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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9 15:26:22

조 스미스 이면계약 파동

1. 개요2. 발단과 전개3.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다4. 결말5. 스미스의 이후 행보6. 유사 사례7.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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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NBA를 뒤흔든 부정계약 사건으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역사상 흑역사로 손꼽히는 사건이다.

2. 발단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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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본인 조 스미스. 가운데는 스테판 마버리, 오른쪽은 케빈 가넷.

1990년대 중반 NBA에서는 마이클 조던과 드림팀의 효과로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으며 그만큼 인기도 폭등해 리그의 수익이 급격하게 증가했고 그만큼 선수들의 몫도 늘어나 고액연봉자들이 눈에띄게 많이 증가했다. 그 덕에 리그에 입성하는 신인들조차 과다한 연봉 요구로 안좋은 쪽으로 파문이 자주 일어나던 때였다. 스미스 데뷔에 앞서 1994년 드래프트 1위로 지명된 퍼듀 대학교 출신 포워드 글렌 로빈슨은 자신을 지명한 밀워키 벅스에 총 기간 10년+총액 1억 달러 계약 요구를 했다가 폭풍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 벅스 감독이던 마이크 던리비 시니어는 "검증된 적 없는 선수가 1억 달러를 요구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며 줄 수 없다고 버텼고, 결국 그는 6천 8백만 달러로 내려진 연봉에 합의했다. 이 계약이 이뤄지기 1년전, 1991년 전체 1위 출신인 샬럿 호네츠의 포워드 래리 존슨마저 무려 8천 4백만 달러에 계약을 체결해 선배들을 씁쓸케 했다.

메릴랜드 대학교 시절 평균 20.8점, 10.6 리바운드, 2.9블록을 기록한 스미스 역시 이러한 거액의 계약을 원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NBA 입단을 선언했는데, 그 뒤에는 어머니의 입김도 있었다. 어머니는 루키 시즌에도 스미스가 생각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고, 광고 계약도 미진하자 에이전트를 해고했을 정도로 돈 욕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불행히도 NBA는 스미스가 드래프트에 참가한 1995년에 신인들의 샐러리 캡 규정을 바꾸었다. 이 내용은 신인선수의 계약금액에 상한선을 걸어서, 무분별한 계약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것이다. 결국 스미스는 1년 전에 데뷔했던 선배들보다 훨씬 적은 금액에 3년간 의무적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뛰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스미스는 1998년에 자유계약으로 풀리면서 새 팀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스미스는 그해 여름부터 터진 NBA와 선수노조 간의 갈등으로 직장폐쇄가 되어 원하는 팀과 거액의 계약을 맺을 수 없었다.

모든 계약이 꽁꽁 묶여있는 가운데 스미스는 그간 자신에게 러브콜을 무진장 보내온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 계약을 합의한 뒤, 직장폐쇄가 끝난 1999년 1월에 울브스와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른다.

사실 스미스의 울브스 입성은 팬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연고지인 미니애폴리스는 대도시도 아니고 강팀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타들로부터 외면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1998/99 시즌에 스미스는 13.7점 및 8.2 리바를 따내 울브스의 플옵 진출에 기여했다. 1999/2000 시즌에도 그는 가넷의 도우미 역할에 충실하여 울브스의 포스트를 책임져왔다.

3.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다

그러나 2000년 9월, NBA는 스미스가 울브스와 부정적인 이면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합법적인 서면 계약 뒤에 불법적인 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울브스는 스몰 마켓인 미네소타 주에 아무도 오려 하지 않자 스미스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했다. 먼저 매 1년짜리 단기 계약을 세 시즌 동안 쪼개서 체결하고, 그 뒤 네 번째 계약에서 고액의 장기 계약을 통해 부족한 연봉을 채워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스미스의 에이전트이자 구단과 친밀한 관계였던 에릭 프레셔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스미스 정도의 유망주가, 그것도 돈을 밝히는 에이전트와 부모가 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울브스와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에 계약을 맺은 배경을 모두가 의심하던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단기 계약을 세번 할 필요가 있는지? 이는 울브스의 당시 자금 사정이 좋지 못한 데다 샐러리 캡 역시 상한선을 넘긴 터라 합법적으로 스미스가 원하는 금액을 한꺼번에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겉으로는 NBA 규정에 맞춰 적은 금액을 주면서 3년을 채우게 한 것이다. 게다가 한 팀에서 3년을 보내면 래리 버드 조항에 따라 팀 샐러리 캡에 상관없이 고액의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결국 스미스 역시 해당 조항만 보고 헐값에 제안한 계약이었다.

4. 결말

NBA가 스미스에게 내린 철퇴는 강력했다. 뒷돈을 따로 준 건 아니지만, 규정을 회피하기 위해 이면 계약을 체결했다는 점에 대해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다.

먼저 NBA는 스미스의 3년 계약을 전부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세 시즌 째를 맞던 그의 계약 연수도 인정되지 않았다. 래리 버드 조항의 수혜자가 되겠다는 꿈은 결국 물거품이 된 셈이었다.

거기에 울브스는 2000년부터 5년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이 박탈되면서 350만 달러라는 역대 최고 금액을 벌금으로 물어야 했다. 또 구단주 글렌 테일러와 단장 겸 부사장 케빈 맥헤일은 1년 간 울브스의 훈련 및 시즌 경기 참관권을 박탈당했다. 이 조치는 업무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그만큼 데이비드 스턴 총재의 분노가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미스의 에이전트였던 프레셔 역시 5만 7천 달러의 벌금을 물었고, 6개월간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 징계는 선수노조의 반발로 인해 상당한 진통을 겪었는데, NBA에서조차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해 중재위원회에까지 넘어갈 정도로 파장도, 상처도 컸다.

특히 울브스는 재능 있는 신인을 잡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케빈 가넷이 샐러리 캡에서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자유계약 선수 영입도 못 하는 처지가 된 울브스는 '가넷의 원맨 팀'이란 오명을 들으면서 2004/05 시즌부터 가넷이 떠난 2006/07 시즌까지 세 시즌 연속으로 전부 플옵을 못 갔으며, 2014년부터 가넷이 돌아온 이후로도 플옵 진출은 여전히 실패했다.

사실 가넷에게 1억 2,600만 달러라는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장본인도 프레셔였는데, 이는 스타들의 갈수록 높아지는 연봉에 위기의식을 느낀 구단이 선수들의 연봉제도에 변화를 가하면서 선수노조와 갈등을 일으키게 한 발단이었다. 결국 가넷과 스미스 사건으로 계속해서 에이전트로서의 신용에 큰 타격을 입은 프레셔는 이후 NBA 에이전트로서 더 이상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5. 스미스의 이후 행보

이 사건으로 인해 스미스는 울브스와의 계약이 무효화되고, 한때 NBA 선수 명단에서 삭제되는 비극까지 겪어야 했다. 이후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선수 자격이 회복된 그는 2000년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1년 및 2백 25만 달러에 계약했다.

한때 천만불의 계약을 기대한 그였지만, 신용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몸값 역시 이에 따라 떨어져 결국 스미스는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1년 뒤에 가넷의 인연으로 울브스로 복귀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자 2003년에 울브스는 그를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했다. 스미스의 기량만 놓고 봤을 때, 어쩌면 울브스는 그 당시 계약이 들통난 게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후 2006년까지 밀워키에서 뛴 스미스는 덴버 너기츠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시카고 불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을 전전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다 2010/11 시즌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 뛴 것을 마지막으로 농구화를 벗었다. 저니맨 긴 파동을 거치는 동안 스미스는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선수보다 계약을 위반한 선수의 이미지가 더 강한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코트 밖에서 그는 성실한 선수로, 그가 합류하는 팀마다 단장이나 선수들이 두 손 들어 환영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참고로 스미스는 데뷔 후 총 16시즌 1,030경기를 뛰었는데 자그마치 12개팀의 유니폼을 입었다. 미네소타나 클리블랜드 처럼 뛰었다가 다른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12개 팀이지 이적만 15번이나 했다. 통산 연봉은 약 6,100만 달러로 기대보다는 한참 못미쳤는데 이 사건과는 별개로 농구 자체를 잘 하지 못했다(통산 올스타 0번).[1]

물론 한화로 약 700억원의 연봉을 받았으니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은건 사실이지만 드래프트 동기인 가넷은 약 3억 4천만 달러의 연봉을 받은걸 감안하자. 사실 스미스가 참여한 95 드래프트는 흉작 드래프트로 유명한데 5순위의 케빈 가넷(고졸 지명) 제외하면 라시드 월러스, 제리 스택하우스, 마이클 핀리 정도여서 제대로 된 스타 플레이어 하나 없었다.

6. 유사 사례

조 스미스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96년에 워싱턴 불리츠의 주완 하워드도 최초의 1억 달러 선수가 되었지만, 기대에 못 미친 평범한 기록을 낸 탓에 팬들의 눈총을 샀다. 이로 인해 하워드는 1억 달러 계약 기간을 미처 채우지 못한 채 중간에 바이 아웃을 통해 댈러스 매버릭스로 떠났다. 하워드는 계약이 끝나면서 "마음이 너무 홀가분하다."고 밝혀 이목을 끈 바 있다.

7. 출처



[1] 스몰 포워드파워 포워드를 왔다갔다하는 트위너였는데 스몰포워드를 맡기엔 스피드가 느리며 파워 포워드를 맡기엔 파워가 부족하다는 평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