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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2-03 15:14:54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멜피 공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Giovanni Andrea Doria, Principe di Melfi
파일:Giovanniandrea_doria.jpg
성명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Giovanni Andrea Doria
출생 1539년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사망 1606년 (향년 66~67세)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아버지 잔네티노 도리아
어머니 진네타 센투리오네
배우자 제노비아 델 카레토 도리아
자녀 비토리아, 안드레아, 조반니, 아르테미시아, 카를로
직위 멜피 공, 투르시 후작,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제노바 및 스페인 해군 제독.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제노바 공화국의 제독.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으며,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 편에 서서 잉글랜드 해군과 맞섰다.

2. 생애

1539년경 제노바 공화국의 수도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잔네티노 도리아는 제노바 공화국의 해군 제독으로, 삼촌인 안드레아 도리아의 부관으로서 오스만 제국과의 해상 전투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특히 1540년 여름 지롤라타 해전에서 투르구드 알리가 이끄는 해적선 11척 중 9척과 투르구드 본인을 포획해 제노바로 끌고 갔고, 기독교 포로 2천 명을 구출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어머니 진네타 센투리오네는 제노바리옹 사이의 비단 무역업자이자 저명한 은행가, 대사였으며, 안드레아 도리아의 정치 파트너였던 아다모 센투리오네의 딸이다.

조반니가 8살 때인 1547년 1월 2일, 제노바 공화국을 좌지우지하고 카를 5세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교류하면서 막대한 부를 누리는 도리아 가문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조반니 루이지 피에스키 등이 주도한 피에스키 음모로, 아버지 잔네티노 도리아가 살해당했다. 총애하던 조카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안드레아 도리아는 조카의 아들인 조반니를 자기 집으로 거뒀고, 도리아 가문의 갤리선 지휘관으로 발탁했다. 조반니는 1555년 제노바 함대의 제독이 되었다.

1551~1559년 이탈리아 전쟁 동안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이끄는 스페인군을 수송하는 데 힘을 보탠 조반니는 전쟁이 끝난 후 튀니스 정복을 단행하기 위해 결성된 신성 동맹의 연합 기독교 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안드레아 도리아의 조언과 지원이 있었음에도, 아직 미숙했던 조반니는 함장들과 호흡이 잘 맞지 않은 데다 병까지 앓으면서 제대로 된 지휘를 받지 못했고, 결국 1560년 제르바 전투에서 피알레 파샤의 지휘를 받은 오스만 제국 함대에 참패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90대의 고령이었던 안드레아 도리아는 패전 며칠 후에 사망했는데, 일각에서는 패전 소식을 듣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수치심으로 건강을 해쳐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안드레아 도리아가 죽어버렸고, 실패로 인해 엘리트층의 총애를 잃은 조반니는 제노바 함대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뒤 궁정에서 다시 경력을 쌓는 한편 상업에 집중했다. 그러던 1564년 스페인의 벨레스 데 라 고메라 요새 공략전에 참여했고, 이듬해에는 몰타 공방전에 참여했다. 6년 후인 1571년,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루이스 데 레케상스,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을 연합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면서 제노바 공화국에 압력을 가해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협조했던 도리아 가문의 후계자인 조반니를 제노바 함대 사령관으로 세워서 원정에 동행하게 했다.

조반니는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제노바로 돌아겠다며 시칠리아로 뱃머리를 돌리려 들어서 교황 특사 마르코 안토니오 콜론나와 번번이 마찰을 벌였고, 레판토 해전 도중에 전선에 틈이 생기는 걸 허용했다가 울루지 알리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이 틈을 파고드는 바람에 연합 함대가 위험에 빠지는 순간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알바로 데 바잔이 제때 함대를 투입해 울루지 알리를 격파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기독교 연합 함대는 이 전투에서 오스만 해군을 섬멸했다. 나중에 교황청은 조반니를 친척인 안토니오 도리아로 교체하도록 했는데, 그는 이때부터 안토니오와 심각한 불화를 벌였다.

1575년, 제노바의 파벌주의를 대표하는 조반니와 안토니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진 끝에, 조반니가 제노바 공화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조반니는 나폴리로 가서 친프랑스 파벌이 제노바를 장악했으니 제노바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는 이에 호응해 그와 함께 제노바를 침공할 함대를 준비했다. 하지만 제노바와 스페인 당국 간의 화해가 성립되면서, 침공 작전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1582년 스페인 해군 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영국-스페인 전쟁이 벌어지자, 스페인 해군 사령관을 맡아 전쟁에 관여했다.

1591년 4월, 조반니는 휘하 함대 12척 중 5척을 이끌고 카르타헤나로 항해해 카르타헤나로 가서 스페인 대사를 실은 뒤 로마로 데려가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본국으로 귀환하던 이들은 4월 24일 지브롤터 해협에서 바람이 고요해진 가운데 잉글랜드 상선들이 지브롤터 해협 입구에 가만히 있는 걸 발견하고 그들을 향해 접근했다. 잉글랜드 기함 '센추리온 호'가 적 갤리선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지만, 스페인 갤리선들은 이를 무릅쓰고 센추리온호에 바짝 다가간 뒤 갈고리로 센추리온호를 단단히 고정했다. 센추리온 선원들은 갈고리를 도끼로 찍어서 없애고, 스페인 함선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포격을 계속 퍼부었다. 여기에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했지만, 센추리온 선원들이 큰 피해 없이 모조리 진화했다.

스페인 함선들은 센추리온 호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고, 그들이 쏜 대포 하나가 주 돛대를 관통하기까지 했지만, 적의 저항이 너무 거세서 피해가 커지자, 갈고리를 풀고 후퇴했다. 한편, 센추리온 호보다 더 작고 무장이 덜한 '돌핀' 호는 갤리선 중 하나와 교전한 끝에 적의 총격이나 창고에 보관했던 화약이 터지는 바람에 결국 폭발했고, 돌핀호 선장 존 자일스를 포함한 모든 선원이 전사했다.

전투는 5시간 동안 이어지다가, 잉글랜드군과 스페인군 모두 후퇴했고, 스페인군은 전투를 재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 2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많은 수가 익사했다. 센추리온 호는 함선이 많이 파괴되었고, 4명이 전사하고 10명이 크게 다쳤다. 다음 날 다른 6척의 스페인 갤리선 부대와 합류해 센추리온호를 감시했지만,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고 잉글랜드 상선들이 빠져나가는 걸 허용했다. 이리하여 센추리온 호와 다른 선박들은 더 이상 스페인 해군의 훼방을 받지 않고 런던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1594년 지중해에서 별다른 해전을 벌이지 못해 공적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한 조반니는 1594년 제대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1598년 펠리페 2세가 사망하고 새 국왕 펠리페 3세가 등극한 후에도 스페인 궁정에서 계속 활동했다. 1600년 제노바에서 친프랑스파 인사 고프레도 로멜리니를 추방하는 데 한몫했고, 1601년 레르마 공작 프란시스코 데 산도발 이 로하스의 후원 아래 바르바리 해적의 중심지인 알제를 공략하려는 원정을 준비했다. 그는 갤리선 70척과 병사 10,000명을 지휘했지만, 함대가 폭풍을 만나 항구로 돌아와야 했기에 물러나야 했다. 1606년경 제노바에서 지병이 악화하여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