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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23:06:37

존 세머 판스워스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존 세머 판스워스
John Semer Farnsworth
파일:JSFarnsworth.jpg
출생 1893년 8월 13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사망 1952년 11월 10일 (향년 59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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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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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가족 프레드릭 윌킨슨 판스워스 (아버지)
애나 M. 세머 (어머니)
학력 미국해군사관학교 (1911~1915)
MIT (대학원)
뉴욕소재 대학원 (위치미상)
직업 군인
소속 미합중국 해군

1. 개요2. 생애3. 활동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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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간기 미국의 해군 장교이자 일본의 공작원.

2. 생애

시카고 태생의 판스워스는 1911년 아나폴리스의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생도 시절 음주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능력은 인정받아 사관학교 졸업 후 미국 아시아 함대[1]의 구축함으로 발령되었다.

1917년에 대위(진)이였던 판스워스는 해상 근무를 끝내고 본토로 돌아와 군생활을 이어나갔다. 이 기간동안 펜사콜라에 위치한 해군항공기지에서 비행선, 수상기 조종 훈련을 받았고 1922년에 수료했다. 이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기도 하였다.

1922년 소령으로 진급한 판스워스는 이후 결혼에 성공하지만 이때 큰 빚을 지게 되고 급전이 필요했던 소령 판스워스는 하사관에게서 돈을 빌렸다. 문제는 판스워스는 이후 빌린 돈을 갚지 않았고 결국 1927년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군사재판에서 당연히도 유죄 판결을 받고 불명예 전역 처분을 받았다.

때마침 이 시기 일본은 미군측 첩보원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군에 대한 배신감과 당장 돈이 필요했던 판스워스는 자신이 군인으로 지키던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을 위한 간첩으로 변모한다.

3. 활동

본인은 불명예 전역을 했지만 고위급 해군 장교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낮았던 미 해군 보안의 허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인맥들에게 분산하여 얻은 군사기밀을 물어본 뒤 추후에 취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정보를 만들었다. 그의 인맥들은 본인들의 정보가 어디에 쓰일지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판스워스는 이렇게 얻은 정보들을 일본 대사관의 해군 보자관 요시유키 이치미야 중령에게 전달했고, 1935년부터는 그의 후임 야마키 아리카 중령에게 전달했다.

판스워스의 행각은 간혹 대범하기도 했는데 한 예로 아나폴리스에 정박해있는 구축함에 직접 올라타 만취한 지휘관 행세를 하며 탑승하고 있던 해군 소위를 속이고 구축함의 기동 데이터를 절도했다. 또 같은날 사본을 만들어 일본 대사관에 전달하고 다음 날 다시 구축함에 되돌려 놓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고 이러한 판스워스의 스파이 행각은 35년에 해군 기밀문서인 "The service of Information and Security"[2][3]의 절도 과정에서 문서의 도난이 해군 정보국에 신고되어 해군 정보국은 이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판스워스는 무일푼임에도 지인 해군 장교들에게 거금의 소유를 자랑했었고, 그는 인맥들을 통해 암호책과 통신책을 빌리기도 했으며 해군의 작전, 신형함선의 구조, 무장 상태들을 자주 물어봤다. 결정적으로 판스워스는 아나폴리스에 살고 있는 고위급 장교의 아내에게 접근해 군문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조력해달라는 공작을 지속적으로 행했고 이에 고위급 장교의 아내는 해군 정보국에 이 사실을 알려 판스워스는 이 시점으로부터 해군 정보국FBI의 공동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판스워스 검거의 계기는,35년 11월 연락책 야마키 중령이 야마구치 분지로 중령으로 교체되면서 일어났다. 이때부터 판스워스에게는 고정급이 아닌 건별로 수입이 지급되기 시작했고 또 본인에게 수사망이 좁혀온다는 걸 느낀 판스워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36년 초 허스트 신문사의 워싱턴 특파원 풀턴 루이스 주니어를 찾아가 "일본 정부를 위해 미국 해군에서 스파이를 한 방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제안했고, 대가로 2만 달러와 독일로 가는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탑승 우선권을 조건으로 요구했다.

다음 만남 때 루이스는 판스워스에게 일본과의 관계를 증명할 것을 요구했고, 판스워스는 곧장 야마구치 분지로 중령에게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신용을 확실하게 입증시키고 싶었던 판스워스는 루이스를 자신의 아지트로 데려가 기밀문서의 사본 및 자신의 스파이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을 루이스에게 알려주었다. 또한 위에 언급된 전화로 인해 판스워스와 야마구치 분지로간의 회의가 잡혔는데 루이스를 택시 기사로 위장해 데려가려고 까지 시도했지만, 루이스가 거절해 실현되지는 않았다. 또한 루이스는 이미 첫 만남 이후 해군 정보국에 고발을 한 상태였고, 두번째 만남에서 본 확실한 증거들도 정보국에 신고를 하였다. 해군 정보국은 덕분에 손쉽게 판스워스를 잡을 수 있었다.

1936년 7월 14일 판스워스는 일본에게 기밀정보를 판 혐의로 체포되었다. 루이스에게 자백한 증거와, 판스워스가 정보를 빼돌리는데 사용했던 인맥들의 증언들로 인해 초기 법정에서 판스워스는 무죄를 주장하기도 하고,노로 콘텐데레[4]도 시전하고, 다시 무죄를 주장하더니 변호팀을 철수시키고 직접 변호를 하는 등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였다.[5]

결국 1937년 2월 27일 "미국 국방에 해를 가할 의도로 외국 정부(일본)에 국방과 관련된 문서, 암호집, 사진 및 계획을 전달하고 전송하려는 공모" 혐의로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도 했지만 기각되었고, 복역한지 11년이 되던 해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4. 여담



[1] 20세기 초부터 태평양 전쟁 초반까지 존재했던 현 7함대의 전신,태평양 전쟁 개전 후 5달만에 함대의 절반이 증발하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 살아남은 함대는 ABDA함대와 함께 연합국 남서태평양함대 해군의 지휘를 받다가 43년에 7함대 창설의 모태가 되었다.[2] 현장 전투 경험으로 얻은 정보들과 사용된 전술들을 집필[3] 이 책의 사본을 35년 5월 15일날 일본에 판매한 것으로 밝혀졌다[4] Nolo Contedere, 범죄를 시인하지는 않지만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를 부정 또는 긍정하지도 않음. 이러면 사실상의 혐의 인정이지만 판결은 배심원단이 아닌 판사가 내리게 되어있는데 판스워스도 이걸 노린 것으로 보이나 추후 본인은 노로 콘텐데레가 사실상의 혐의 인정인 줄 몰랐다고 본인의 답변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물론 거부됐다.[5] 참고로 판스워스의 변호사는 이치미야와 야마키 중령을 증언하도록 일본에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로부터 거절당했다. 사실 이미 이 두 인물은 기소목록에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판스워스가 체포되자마자 미국을 떠났다.[포트레잇] 파일:b1e91f890881298f130390d2d6e630b4c38e4216.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