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계임(季任), 호는 송강(松岡). 조선(趙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수견(趙壽堅)이고, 아버지는 조방좌(趙邦佐)이며, 어머니는 신형(申泂)의 딸이다.2. 생애
조사수(趙士秀)는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교리·보덕 등을 역임하고, 1539년(중종 34)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성주사고의 화재원인을 조사하기도 하였다.그 뒤 제주목사·이조참판 등을 거쳐, 대사성·대사간·대사헌·경상도관찰사 등의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다시 이조·호조·형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지중추부사·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1. 청백리
관직생활 내내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중종 때도 청렴하다고 평가받았지만 명종 1년(1546년)에는 아예 직접 왕에게 인정받은 국가 공인 청백리. 심지어 조사수는 이 사실을 알고 "제가 먼저 요구야 안 했지만 누가 주면 먹긴 했습니다, 청백리라고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청하기까지 했다.워낙에 청백리로 유명하다 보니 다양한 일화가 전한다.
- (실록) 조사수가 북경에 갔을 때,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돈 욕심을 냈건만 조사수는 받아도 아무 말 나오지 않는 물건조차 받지 않았다. 북경에서 가져온 물건이라곤 습증이 생겨 변소를 들락거리기도 어려워지자 사들인 백철 요강뿐. 그마저도 조선으로 들어올 때 압록강에 던져버렸다. 명나라에서도 조사수가 청렴한 것을 알고 예부 낭관이 문병을 왔다.
- (실록) 조사수가 제주 목사로 나갔을 때, 일반적으로 외직이 한직으로 취급받는 시대라 사람들은 "조사수는 깨끗한데 왜 나가지?"라고 의아해했다. 그리고 조사수는 여기서도 청렴하게 임지를 다스렸으며, 또 제주도의 군사 문제를 분석하고 상소를 올려 중종을 감동시켰다.
- (연려실기술) 중종이 청백리를 뽑는 공개행사를 벌이고 청문(淸門), 예문(例門), 탁문(濁門)이라는 세 문을 세웠다. 그리고 대소신료들에게 "자기가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청문, 더럽다고 생각하면 탁문, 이도 저도 아니면 예문으로 들어가라"라고 말했다. 신료들은 청문으로 들어가자니 양심과 보는 눈이 껄끄럽고, 그렇다고 탁문으로 들어가서 본인을 탐관오리라고 홍보할 수도 없으니 하나같이 예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사수는 혼자 당당하게 청문을 통과했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 (실록) 진복창이 위세를 떨치던 시절, 조사수는 출퇴근길에 진복창의 집을 지나가면서도 단 한 번도 인사하러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진복창은 앙심을 품고 조사수를 중상하려 했으나 결국 하지 못했다[1].
- (?) 경연 중에 "백성들이 국법을 어기고 큰 집에 사는 문제"가 화제로 나오자, 조사수는 "영의정 심연원은 첩의 집을 호화롭게 지었습니다. 영의정이 법을 어기는 탓에 백성들이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영의정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뜨끔한 심연원은 본인의 실책을 인정했으며, 나중에 조사수를 판서 자리에 천거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좀 나빠졌는지, 생 후반기에는 실록에서 고집이 세고 사리에 어두우며 도량이 좁고 능력은 좀 부족했다는 평가도 곧잘 나온다. 조사수가 이조판서를 지낼 때 인척을 추천했다고 탄핵을 받은 적 있는데, 이 기사에 사관은 "인사가 치우치긴 했지만 조사수가 얼마나 청렴한데 일부러 그랬겠는가, 그냥 성격이 꽉 막히고 일을 못해서 그런 거다"(...)[2]라고 평가했다.
[1] 진복창이 자기 집 앞을 지나가면서 들르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적으라고 지시하자 조사수는 아예 다른 길로 출퇴근했다고 전한다.[2] "사신은 논한다. 조사수는 성질이 편협하기 때문에 정사하는 즈음에 사사로움을 따라 스스로의 뜻대로 하는 폐단이 있음을 면치 못하여 사람을 기용하는 데 잘못을 저질렀으니 대간이 그것을 논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조사수는 청렴한 사람이다. 비록 치우치게 기용한 잘못은 있지만 어찌 남의 장획(臧獲)이나 재물을 받고서 임명하는 권한을 마음대로 하였겠는가. (후략)" (명종실록 1555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