 다시 카타르 반도로 돌아왔고, 파괴된 프레이하의 남쪽에 주바라를 건설했다. 주바라의 군주로 부상한 셰이크 무함마드 빈 칼리파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고, 반도 맞은편 바니 칼리드 연맹에 복속해 있던 후와일라의 무살람 가문이 요구한 연공을 거부하며 대립했다. 군사적 충돌이 이어지자 그는 주바라에 2km가 넘는 육상 성벽을 건설했고, 1768년에는 외곽에 무라이르 요새를 건설했다. 이어진 전쟁 끝에 주바라의 칼리파 가문이 승리하여 무살람 가문은 네지드로 도주했다.
2.1. 전성기 (18세기 말, 칼리파 가문)
전성기 주바라의 복원도. 많은 석조 건물들은 걸프에 흔한 산호석 대신 내륙 프레이하의 석회암으로 세워졌다.
이로써 카타르 반도 북부는 바니 칼리드 연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치를 얻었고, 칼리파 가문의 관세 폐지 덕분에 주바라는 걸프 해안의 주요 진주 거래 항구로 발전했다. 특히 1775-76년 오스만-페르시아 전쟁 후 잔드 왕조가 바스라를 장악하자 일부 현지 수니파 무슬림 상인들이 쿠웨이트와 주바라로 이주하며 도시는 더욱 발전했다. 18세기 후반 주바라에는 쿠웨이트, 오만, 이라크, 인도 등지에서 상인들이 왕래했고 네지드의 대추야자 역시 주바라에서 수출되었다. 동시에 향신료, 금속, 도자기 등이 수입되었다. 1777년 주바라의 셰이크가 된 칼리파 빈 무함마드는 이라크 출신의 상인 무함마드 알 루자이키[6]와 아들 아흐마드를 후원했고, 후자는 넓은 주거 및 상업 지구를 건설했으며 법학자 우스만 이븐 사나드 알 바스리를 초청해 주바라의 카디 (법관)로 삼았다. 그 외에 신학자 압둘 잘릴 앗 타바타바이도 정착했다.
후일 카타르 알 타니 왕가의 시조인 타니 빈 무함마드 역시 주바라에서 태어나 진주 상인으로 성장했다. 1780년대 들어 네지드를 통합한 디리야 토후국이 바니 칼리드 연맹의 알 아흐사를 공격하며 걸프 해안이 불안해지자 주바라의 중요성은 더욱 증가했다. 그러던 1782년 칼리파 가문의 하인 살렘이 대추야자수 목재, 밧줄 등을 사러 바레인 옆의 시트라 섬에 방문했다가 현지 쉬아 무슬림 주민들의 공격으로 살해되고 소지품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 부상을 입고 겨우 생환한 동료들이 소식을 전하자 주바라의 신임 셰이크가 된 아흐마드 빈 무함마드는 심복의 죽음에 분노하여 잔드 왕조의 바레인 & 부셰르 총독인 나스르 알 마드쿠르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나스르가 별일 아니라고 대응하자 아흐마드는 쿠웨이트 등 바니 우트브 연합군을 구성해 1782년 9월에 바레인을 공격, 마나마를 3일간 약탈하고 파괴했다.다만 성채의 수비대와는 서로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함락에 실패한 연합군은 연공을 수집하던 잔드 왕조측 선박을 나포한 후 주바라로 회군했다. 10월에는 잔드 왕조의 쉬라즈 총독 알리 모라드 칸이 나스르에게 2천여 병력을 보내며 주바라를 토벌하게 했다. 12월부터 함대를 준비한 나스르는 1783년 5월에 출항, 주바라 남쪽의 라스 우샤이리크에 상륙했다. 칼리파 가문에게는 다행히도 간조 때라 함대가 육지 근처에 정박하지 못했고 잔드 군대는 육로를 통해 주바라를 공격, 한 달간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라스 알카이마의 전 군주 라시드 빈 마타르 알 카시미의 중재로 바니 우투브 측은 반다르리그와 바레인 등지에서 약탈한 물품과 선박들의 반환하는 조건의 휴전안을 제시했으나 나스르는 거부하고 여름 동안 재정비한 후, 12월에 재차 주바라를 공격했으나 아흐마드는 마아디드 부족 등의 도움으로 격퇴했다.[7]그대로 반격에 나선 아흐마드는 어렵지 않게 1783년 말에 바레인을 정복했고, 페르시아 인들을 추방했다.[8] 다만 그는 여전히 주바라를 본거지로 여겼고, 바레인에는 마나마 남쪽의 앗 디완 요새에 총독 알리 빈 파리스와 심복 아자즈 휘하의 수비대를 배치했다. 1790년경 주바라는 카티프 이상으로 번영했고, 말리키파 학자 압둘 라흐만 앗 자와위에 의해 카타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적인 주바라 얼머낵 (농사달력)이 출판되었다.[9] 시가지는 촘촘한 격자형으로 조성되었고, 인구는 8,000명에 이르렀다. 식생활에 있어 상류층은 양이나 염소, 서민층은 생선이나 바다새로 단백질을 섭취했고 이는 수북이 쌓인 뼈무지로 증명된다. 도시 생활의 중심이었던 수크 (시장) 자리에서는 도자기로 만든 담뱃대와 중국산 커피 주전자들이 다수 발견되어 아메리카 대륙의 담배와 아랍 커피가 사회적으로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2.2. vs 디리야 토후국
옛 성벽의 잔존부
번영하던 주바라는 1787년부터 디리야 토후국의 장군 술라이만 빈 아피산이 일대를 습격하며 위기에 직면했다. 1792년 사우디 장군 이브라힘 빈 아피산이 바니 칼리드 연맹을 멸망시키고 알 아흐사를 정복하자 많은 피난민이 주바라로 몰려들었다. 뒤이어 알 아흐사 총독이 된 이브라힘이 카타르를 위협하자 아흐마드는 반도 남쪽에 운하를 파서 사우디 기병대의 접근을 막으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1793년 이브라힘이 카타르로 진입해 프레이하아 후와일라 등을 점령했다. 뒤이어 사우디 군대가 피난민들을 수용한 것을 이유로 주바라를 포위하자 아흐마드는 디리야의 이맘 압둘 아지즈에 자카트 납부를 약속하는 등 복속하고 바레인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후 주바라를 월동지로만 쓰던 아흐마드는 1795년에 바레인에서 사망했고, 아들 살만 빈 아흐마드 알 칼리파가 계승했다. 그러던 1800년, 오만 제국의 술탄 빈 아흐마드가 바레인을 정복했다. 주바라로 철수한 살만은 디리야 토후국에 도움을 청했고, 사우디령 알 아흐사 총독 이브라힘 빈 아피산이 1809년 바레인을 정복했으나 그대로 총독 행세를 하며 눌러앉았다. 같은 해 칼리파 가문은 무력으로 바레인 수복을 시도했으나 술레이만 빈 사이프 빈 투크가 이끄는 사우디 군이 주바라마저 함락하여 저지했고, 살만 등의 수뇌부를 디리야로 압송했다. 디리야의 이맘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는 살만 일행만 디리야에 연금시키고 나머지는 주바라로 돌려보냈다.
그러던 1810년, 주바라의 칼리파 가문은 오만 제국에 복속하는 조건으로 오만의 사이드 빈 술탄과 쿠웨이트 및 카자르 왕조의 도움을 받아 주바라와 바레인을 수복했다. 이때 주바라는 화공을 당해 불탔고, 바레인에서 붙잡힌 사우디 포로들과 살만 일행이 교환되었다. 협상을 거부한 이브라힘 빈 아피산은[10] 잘라흐마 가문의 해적 라마 빈 자베르가 이끄는 60척의 함대와 함께 주바라를 공격했다. 이에 칼리파 가문은 쿠웨이트에 지원을 요청해 2백척의 함대를 받았다. 1811년 3월에 주바라와 바레인 사이에서 벌어진 카키라 전투에서 바레인-쿠웨이트 연합 함대는 사우디-잘라흐마 함대를 격파했고[11], 마침 이집트의 침공에 직면한 디리야 토후국은 더 이상 걸프 해안에 개입하지 못했다.
2.3. 쇠퇴기
폐허로 남은 주바라의 석조 건물
20여 년 만에 평화가 회복되었지만 이미 여러 차례 전란을 겪은 주바라는 버려졌고, 살만은 1814년과 1820년에 영국과 군사 동맹을 맺는다. 그 무렵 바레인의 영국 관료 및 장교들은 주바라가 한때 번성했으나 버려진 도시라고 묘사했다. 1824년 살만의 사후 계승한 압둘라 빈 아흐마드의 시기에야 주바라는 재건되었으나, 기존 시가지의 20% 정도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새로 세워진 성벽은 기존보다 훨씬 해안에 가까웠고 주택들도 더 작았으며[12] 시가지도 장방형 대신 불규칙하게 조성되었다. 주바라는 계속해서 진주 교역항으로 남았고, 1847년 바레인이 네지드 토후국에 복속한 후에는 그에 자카트를 바쳤다. 1851년 바레인이 네지드 토후국과 재차 충돌한 메사이미르 전투 후 카타르는 바레인의 지배하에 놓였는데,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한 부족들은 타니 가문의 자심 빈 무함마드의 주도하에 봉기했다. (1867년)
전황은 바레인 측에 유리했지만 제벨 와크라 전투에서 카타르 부족들이 반격에 성공했고, 1868년에 영국의 중재 하에 카타르 반도 대부분은 타니 가문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로써 칼리파 가문은 주바라 일대만 현지 나임 부족과의 협의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71년 알 아흐사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은 1873년 무렵 호세인 에펜디 휘하의 1백여 병력을 카티프를 통해 주바라에 배치했다. 이에 바레인의 이사 빈 알리는 영국 측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카타르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회신만이 돌아왔다. 1874년에는 바레인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나시르 빈 무바라크 알 칼리파가 장인인 자심에게로 망명했고, 주바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사는 주바라에 수비 병력을 배치했다.[13] 1878년 9월, 일부 주바라 주민들이 영국 선박을 약탈하고 4명을 죽이자 영국은 오스만령 바스라 총독 압둘라 파샤에 처벌을 요구했다.
2.4. 오스만 제국 휘하 카타르
이를 핑계로 10월에 도하의 자심은 나시르와 함께 2천의 병력으로 주바라를 공격했고, 시가지를 약탈한 후 5백의 나임 부족원이 피신한 무라이르 요새를 포위했다. 결국 나임 부족은 항복했고, 자심은 주바라의 주민 대부분을 도하로 이주시켰다. 이로써 주바라는 오스만 휘하 카타르 령이 되었다. 1888년 자심은 주바라를 재건하고 나시르로 하여금 바레인을 공격하는 기지로 삼게 하려 했으나 영국의 경고로 계획을 취소했다. 1895년에는 바니 우투브의 일원인 알 빈 알리 가문이 자심의 초청으로 바레인에서 주바라로 이주해 정착했다. 이에 자심이 침공을 준비한다 여긴 바레인의 이사는 영국에 도움을 청했고, 영국은 다시 오스만 당국에게 정착 중단을 권고했다. 별 효과가 없자 영국은 군함을 주바라로 보내 철수를 거부한 알 빈 알리 가문의 선박 7척을 나포했다.이를 주권 침해라 여긴 주바라의 오스만 관리는 조정에 상주했고, 카티프 인근에 병력이 집결했다. 자심 역시 해안에 함대를 모았고, 주바라의 오스만 사령관은 바레인을 오스만 영토라 선포하며 술탄이 카타르 부족의 해상 원정을 도울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 서면 경고를 이어가던 영국은 결국 주바라 항구를 포격해 44척의 다우선을 격침시켰고, 이에 오스만 군대가 철수했다. 그러자 자심은 무조건 항복하며 주바라에 트루셜 스테이트 깃발을 게양하고 영국에 3만 루피의 연공을 바치게 되었다. 이후 주바라는 군사적 압박하에 계속해서 버려졌고, 20세기 초엽 남은 인구는 식수마저 부족해지자 도하 등지로 이주했다. 1908년 영국 당국은 주바라를 버려진 도시로 묘사했고, 무라이르 요새와 바다를 잇던 수로 역시 퇴적으로 메워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한편 1893년 실질적 자립을 얻은 카타르는 1915년에 완전히 자립한다.
2.5. 바레인-카타르 전쟁
칼리파 가문이 세운 무라이르 요새를 허물고 1938년에 그 자재로 세워진 주바라 요새
1932년 바레인 해역에서 유전이 발견되자 자극을 받은 카타르의 셰이크 압둘라 빈 자심은 영국 회사에 채굴권을 부여하고 폐허가 된 주바라를 원유 운송 터미널로 활용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또한 바레인에서 주바라로 오는 선박에 관세를 매기고 해안을 따라 수비대를 배치했다. 이로써 바레인의 셰이크 하마드 빈 이사가 분노하던 와중에 주바라 인근의 나임 부족은 결혼 분쟁으로 친카타르 파벌인 알 라마진, 친바레인 파벌인 알 자부르로 나뉘었다. 하마드는 영국의 반대에도 주바라에 병력을 파견했고, 칼리파 가문의 깃발을 게양했다.
영국의 중재 시도에도 그해 7월, 압둘라는 차량과 대포까지 대동한 3천의 병력으로 1,000여 명의 병력이 있던 주바라의 알 자부르 세력을 공격했고 몇 시간의 전투 끝에 후자는 패하여 항복하거나 바레인으로 도주했다. 승리 후 1938년 압둘라는 이미 폐허가 된 무라이르 요새의 자재를 활용해 주바라에 새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배치하며 지배력을 강화했다.[14] 다만 이후 바레인은 약 5년간 카타르 해안을 봉쇄했고, 이로써 카타르는 진주 수출길이 막히며 1950년대 오일머니 확보 전까지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2.6. 현대
일부 복원된 주바라 유적 부분
바레인의 해안 봉쇄와 영국의 긴장 완화 요구로 주바라에는 1938년 이후 반세기 가량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지 못했고, 이로써 주바라는 요새 외에는 완전히 버려졌다. 20세기 말까지 주바라에 대한 영유권 요구를 하던 바레인은 2001년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카타르의 영토로 판결을 내린 후에야 주장을 철회했다. 폐허에 나임 부족이 가끔 천막을 치고 임시 거처로만 쓰던 주바라는 1980년대에 요새에 배치되었던 해안 경비대마저 철수하자 더욱 인적이 뜸해졌다. 한편 1956년부터 덴마크 발굴팀이 주바라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부터 카타르 정부의 지원하에 대대적인 발굴을 벌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유적 일대에 보호 울타리가 쳐졌고 2002-03년에도 발굴이 있었다.
2008년 주바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이 되었고, 2009년부터 코펜하겐 대학교와 카타르 발굴팀이 협동 조사에 나섰다. 2010년 무렵에는 방문자 센터가 생겼고, 방문객들은 소지품 검사 후 유적지에 입장하게 되었다. 2012년에는 주바라 요새가 복원에 들어갔고, 마침내 2013년 6월 주바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2014년 기준 주바라를 찾은 관광객은 3만 명이었고,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다.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4] 알 칼리파, 알 사바흐, 알 잘라흐마 가문으로 구성됨[5] 알 타니 (사니) 가문이 포함됨[6] 무함마드 빈 후세인 빈 리즈크[7] 그 과정에서 나스르의 조카이기도 한 무함마드 빈 칼리파 등이 전사했다. 이때 나스르의 검을 전리품으로 얻은 알 빈 알리 가문은 1915년에 카타르의 셰이크 압둘라 빈 자심에게 선물로 주었다[8] 사로잡힌 나스르는 죽이지 않고 부셰르로 보내주었다[9] 날씨와 함께 이슬람 예배 시간도 기입했다[10] 사우드에게 자신이 공격해 수복할 테니 포로들을 풀어주지 말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이미 석방된 후였고, 사우드는 뒤늦게 그들을 재차 체포하려 했지만 이미 바레인에 당도한 후였다[11] 라마 빈 자베르는 알 사바흐 가문의 두아이즈 빈 사바흐, 바레인의 섭정이던 알 파델 가문의 라시드 빈 압둘라를 비롯해 1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등 분전했지만 후와일리아의 아미르 아부 후세인 등의 3백여 병력을 잃고 철수했다[12] 반세기 이전에 쓰인 석고 장식도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13] 또한 영국의 반대에도 1백여 나임 부족원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14] 이로써 바레인 지배기의 상징이던 무라이르 요새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