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 Álvaro de Bazán y Guzmán, I marqués de Santa Cruz | |
| | |
| 성명 |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 Álvaro de Bazán y Guzmán |
| 출생 | 1526년 12월 12일 |
| 스페인 제국 그라나다 | |
| 사망 | 1588년 2월 9일 |
| 스페인 제국 리스본 | |
| 아버지 | 알바로 데 바잔 이 솔리스 |
| 어머니 | 아나 데 구즈만 |
| 형제 | 후안, 마리아, 알론소, 브리안다, 이사벨 |
| 배우자 | 후아나 데 수니가 (1550년 결혼 / 1568년 이전 사망) |
| 마리아 마누엘 데 베나비데스 (1568년 결혼) | |
| 자녀 | 알바로 데 바잔 이 베나비데스 |
| 직위 |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 스페인 2계급 대공, 엘비소 시의 초대 영주 겸 후작, 발데페냐스 시 초대 영주, 스페인 대제독, 스페인 코르테스 의원, 포르투갈 왕국의 육군 및 해군 사령관. |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후작, 군인. 스페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사령관으로 손꼽히는 인물로, 이베리아 갤리온을 강력한 군함으로 개량하고, 상륙 작전의 발전을 꾀했으며, 본인이 직접 설계한 여러 선박의 개발을 이끌었다. 이를 통해 스페인 제국의 수많은 군사적 성공과 해상 운송을 이뤄냈다. 거의 50년에 걸친 경력 동안 프랑스 왕국, 오스만 제국, 바르바리 해적, 잉글랜드 왕국과 맞섰으며, 그의 지휘를 받은 스페인 해군은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건설한 산타크루스 후작 궁전은 현재 스페인 해군 총기록보관소로 사용되고 있다.2. 생애
2.1. 가문의 기원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은 제5대 비스케이 영주인 로페 이니게스의 형제인 이니고 로페스의 후손으로, 나바라 왕국 혈통이다. 전승에 따르면, 바잔 가문의 문장은 체스판이었는데, 이는 바잔이 전투 전에 언제나 체스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체스판을 둘러싼 8개의 성 안드레아 십자가는 훗날 산타크루스 후작의 문장에 추가되었다.14세기 초, 후안 곤잘레스 데 바잔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에 정착하여 엔리케 2세에 의해 수석 내각관으로 선임되었고, 발라돌리드 땅에 있는 여러 마을을 받았다. 그 후 바잔 가문은 카스티야 국왕들을 계속 섬겼고, 15세기 말에는 카스티야에서 가장 저명한 귀족 집안 중 하나가 되었다. 알바로의 조부인 알바로 데 바잔은 이사벨 1세를 섬겼고, 그라나다 토후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원정에 대장을 맡아 1487년 피냐나 마을을 정복했다. 그 후 피냐나는 바잔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또한 카스트로베르데의 엔코미 엔다의 집사 직책도 받았다.
아버지 알바로 데 바잔 이 솔리스는 탁월한 선장이었다. 그는 1520~1522년 카를로스 1세의 통치를 반대하는 코무네로스 반란이 발발했을 때 자비로 군대를 모집한 뒤 카를로스 1세를 위해 반란에 맞서 싸워 토벌에 이바지했다. 1526년 후안 데 벨라스코를 대신해 스페인 갤리선 사령관이 되었고, 틀레메센 점령전과 카를로스 1세의 튀니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대서양 사령관을 맡아 무로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했다.
2.2. 초년기
알바로는 1526년 12월 12일 그라나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바로 데 바잔 이 솔리스는 같은 해 스페인 갤리선 사령관에 선임되어 그라나다에 주둔했고, 어머니 아나 데 구즈만은 테바 백작과 아르달레스 후작 가문의 직계 후손이었다. 아버지 알바로 데 바잔은 아들이 귀족 가문에 걸맞은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세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산티아고 훈장을 수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국왕은 1529년 톨레도에서 발표한 특별 칙령을 통해 이 요청을 승인했다.1535년 3월 마드리드에서 발표된 또 다른 칙령은 알바로를 불과 8살의 나이에 지브롤터 성의 관리인으로 선임했다. 카를로스 1세는 이 임명을 통해 어린 알바로가 가족의 공적을 기리고, 아버지를 본받아 자신을 섬기려는 열망을 키우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9살 때, 그는 아버지의 기함 갑판을 뛰어다니며 항해의 요령을 익혔다. 그 덕분에, 그는 어린 나이부터 해양 환경에 익숙했다.
알바로의 스승은 페드로 곤살레스 데 시민카스였는데, 그는 알바로에게 매우 철저한 인문 교육을 제공했고, 그가 시인과 인문주의 학자들을 높이 평가하게 했다. 알바로는 성장한 후에도 시인과 인문주의자들을 보호하고 후원했다. 1538년, 알바로는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원정에 나섰다. 여정의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아버지와 함께하면서 항해술에 대한 경험과 실무를 쌓았다. 17세에 아버지와 함께 산탄데르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스페인 북부의 해상 전투와 다양한 유형의 선박에 관해 배웠다.
1544년, 그는 아버지의 대표적인 승리인 무로스 해전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적병 3,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데 성공한 뒤, 아버지는 그에게 함대 지휘권을 주었고, 그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가서 승리를 안겨준 하느님에게 감사 기도를 드린 뒤 발라돌리드로 가서 펠리페 왕자에게 승리를 알렸다. 이후 카를로스 1세의 통치 기간에 스페인 남부 해안을 지키고 인도 선박들의 도착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독립 해군의 지휘권을 맡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사략선과 바르바리 해적에 대적했다.
1550년 3월 19일, 24세의 나이에 미란다 델 카스타냐르 백작의 딸 후아나 데 수니가와 결혼해 딸 4명을 두었다. 1568년 이전에 아내가 사망한 뒤, 1568년 4월 26일 산티스테반 델 푸에르토의 성 에스테반 교구에서 제5대 산티스테반 델 푸에르토 백작 프란시스코 데 베나비데스의 딸 마리아 마누엘 데 베나비데스와 결혼하여 세 딸과 제2대 산타크루스 후작이 될 알바로 데 바잔 이 베나비데스를 낳았다. 1554년 불과 28세의 나이에 해군 대장에 선임되었으며, 1556년 아게르 곶에서 페스로 무기와 탄약을 운반하던 잉글랜드 선박 2척을 나포했다.
2.3. 지중해에서의 활동
1560년 5월, 스페인 해군은 튀니지 제르바 섬 인근에서 벌어진 제르바 해전에서 피알리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 해군에게 참패해 절반가량을 상실했다. 알바로는 이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고, 1563년 오스만 제국에 가담한 베르베르인에게 포위된 오랑과 마살키비르의 수비대를 지원해 도시가 베르베르인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걸 막았다. 그해 7월 23일, 알바로는 산초 데 레이바가 지휘하는 50척의 갤리선 함대에 가담해 바르바리 해적의 안식처가 된 바디스와 벨레스 데 라 고메라 섬을 공략하고자 말라가에서 출발했다. 함대는 섬 근처 해안에 다소 무질서하게 상륙했고, 산초는 몇 차례의 접전 끝에 후퇴를 명령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거의 모든 장교가 후안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알바로만은 진지를 포기하는 것은 왕의 명령에 어긋나고, 바르바리와 튀르크 해적이 기세등등해질 거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산초는 그의 의견을 듣지 않고 말라가로 돌아갔다.그 후 해적들이 스페인 해안을 연달아 습격해 큰 피해를 안기자, 펠리페 2세는 벨레스 데 라 고메라를 반드시 공략하기로 했다. 1564년,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오소리오의 지휘 아래 100척의 함대가 구성되었고, 알바로는 가르시아의 부관이 되었다. 함대는 1564년 8월 29일 말라가에서 출항했고, 이후의 원정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어 9월 6일 스페인 군대의 사상자가 거의 없는 전투를 통해 벨레스 데 라 고메라 섬 전역을 장악했다.
1565년 5월 18일~9월 11일, 오스만 제국군이 몰타 기사단이 주둔한 몰타를 공격했지만, 기사단의 맹렬한 저항으로 공략에 애를 먹었다. 그는 강대한 오스만 제국에게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지원하지 않기로 했던 신하 대부분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타 기사단을 돕기로 하고,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의 지휘하에 몰타 성채를 지원하고 오스만 제국군을 패퇴하는 데 일조했다. 1566년 나폴리 갤리선 대장에 선임되었고, 1569년 10월 19일 펠리페 2세로부터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에 선임되었다. 그 후 그는 나폴리 갤리선 대장으로서 이탈리아 해안을 순찰해 바르바리 해적의 급습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2.4. 레판토 해전
1571년 5월 25일, 로마에서 신성 동맹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페인 제국,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의 연합이 성립되었다. 신성 동맹의 목표는 오스만 제국 함대를 섬멸하고 튀니스, 알제, 트리폴리를 타격하기로 했다. 교황 특사 마르코 안토니오 콜론나, 베네치아의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로, 스페인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3대 사령관으로 선임되었으며, 신성 동맹의 최고 군사 지휘권은 돈 후안 데 아우스스티라가 맡았다. 신성 동맹이 모은 함대는 갤리선 207척, 갈레아스선 6척, 경선 76척으로 구성되었다. 알바로는 1571년 9월 5일 나폴리 편대 갤리선 30척을 이끌고 신성 동맹에 합류했다.그 후 알바로는 후안의 신임받는 조언자 중 한 명이 되었고, 동맹국들 사이에 마찰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니 뜸을 들이다가 연합군이 와해하는 사태를 초래하지 말고 지체없이 적과 전투를 벌이라고 조언했다. 후안은 전투 계획에서 알바로에게 기독교 함대가 가장 심각한 위험에 처한 전선을 지원하는 후위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그는 이 임무를 위해 30척의 갤리선과 여러 척의 소형 함선을 배정받았다.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해전이 벌어졌을 때, 알바로의 함대는 최전선에서 반 마일 떨어졌다. 그는 이른 아침 출발한 뒤 파트라스만 밖 15마일 지점에서 함대를 편성했다. 전투가 벌어진 후, 신성 동맹군 좌익을 맡았던 아고스티노 바르바라고가 전열을 이탈하여 적에게 달려들면서, 적군이 기독교 함대를 측면에서 위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에 무함마드 시로코가 지휘하는 오스만 함대가 바르바리고를 포위하려 하자, 알바로는 마르틴 데 파디야 이 만리케가 지휘하는 갤리선 10척을 파견해 적을 막아내게 해, 아군 함대가 측면을 찔려 와해할 위기를 모면했다.
전투가 한창일 때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기함인 갤리선 라 레알호가 알리 파샤의 기함 라 술타나호를 향해 돌진했고, 두 배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마르코 안토니오 콜론나는 후안의 배를 지원하며 라 술타나호의 뒤에 자리를 잡아 지원군을 차단했다. 알바로는 후안을 돕기 위해 갤리선 10척과 프리깃함, 브리그함 몇 척을 파견했다. 이러한 증원군 덕분에, 오스만 제국군의 중앙은 완전히 패주했다.
신성 동맹 우익의 상황은 이와 정반대였다.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는 전열에서 뒤처졌고, 울루지 알리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제노바 사령관의 후위를 우회하여 전장의 중앙으로 진격했다. 도리아는 이를 막으려고 추격했지만, 적 함대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울루자 알리는 몰타 기사단 소속 갤리선 여러 척을 공격해 기함을 점령하고, 기사단장을 포로로 잡히는 등 막대한 피해를 안겼지만, 알바로가 후방에 남은 갤리선 10척을 총동원해 상황을 수습하고 기사단장을 구출했으며, 울루자 알리를 몰아냈다. 이렇듯 알바로는 레판토 해전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후방에서 상황을 살피다가 3차례의 결정적인 순간에 적절한 함대를 파견해 적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레판토 해전 이후, 알바로는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이끄는 튀니스 공세에 참여하여 그곳을 장악하는 데 공헌했다. 1578년 12월, 그는 스페인 갤리선의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2.5. 포르투갈 원정
1578년,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 1세가 모로코의 사드 왕조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가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참패하고 종적을 감췄다. 그 후 왕위는 전대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유일한 생존자인 포르투갈 추기경 엔히크 1세가 환속하여 물려받았다. 1580년 엔히크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포르투갈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이를 이베리아반도 국가들의 통일을 완성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자신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이자벨이 마누엘 1세의 딸이라는 걸 근거로 삼아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했다.마누엘 1세의 3남인 베자 공작 루이스의 사생아 안토니우는 이에 맞서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했고,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의 섭정이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도 스페인 제국이 너무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국왕이 되는 걸 반대했다. 포르투갈 상인, 금융 부르주아, 포르투갈 귀족,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은 펠리페 2세를 지지했지만, 일반 서민과 하급 성직자들은 안토니우를 지지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국왕 등극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제3대 알바 데 토르메스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육군을 맡겨 포르투갈로 진군하게 했고, 알바로에게 해군을 맡겨 타구스강 어귀로 침투하게 했다. 안토니우는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해 오는 스페인군에 맞서 싸웠지만, 끝내 이길 수 없자 잉글랜드로 달아났다가 다시 프랑스로 피신했다. 그 후 펠리페 2세는 1581년 리스본에 입성한 뒤 토마르 의회에서 포르투갈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이제 테르세이라 섬을 비롯한 아소르스 제도를 제외한 모든 포르투갈 영토는 펠리페 2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였다.
테르세이라 섬은 해적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었고, 대서양의 우세한 바람 동향으로 인해 인도양 항로를 항해하는 모든 스페인 선박과 동인도에서 귀환하는 포르투갈 선박이 들러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테르세이라 섬에 자금, 병력, 함선을 지원해 펠리페 2세에 계속 항전하도록 했다. 펠리페 2세는 테르세이라 섬 총독에게 자신의 주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총독은 안토니우가 강력한 함대와 병력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펠리페 2세는 인도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페드로 발데스에게 대형 함선 4척을 보냈지만, 페드로 발데스는 독단적으로 테르세이라 섬을 점령하려 했다가 1581년 살가 전투에서 패배했다.
2.5.1. 테르세이라 해전
1582년 6월 16일, 안토니우는 프랑스 함대에 잉글랜드,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온 소규모 함선들이 가담한 연합 함대에 몸을 싣고 상 미겔 섬과 산타 마리아 섬을 정복하고 스페인 함대를 포획하기 위해 벨 아일 섬을 출발했다. 안토니우는 테르세이라 섬에 무사히 도착한 뒤 그곳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한편, 프랑스 선두 함선 9척이 아소르스 제도에서 스페인에 유일하게 충성을 맹세한 상 미겔 섬을 1582년 5월에 급습했지만, 그곳을 지키던 포르투갈 출신 제독 페드로 페이소토 다 실바에게 격퇴되었다.이 소식을 접한 펠리페 2세는 아소르스 제도를 완벽하게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로 마음먹고, 산타크루스 후작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리스본에 함대를 집결하게 했다. 산타크루스 후작은 왕의 지시에 따라 함대를 집결하던 중, 랑스에서 아소르스 제도로 향하는 연합 함대가 출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펠리페 2세로부터 즉시 리스본에서 출발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7월 10일에 1,200톤급 갤리온 산 마르틴 호에 스페인 깃발을 꽂고 출항했다.
7월 21일, 산타크루스 후작은 함선 27척과 예정된 병력의 절반만을 이끌고 상 미겔 섬에 도착했다. 그는 파타체 2척을 폰타 데갈다에 있던 총독에게 보내 자신이 도착했다는 걸 알리고 페드로 페이소토 다 실바 제독에게 자기 함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으며, 22일에는 비야 프랑카에 정박하여 식수를 조달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스페인 해군을 적대적으로 대했고, 스페인 병사가 탑승한 작은 배들은 아르케부스의 총격을 받았다. 여기에 캐러벨 한 척이 도착한 뒤 산타크루스 후작에게 "다른 캐러벨 2척과 함께 리스본에서 출발했으나 그들은 프랑스 해군에게 나포되었고, 우리만 탈출해 성공했다."라고 보고했다. 여기에 폰타 델가다로 파견되었던 두 파타체 중 한 척이 프랑스 해군에게 나포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에 산타크루스 후작은 이들과 즉시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고, 전 함대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
7월 22일 오후, 산타크루스 후작은 섬 반대편에 있던 60개가 넘는 적 돛대를 발견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양측 함대 모두 움직이지 못하다가, 저녁에 바람이 불자 스페인 함대는 바다 쪽으로, 프랑스 함대는 육지 쪽으로 향했다. 자정 무렵, 현지 총독이 보낸 피나스가 산타크루스 후작에게 총독의 메시지를 전했다. 총독은 프랑스군이 7월 15일 3,000 병력을 섬에 상륙한 뒤 라구나 마을을 약탈하고 폰타 델가다를 점령했지만,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또한 페이소토 제독은 출항하지 않고 섬으로 피신했으며, 기푸스코아 함선들이 나포되었고 카라벨 2척과 갤리온 2척이 암초에 좌초되었고 500명에 달하는 선원들이 성으로 피신해 농성을 함께하고 있다고 전했다.
7월 23일 새벽, 바람을 등지고 있던 프랑스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급습해 전열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프랑스 함대는 오전 중에도 두 번 더 시도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대포 세례에 직면하자 공세를 중단했고, 오후가 되자 바람이 다시 약해져서 두 함대 모두 정지 상태에 빠졌다. 7월 24일 새벽, 상황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오후 4시, 프랑스군은 3열로 나뉘어 기푸스 코아에서 미겔 데 오켄도가 지휘하는 함선 4척을 파견해 적 후위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산타크루스 후작의 신속한 대형 정리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프랑스 함대는 피해를 본 후 후퇴했지만 바람을 등진 전열을 그대로 유지했다.
7월 24일 밤, 산타크루스 후작은 달이 지자마자 배를 돌려 바람을 타고 항해하라고 명령했다. 7월 25일 아침, 산타크루스 후작은 프랑스군에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위치를 잡았고, 프랑스 함대는 전날 오후 전투 피해를 복구하느라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오전 9시 부사령관인 크리스토발 데 에라소가 지휘하는 함선의 돛대가 불어져 도움을 요청하자, 산타크루스 후작은 그 배를 예인하는 데 힘써야 했고, 그사이에 공격할 기회가 사라졌다.
7월 26일, 두 함대는 상 미겔 섬에서 18마일 떨어진 곳에 나타났고, 프랑스 함대는 바람을 등진 채 육지 쪽에 배치했다. 그들은 계속 밀착 항해를 했고, 아무런 전투도 특별히 벌이지 않은 듯했다. 정오가 지난 직후, 로페 데 피게로아 제독이 지휘하는 갤리언 산 마테오가 바람을 타고 전선에서 멀어지자, 프랑스 진영은 스페인 주력 함대로부터 산 마테오를 고립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기함, 부기함, 그리고 다른 3척의 갤리온이 산 마테오로 나아갔다. 피게로아는 도망치지 않고 그들과 대적하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해전에서, 기함과 부기함의 선원들은 산 마테오 좌현과 우현에서 등선을 시도했고, 다른 3개 갤리온은 선수와 선미에서 산 마테오 호를 향해 사격했다. 기함과 부기함이 등선하기 위해 매우 가까이 접근했을 때, 피게로아 제독이 명령을 내리자 스페인 포병들이 일제 포격을 가해 프랑스 함선들에 큰 타격을 입혔다. 여기에 저격수를 선두에 배치해 프랑스 갑판에 이는 적군을 사살하게 했다.
산타크루스 후작은 견인 줄을 푼 뒤 산 마테오를 지원하기 위해 출진했고, 후위대도 그를 따라갔다. 가라가르자 선장의 함선 후아나는 갤리온선 옆에 있던 프랑스 기함에 달라붙었고, 빌라비오사 호는 적 부기함에 달라붙었다. 이에 프랑스 함선들이 도착해서 부기함에 배를 묶어 함대를 형성하고, 등선을 시도한 스페인군과 악착같이 맞섰다. 미겔 데 오켄도 제독은 산 마테오 호와 프랑스 부기함 사이를 전속력으로 항해하며, 중간에 끼인 부기함에 포격을 가했다. 오켄도는 이 기동으로 계류 줄을 끊고, 프랑스 부기함의 측면을 노출했다. 이후 스페인 함선들이 주도권을 확고히 잡았고, 프랑스 기함과 부기함이 전투 개시 한 시간 만에 항복했다. 이에 프랑스 함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고, 다른 연합 함대 역시 따라갔다. 스페인 함대는 도망치는 함대를 추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테르세이라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스페인 함대는 비야 프랑카에 정박하여 부상자와 포로를 내리고 배를 수리했다. 당시 스페인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평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산타크루스 후작은 포로들을 해적으로 간주하고 재판에 기소했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해적이 아니라 프랑스 국왕의 공문을 소지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산타크루스 후작은 그 문서를 위조문서라고 일축했다.
이후 산타크루스 후작은 포로로 잡힌 17세 이상의 남자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일부 스페인 대장과 병사들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원했지만, 산타크루스 후작은 그들이 스페인군을 해적질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프랑스 국왕 역시 자국민이 스페인인들을 해적질하는 걸 용납하지 않을 거라며 거부했다. 결국 8월 1일, 비야 프랑카에서 영주 28명과 기사 52명이 참수되었고, 17세 이상의 군인과 선원들이 교수형에 처했다.
2.5.2. 스페인 제국의 아소르스 제도 정복
안토니우는 연합 함대가 격파된 뒤에도 테르세이라섬에서 프랑스군과 함께 버텼으며, 펠리페 2세의 해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아그라 요새 방어를 강화하고 동전을 주조했다. 이에 산타크루스 후작은 안토니우를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이 원정에는 병사 15,372명, 함선 98척이 동원되었는데, 여기에는 병력 수송선으로 개조된 대형 상선 31척, 소형 선박과 상륙정, 전투용 갤리온, 갤리선 12척, 갈레아스 2척이 포함되었다.스페인 함대의 목표는 적 함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육군을 테르세이라 섬에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필요하다면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지만, 주된 역할은 병력과 지원 장비 및 보급품을 선택된 해안 교두보에 배치한 뒤 군사적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지원하는 것이었다. 한편, 펠리페 2세는 산타크루스 후작에게 서신을 보내 테르세이라 섬에서 자신의 군대에 맞서 싸우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신민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안토니우를 추종하는 테르세이라인들은 스페인군이 앙그라와 페지아 항구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프랑스 사령관 샤를 드 보르도와 바트스타 스크리키가 이끄는 부대가 두 항구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산타크루스 후작은 앙그라에서 10마일 떨어진 해변인 몰레에 주력을 상륙하기로 했다. 몰레는 보병과 일부 포병대가 배치된 가벼운 토루만 배치되어 있었다.
1583년 7월 26일 이른 아침, 스페인 함대는 앙그라 인근의 칼헤타 다스 모스에 상륙했다. 상륙 날짜인 7월 26일은 산타크루스 후작이 테르세이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승리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오전 3시에 디에고 데 메드라노 대위가 이끄는 스페인 갤리선 12척이 병사 4,500명을 태운 상륙정을 견인하여 해변으로 향했고, 산타크루스 후작이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해변은 산타 카타리나 요새가 지키고 있었고, 프랑스 대위 부르기뇽과 프랑스 병사 50명, 포르투갈 2개 중대가 지키고 있었다. 스페인 함대를 포착한 부르기뇽은 산타 카타리나 요새에 배치된 대포로 포격을 시작했다. 산타크루스 후작의 기함은 선두를 달리다가 맹렬한 포격을 받고 조타수를 잃었다. 하지만 다른 갤리선 9척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그는 요새를 침묵시킬 수 있었다.
상륙정은 해변을 향하여 보병이 상륙하게 했다. 스페인군은 참호와 성벽에 배치된 아르케부스의 집중 사격을 받아 여러 명이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요새는 곧 사다리를 이용한 공격으로 점령되었고, 부르기뇽과 그의 부하 35명이 전사했다. 산타 카타리나 요새를 접수함으로써, 스페인군은 나머지 보병, 대포 6문, 보급품을 상륙시킬 수 있었고, 주변 고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그 후 산타크루스 후작은 장병들에게 빌라 다 프라이아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아이마르는 스페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에 맞기 위해 군대를 집결하고 대포 8문을 모았다.
산타크루스 후작은 행진하는 그의 군대 우익에 독일군, 좌익에 스페인군을 배치했으며, 3개 대열을 갖춘 채 빌라 다 프라이아에서 마주친 적군과 맞붙었다. 아이마르는 울타리와 방벽을 세워놓고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 맹렬한 반격을 개시해 스페인군 첫 번째 대열을 여러 차례 무너뜨렸다. 하지만 산타크루스 후작은 독일군 창병으로 전위 부대를 강화하고 위치를 사수하게 했다. 오후가 되자 마누엘 다 실바가 포르투갈 민병대 1,000명과 황소 떼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뒤 스패인 대대를 향해 돌격했다. 아이마르는 이에 고무되어 재차 총공격을 퍼부으려 했지만, 어둠이 곧 깔리자 취소했다. 16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스페인군은 전사 70명, 부상 300명을 기록했고, 포르투갈군은 전사 70명, 부상자 또는 포로 400명 이상을 기록했다.
7월 30일 아침, 테르세이라 섬 방위군 사령관을 맡은 아이마르 드 샤스트는 포르투갈 민병대가 산속으로 도망쳐 버린 걸 알게 되자 아연실색했다. 스페인군은 곧 주도권을 잡고 상 세바스티앙으로 진격했고, 아이마르는 프랑스군과 함께 노사 세뇨라 다 과달루페 산으로 후퇴해 산타크루스 후작이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앙그라를 접수하는 걸 허용했다. 앙그라 항구에서 프랑스 함선 13척, 포르투갈 함선 16척, 잉글랜드군 함선 2척이 스페인 갤리선에 나포되었으며, 감옥에 갇혀 있던 스페인군 30명과 펠리페 2세를 지지하던 포르투갈인 21명이 풀려났다.
프랑스군은 노사 세뇨라 다 과달루페 산의 경사면에 참호를 파는 작업을 실시했지만, 병사들이 더 이상 싸우기를 거부하고 독단적으로 스페인군과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아이마르는 이를 진압했지만, 포르투갈 민병대가 산타크루스 후작에게 항복했다는 걸 알게 되자 더 이상의 전투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산타크루스 후작과의 협상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이 1565년 몰타 공방전에 참여해 스페인 제독 페드로 데 파딜라를 섬겼던 적이 있기 때문에, 산타크루스 후작이 이 점을 고려하여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의 예상대로, 산타크루스 후작은 프랑스군만 무기를 소지한 채 떠나게 했다. 잉글랜드군과 이탈리아군도 협상에 따라 본국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포르투갈 반군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7월 30일, 페드로 데 톨레도 오소리오는 갤리선 12척, 파티체 4척, 피나스 16척. 병사 2,500명을 이끌고 앙그라에서 출항하여 프랑스와 잉글랜드 병사 400~500명이 섬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저항하고 있던 파이얄 섬을 접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톨레도는 적군과 협상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지만, 포르투갈 사령관 안토니우 게데스 드 소자가 사절을 살해했다. 이에 스페인군은 상륙한 뒤 무력으로 산타크루스 요새를 점령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군은 테르세이라 섬의 동포들과 동일한 항복 조건을 제시받았지만, 게데스 드 소자는 사절을 살해한 것에 대한 처벌로 손이 잘린 뒤 교수형에 처했다. 8월 8일, 포르투갈 주지사 마누엘 다 실바는 독일 연대 내 사형 집행인에 의해 앙그라에서 참수되었다. 한편, 안토니우는 8월 2일 테르세이라에서 프랑스로 도피했다.
아소르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테르세이라 섬이 정복되자, 아소르스 제도의 다른 섬들도 펠리페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은 펠리페 2세의 통치를 온전히 받게 되었다. 그 후 산타크루스 후작은 아소르스 제도의 행정 체계를 바로잡는 데 힘을 기울인 뒤 1585년 3월 2일 리스본으로 귀환한 후 대양해군의 대장과 포르투갈 육해군의 대장으로서 광범위한 권한을 누렸다.
2.6. 잉글랜드 침공 준비와 갑작스러운 사망
산타크루스 후작은 아직 아소르스 제도에 있었을 때 펠리페 2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하자고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그 후 1585년 4월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포르투갈이나 누에바에스파냐를 목표로 삼은 원정대를 준비 중이라는 첩보가 스페인에 전해지자, 산타크루스 후작은 2,000명 이상의 선원과 3,000명의 군인을 태운 함선 4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창설해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막자고 제안했다.1585년 8월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안트베르펜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네덜란드 공화국의 입지가 악화하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자국과 인접한 대서양 연안 전체가 스페인의 지배권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네덜란드 공화국과 논서치 조약을 체결하고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의 지휘하에 6,000 보병과 1,000 기병을 네덜란드에 파견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사실상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고 보고, 잉글랜드를 대규모 함대로 침략하기로 결심했다.
산타크루스 후작은 왕의 요청에 따라 1586년 1월 13일 잉글랜드 침공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는 아일랜드에 먼저 상륙한 뒤 그곳 주민들을 선동해 잉글랜드의 지배를 전복하도록 유도한 후, 해협을 건너서 잉글랜드 본토를 침공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원정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요구 조건은 엄청났다. 함선은 556척이 필요했고, 병사는 94,222명에 달했으며, 이 병사들이 8개월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이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줄 때 들어갈 비용은 15억 마라베디(Maravedí. 이베리아반도에서 주조된 동전의 명칭.)를 넘었는데, 이는 스페인이 보유한 자원과 부를 총동원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펠리페 2세는 산타크루스 후작의 계획이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구상했다. 얼마 후, 참모들은 스페인에서 수송 함대를 출항한 뒤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휘하의 스페인군을 실어서 잉글랜드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펠리페 2세는 이 계획이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고, 파르마 공작과 협의했다. 파르마 공작은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절대적인 비밀 유지, 네덜란드 지방의 안전한 점유와 방어, 그리고 프랑스가 평화 협정에 간섭하거나 프랑스 가톨릭 연맹과 위그노 사이에 분열이 조장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1586년 말,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처음에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기만 습격을 벌여서 잉글랜드 해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게 한 뒤, 주력 함대는 솔렌트에 안전한 정박지를 확보하기 위해 와이트 섬이나 사우샘프턴을 접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파르마 공작은 저지대 국가에서 동원한 병력을 수송 함대에 싣고 영국 해협을 건너서 잉글랜드의 수도인 런던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또한 사전에 밀정을 보내 잉글랜드 내 가톨릭 귀족과 사제들을 부추겨서 스페인군이 상륙했을 때 호응할 준비를 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산타크루스 후작은 스페인 해군 제독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명장이었기에, 대함대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함대를 조직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지만, 계획과는 달리 함대 모집에 차질이 여러 차례 생기면서 집결이 지연되었다. 여기에 잉글랜드 수석 고문이자 첩보 관리자인 프랜시스 월싱엄은 1587년 초 스페인 대함대가 쳐들어오려 한다는 걸 첩자들의 보고로 확인한 뒤 엘리자베스 1세에게 스페인 함대가 집결 중인 항구들을 잉글랜드 해군이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스페인의 군사적 준비를 검사하고, 보급품을 가로채고, 함대를 공격하고, 가능하다면 스페인 항구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은 함대 지휘권을 줬다.
1587년 4월 12일~7월 16일,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스페인 대함대가 집결한 카디스를 습격했다.(드레이크의 카디스 습격) 그 결과 식량, 식수, 장비를 실은 100척 이상의 선박이 파괴되었고, 사그레스 인근에서 식량과 식수를 담는 데 쓰이던 1,600톤에 달하는 참나무 판자가 파괴되었다. 드레이크는 이 판자에 25,000~30,000톤에 달하는 식수와 식량을 저장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 판자들이 파괴되자, 스페인군은 품질이 좋지 않은 나무로 통을 급하게 만들어야 했고, 이 통에 담긴 식량과 식수는 금세 썩기 시작했다.
당시 리스본에 배를 대고 있던 산타크루스 후작은 바다로 출격해 적을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갤리온과 갤리선은 장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선원도 충분히 배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리스본 항구 요새의 보호를 받으며 버티기로 했다. 드레이크는 산타크루스 후작에게 전령을 보내 포로를 교환하거나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산타크루스 후작은 두 제안 모두 거부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함대를 리스본에서 유인해 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렇다고 무작정 쳐들어갔다간 낭패를 볼 거라 판단해 사그레스로 철수했다.
프랜시스 월싱엄은 여기에 더해 스페인의 침략을 약화하기 위해 런던 금융가들을 시켜 주요 이탈리아 은행들이 스페인에 대한 대출을 거부하도록 설득하게 했다. 이탈리아 사채업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그 결과 무적함대는 절실히 필요했던 군자금이 바닥나자 1587년 대부분을 항구에 가만히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월싱엄은 유럽 대륙에 더 많은 요원을 파견하여 펠리페 2세의 작전 준비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심지어 자기 요원 한 명을 산타크루스 후작의 집으로 보내서 그의 원정 계획을 파고들게 했다. 또한 월싱엄은 자신이 고용한 요원들을 통해 적에게 스페인군이 상륙하기에 적합한 잉글랜드 항구부터 잉글랜드 해안의 조수와 기상 조건 등에 관한 허위 정보를 유포했다.
잉글랜드의 훼방으로 잉글랜드 침공을 위한 함대 집결이 지연되자, 펠리페 2세는 이에 분노해 산타크루스 후작에게 가혹한 언사를 퍼부었다. 왕은 산타크루스 후작이 딴 마음을 품고 부당하게 출항을 지연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일부 저자들은 산타크루스 후작이 1588년 2월 4일 해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왕의 압박과 잉글랜드 해군에게 당한 치욕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한 건 분명하다. 그러던 1588년 2월 9일, 산타크루스 후작은 리스본에서 급사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과도한 과로와 심리적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끝에 건강이 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알론소 데 구즈만 이 소토마요르가 대함대 사령관으로 선임되어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을 이끌었지만,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산타크루스 후작의 유해는 비소 델 마르케스에 있는 성모 승천 교회에 안치되었다가, 1645년 같은 마을의 산프란시스코 수도원에 있는 가족 예배당에 옮겨졌다, 1836년 앤디사발의 몰수로 인해 다시 교회로 옮겨졌고, 1988년 스페인 해군이 그를 위한 장례식을 조직하면서 그의 관을 산타크루스 후작의 궁전에 안치했다.
3. 건축 활동과 후원 활동
산타크루스 후작은 16세기 말에 2개의 궁전을 지었다. 하나는 벨데페냐스의 중앙 광장에 세웠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엘 비소 델 마르케스의 교구 교회 옆에 세워졌으며, '산타크루스 후작의 궁전'으로 일컬어졌다. 현재 이 궁전은 스페인 해군 총기록보관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 궁전의 건축은 이탈리아 건축가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로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스페인 르네상스의 상징 중 하나로 간주할 만큼 아름다운 궁전으로 손꼽혔다.1574년, 산타크루스 후작은 이탈리아에서 온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페롤라에게 궁전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라고 명령했다. 페롤리는 친척인 에스테반과 후안 에스테반 페롤리, 베네치아 출신의 체사레 데 벨리스와 함께 궁전에서 일했다. 또한 그는 아내인 마리아 마누엘 데 베나비데스과 함께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다. 로페 데 베가, 루이스 데 곤고라, 미겔 데 세르반테스 등 여러 작가가 작품 일부를 산타크루스 후작 부부에게 헌정했다. 산타크루스 후작은 베르나르도 데 발부에나를 비롯한 시인들을 후원했다. 아들 알바로 역시 자신에게 희극을 헌정한 펠릭스 로페 데 베가를 후원했다.
4. 기타
- 알바로 데 바잔급 호위함의 이름의 어원이다.
- 문명 시리즈 중 문명 6에서 위대한 제독 위인에 포함되었다.
- 대항해시대 시리즈 중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선 세비야 왕궁의 NPC로 등장한다. 자카르타에서 출발해서 세비야에서 완료하는 구입 발주서 4번 퀘스트인 '보석으로 불리는 등껍질'을 진행하려면 별갑 3개를 준비해서[1] 전달하면 완료되므로 향신료 무역을 다니면 특히 자주 보게 된다.
[1] 페구에 별갑이 뜰 때까지 40만 두캇 가량 투자를 해 둬야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