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José_Jorge_Loureiro.jpg | |
| <colbgcolor=#006127><colcolor=#ffffff> 출생 | 1791년 4월 23일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 사망 | 1860년 6월 1일 (향년 69세)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 국적 | |
| 재임기간 | 제7대 총리 |
| 1835년 11월 18일 ~ 1836년 4월 20일 | |
| 학력 | 코임브라 대학교(법학/학사) |
1. 개요
조제 조르즈 로우레이루(José Jorge Loureiro, 1791년 4월 23일 ~ 1860년 6월 1일)은 포르투갈 입헌군주제 시기에 활동한 군인이자 정치인. 리스본 출신으로, 그 격동의 시절에 여러 핵심 관직을 거친 인물이다.
특히 1835년 11월 18일부터 1836년 4월 20일까지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이후에는 **포르투갈 대통령령하 내각수반(총리)**까지 올랐던 중량감 있는 관료. 당시 포르투갈 국내 재정혼란이 심했던 때라, 그의 재무장관 재임은 “조세 정비기 시도”로 자주 언급된다. 군 경력 또한 길어, 입헌군주제 초기 정치·군사 엘리트층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2. 생애
아버지 도밍구스 고메스 로우레이루(리스본의 상인)와 어머니 아나 이사벨 조아키나 드 로우레이루 사이의 아들이다. 리스본에서 기초 교육을 마친 뒤, 코임브라 대학교 법학부(당시 ‘Leis’)에 진학해 법학 과정을 밟았다.학업을 이어나가던 중 1808년 제1차 프랑스 침공[1]이 터지자마자 전장에 뛰어들게 된다. 안도슈 주노[2]에 맞선 저항·혁명 운동에 바로 합류했고, 주노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조직된 학도대대(Batalhão Académico)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이 부대가 참전한 반도전쟁의 모든 주요 작전에 참여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으며, 신트라 협약 체결 후에는 리스본에 남아 학업 대신 군 경력을 선택하게 된다.
다음 해 그는 대학을 완전히 그만두고 군에 투신했다. 1809년 4월 25일 입대해 같은 해 9월 24일 학도 자원병에게 주어지던 규정 덕에 바로 알페레스(소위) 계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상급 장교단의 눈에 띄었고, 당시 그의 집에 묵고 있던 영국군 장교 아치볼드 캠벨 경(Sir Archibald Campbell)의 부관으로 발탁된다. 가족은 처음엔 극렬히 반대했지만, 캠벨의 설득 끝에 결국 승낙을 얻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는 캠벨 휘하에서 1809년부터 1814년까지 스페인 전역의 반도전쟁 작전에 줄곧 참전했으며, 알부에라(1811), 비토리아(1813), 피레네(1813), 파믈로나(1813)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중위로 진급하여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포르투갈의 역할이 끝난 뒤, 그는 1818년 초에 대위로 진급했고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 주재 포르투갈 공관의 군사참사관으로 임명됐다. 몇 년간 그곳에서 근무한 뒤 리스본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정규군 진영에 복귀했고,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1828년 미겔 1세가 상륙해 왕위를 차지하고 전제군주제가 부활하던 그 시점까지도 같은 부대에 머물러 있었다.
2.1. 포르투갈 내전에서의 활약
그는 원래부터 잘 알려진 강경 자유주의자였고, 새로 들어선 미겔 체제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선택지가 없어 망명길에 올랐고, 영국과 아일랜드를 거쳐 런던에 잠시 머문 뒤 프랑스를 정착지로 삼았다. 파리에 살면서 망명 기간을 공부로 채웠는데, 자연과학·경제·역사 관련 강의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프랑스 곳곳과 스위스, 알프스 일대를 돌며 사실상 유럽식 ‘유학 겸 연구 여행’을 이어갔다.
이후 아소르스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에 집결한 자유주의 계열 포르투갈 세력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자유파가 꾸린 조직의 핵심 직책을 맡았고, 자유군 보병 원정 제2사단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민델루 상륙작전에서 병력 수송과 상륙 준비를 총괄한 책임자이면서 직접 상륙에도 참여하였다. 이어진 포르투 공방전에서도 적극적으로 싸웠고, 특히 1832년 7월 23일의 폰트 페헤이라 전투[3]에서 두드러진 공을 세워 소령으로 특진했다. 이후 그는 자유군 최고사령부의 군수·작전 조직을 총괄하는 부서 지휘관으로 발탁되었고, 같은 해 9월 포르투 방어선에서의 활약이 크게 인정되어 주앙 6세의 아들 페드루 4세에게서 토르르 이 에스파다 훈장(용기·충성·공훈의 칭호)을 받았다. 포르투 지역에서 자유파 전력이 안정된 뒤에는, 자유군 보병 제3사단의 참모총장으로도 임명되었다.
1833년 중반, 마침내 해상으로 리스본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군이 편성되자 그는 빌라플로르 백작이자 테르세이라 공작으로 알려진 안토니우 조제 세베림 드 노로냐가 지휘하는 사단의 군수·작전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노롱야 휘하에서 알가르브로 이동해,대담한 알렌테주 종단 행군을 통해 미겔파 전력을 격파하고, 1833년 7월 24일 자유군 선봉과 함께 리스본에 입성했다. 리스본 탈환 직후 그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수도 방어를 위한 병력 재편과 방위 체계 구축을 맡아 연이은 미겔파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듬해에는 아세이세이라 전투[4]에 참전했으며, 이 전투에서 그는 중상을 입었다.
2.2. 짧은 총리 재임
1834년 자유파와 왕당파의 내전이 끝난 뒤 그는 대령으로 진급했고, 미겔파와 싸우며 이름을 알린 자유주의파 군인들 하나로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선택했다. 그는 확고한 카르타 헌법파[5]였고, 1835년 11월 18일 온건·급진 자유주의 계파를 절충하려는 성격의 내각에서 전쟁부 장관으로 기용되었다. 이 내각은 살다냐 백작이자 후일 테르세이라 공작이 되는 주앙 카를루스 드 살다냐가 총리를 맡은 정부였고, 내무에는 사 다 반데이라, 외무에는 롤레 후작, 재무에는 훗날 빌라 노바 드 포스코아 남작이 되는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드 캄푸스, 법무에는 마누엘 벨레즈 칼데이라가 들어갔다. 그는 1836년 4월 6일 재무장관직을 잠시 대행했고, 일주일 뒤 살다냐가 사임하면서 정부 수반 자리까지 넘겨받았다. 그러나 나라 재정 상황이 완전히 박살 난 상태라 수습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1836년 4월 20일 그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며 내각도 붕괴했다. 이후 권력은 테르세이라 공작과 같은 보다 보수적 성향의 인사들에게 넘어갔다.
1836년 9월혁명[6] 이후 그는 살다냐가 주도한 1837년 원수들의 반란[7]에 동조했다. 1838년에는 9월 혁명의 결과로 세템브르주의가 강화되고 새 헌법(1838년 헌법)이 전반에 요구되며, 국가평의회 의원으로써 새 헌법에 맹세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대령 계급과 군 복무 자체를 모두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의 뿌리 깊은 카르타파 성향에도 불구하고,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1840년 12월 카르타파가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자 그는 다시 군에 복귀했다. 개인의 결단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스페인 침공 가능성이 고조되던 국면이었고, 그는 결국 조국을 다시 지키기 위해 1838년 헌법에 선서한 뒤 현역으로 돌아왔다. 복귀 즉시 그는 ‘관찰군(Exército de Observação)’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외교 관계 악화로 전쟁 가능성까지 거론되던 상황 속에서 국경 방면으로 파견되었다. 분쟁의 직접적 원인은 1835년에 체결된 도우루강 항행 조약[8]을 포르투갈이 이행하지 않은 문제였고, 당시 스페인 섭정이던 에스페르테로 장군은 이를 근거로 포르투갈 침공을 경고하고 있었다.
1842년 1월 27일, 안토니우 베르나르두 다 코스타 카브랄(후일 토마르 백작·후작)이 카르타 헌법의 부활을 선포하자 그는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섰다. 당시 자유파 내부를 수습하고 카르타파 장교들의 봉기 세력과 협상하기 위해 테르세이라 공작, 모우지뉴 드 알부케르키와 함께 일종의 3인조 지도체(트리운비라투)를 구성했고, 곧 테르세이라가 총리로 취임한 내각에서 해군·식민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재무부 장관직을 대행했다. 하지만 정국이 뒤집어지는 혼란기였고, ‘엔트루두 정부’라 불린 그 내각은 겉으론 테르세이라가 총리였지만 실권은 코스타 카브랄에게 있었다. 이런 와중에 로우레이루의 참여는 매우 짧았고, 1842년 2월 9일 취임한 뒤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은 2월 20일자로 내각을 떠났다.
그는 이후 카르타파 내부 야당, 이른바 반(反)카브랄 진영으로 이동했고, 1844년 토르즈 노바스 반란 이후에는 모우지뉴 드 알부케르키, 라브라디오 백작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포르투갈과 함께 마리아 2세에게 테르세이라–카브랄 내각의 해임을 권고하는 의견서를 작성했다. 1846년 마리아 다 폰티 혁명으로 ‘카브랄 형제 정권’이 무너진 뒤 그는 다시 정부로 불려 들어가, 팔멜라 공작(당시 수사 홀스타인 가문)의 내각에서카르타파와 세템브르주의 세력을 절충하려는 시도 속에 해군·식민부 장관을 맡았고, 전쟁부 장관직도 잠시 대행했다. 해당 직책은 1846년 5월 26일부터 7월 19일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그의 군 경력도 꾸준히 상승했다. 1845년에 소장(Brigadeiro) 계급을 받았고, 1851년 4월 살다냐의 쿠데타성 발언(프로나운시아멘투)을 앞두고 며칠 전 중장으로 진급했다.
2.3. 말년의 정치이력
1851년 그는 신설될 총회(Cortes Gerais)[9] 준비를 맡은 위원회에 참여했고, 이후 ‘역사당(Partido Histórico)’[10]에 합류했다. 다시 정부 일원으로 불려 들어온 그는 1856년 6월 6일 구성된 롤렐 후작·룰레 공작 내각에서 전쟁부 장관을 맡았고, 동시에 재무부 장관직을 대행했다. 다만 장관으로서의 임기는 1857년 1월 23일까지로 비교적 짧았다. 그의 재무 장관 대행 시기에는 포르투갈 국채 보유자들이 각 지구 재무국에서 이자 대리 수령 및 등기(averbamento)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치가 처음 도입되었고, 이는 그의 마지막 행정부 재직 기록으로 남았다.
2.4. 여생
1855년 파리에서 열린 농업·산업 만국박람회(Exposição Universal de Agricultura e Indústria)에 포르투갈이 참가 초청을 받았을 때, 그는 명예 국무장관 자격으로 구성된 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해당 위원회는 여러 정치인, 국무회의 고문, 산업계 인사들로 꾸려졌으며, 의장은 피칼류 백작이자 후일 피칼류 후작인 안토니우 조제 드 멜루 브레이너 텔리스 다 바가 맡았다.1855년 그는 대장으로 진급했고, 곧바로 페드루 5세가 본인의 근위(부관) 장군으로 지명하면서 왕실 측근으로 들어갔다. 이어 1857년 10월에는 정식 국무고문(Conselheiro de Estado)으로 임명되었고, 1859년 9월에는 전쟁부 산하 자문위원회 위원으로도 참여했다. 1860년 5월 초 테르세이라 공작이 사망하자, 그는 국왕 페드루 5세의 수석 부관(Primeiro Ajudante-de-Campo) 자리로 지명되었으나, 이 직책을 오래 수행하지 못했다. 임명 직후 불과 며칠 만인 1860년 6월 1일, 그 역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1]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을 점령하면서 촉발된 사건이다. 왕실은 브라질로 망명했고, 포르투갈 전역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봉기와 저항 운동이 확산되었다.[2] 나폴레옹이 포르투갈 침공을 맡긴 프랑스군 지휘관으로, 1807~1808년 포르투갈 점령을 주도했다. 폭압적 통치와 무리한 징발로 민심을 잃었고, 결국 전역에서 저항 봉기가 터지며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3] 자유군이 북부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전투다.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유파가 방어에 성공해 포르투 공방전 초기 국면을 버티는 발판이 되었다.[4] 1834년 5월 16일 벌어진 자유파와 미겔파의 사실상 최종 결전으로, 자유군의 승리로 미겔 체제가 붕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 이후 미겔 1세는 항복하고 추방되었으며, 포르투갈 내전은 종결 단계에 들어갔다.[5] 카르타 헌법파는 1826년 페드루 4세가 반포한 ‘헌장(Carta Constitucional)’을 정통 헌정 질서로 인정한 자유주의 계열로, 의회주의와 제한적 왕권을 조화시키려는 온건파에 가까웠다. 급진 자유주의자들과 절대왕당파 사이에서 중도 입장을 취했으며, 내전 이후 초기 입헌 체제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6] 1836년 9월혁명은 포르투갈에서 온건 카르타파 정부를 무너뜨리고 급진 자유주의 세력(세템브르주의자)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군과 민중이 결합한 봉기로 헌정 질서가 크게 재편되었고, 1838년 헌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정치 변동의 출발점이 되었다.[7] 카르타파 성향의 장교들이 중심이었으며, 세템브르주의 정권을 흔들려 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8] 도우루강 항행 조약은 도우루강을 국경·내륙 통로로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합의한 규범이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 도우루강을 양국 상선이 자유롭게 왕복 항행할 권리를 보장한다. - 강 양안의 항로 관리, 수심 확보, 수문·다리 등 장애물 제거를 공동 책임으로 둔다. - 통행세·항만료 등 비용 체계를 통일해 상업 흐름을 막지 않도록 규정한다. - 분쟁 발생 시 양국 정부가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해결하도록 명시한다.[9] Cortes Gerais는 포르투갈 입헌군주제 시기의 양원제 의회로, 왕권을 견제하고 법률·예산을 심의하던 국가 최고 입법기관이다. 귀족원과 대의원원으로 구성되며, 19세기 내내 정권 교체와 개헌 논쟁의 핵심 무대가 되었다.[10] 1850년대 포르투갈 자유주의 정치에서 형성된 중도·온건 자유파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