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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第1回衆議院議員総選挙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최초 선거) | 1890년 7월 1일 1회 중원선 | → | 1892년 2월 15일 2회 중원선 | }}} | |||||
투표율 | 93.73%[1] | |||||||||
선거 결과 | ||||||||||
<rowcolor=#2D3865,#CFA547> 정당 | 지역구 | 총합 | 비율 | |||||||
''' 입헌자유당 ''' | 130석 | 130석 | 43.3% | |||||||
''' 대성회 ''' | 79석 | 79석 | 26.3% | |||||||
''' 입헌개진당 ''' | 41석 | 41석 | 13.7% | |||||||
''' 국민자유당 ''' | 5석 | 5석 | 1.7% | |||||||
''' 무소속 ''' | 45석 | 45석 | 15.0% |
[clearfix]
1. 개요
1890년 7월 1일에 치러진 최초의 중의원 의원 총선거.2. 배경
1889년 2월에 공포된 대일본제국 헌법으로 제국의회(帝國議會) 성립이 결정되면서, 그 중 하원인 중의원의 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선거 당시 내각은 제1차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이었다.3. 제도
- 선거구
기본적으로 소선거구제를 채택하였다. 전국 45개 부·현을 257개 선거구로 나누었으며, 1인 선출 선거구가 214개, 2인 선출 선거구가 43개였다.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외지(外地)로 취급되어 선거구가 설정되지 않았으며, 홋카이도는 1902년 7회 중원선 때, 오키나와는 1912년 11회 중원선 때 선거구가 설정되었다. 그 외에 도쿄부의 오가사와라 제도 또한 선거구에서 제외되었다. - 선거권
국민 중 '1년 이상 일본 본토에 거주하고 15엔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내는 25세 이상 성인 남성'에게만 선거권이 인정되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투표에 참여도 할 수 없었고, 성인 남성이라도 중상류층 이하면 투표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해당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는 유권자의 수는 45만 명[2]에 불과하였다. 이 중 납세조항은 1925년에, 성별제한은 1945년이 되어서야 철폐되었다. 근거가 된 중의원의원선거법 제6조는 아래와 같다.第六條 選擧人ハ左ノ資格ヲ備フルコトヲ要ス第一 日本臣民ノ男子ニシテ年齡滿二十五歲以上ノ者第二 選擧人名簿調製ノ期日ヨリ前滿一年以上其ノ府縣內ニ於テ本籍ヲ定メ住居シ仍引續キ住居スル者第三 選擧人名簿調製ノ期日ヨリ前滿一年以上其ノ府縣內ニ於テ直接國稅十五圓以上ヲ納メ仍引續キ納ムル者但シ所得稅ニ付テハ人名簿調製ノ期日ヨリ前滿三年以上之ヲ納メ仍引續キ納ムル者ニ限ル제6조 선거인은 아래의 자격을 갖출 것을 요한다.1. 일본 신민인 남자로 연령 만 25세 이상인 자2. 선거인명부 작성기일 이전 만 1년 이상 그 부현(府縣) 내에 본적을 두고 계속 거주하고 있는 자3. 선거인명부 작성기일 이전 만 1년 이상 그 부현(府縣) 내에서 직접국세 15엔 이상을 계속 납부하고 있는 자다만, 소득세에 대해서는 인명부 작성기일 이전 만 3년 이상 그것을 계속 납부하고 있는 자에 한한다. - 피선거권
국민 중 '만 30세 이상이며 선거인명부 작성기일 이전 만 1년 이상 그 부현(府縣) 내에서 직접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하고 있는 성인 남성'에게 피선거권이 인정되었다. 단서조항으로 소득세의 경우 기간을 3년으로 정하고 있는 점에서도 선거권자 규정과 비슷하나, 피선거권자의 납세조항은 1900년에 철폐되었다. 근거가 된 중의원의원선거법 제8조는 아래와 같다.第八條 被選人タルコトヲ得ル者ハ日本臣民ノ男子滿三十歲以上ニシテ選擧人名簿調製ノ期日ヨリ滿一年以上其ノ選擧府縣內ニ於テ直接國稅十五圓以上ヲ納メ仍引續キ納ムル者タルヘシ但シ所得稅ニ付テハ人名簿調製ノ期日ヨリ前滿三年以上之ヲ納メ仍引續キ納ムル者ニ限ル제8조 피선거인이 되려는 자는 일본 신민인 남자로 만 30세 이상이며 선거인명부 작성기일 이전 만 1년 이상 그 부현(府縣) 내에서 직접국세 15엔 이상을 계속 납부해야 한다.다만, 소득세에 대해서는 인명부 작성기일 이전 만 3년 이상 그것을 계속 납부하고 있는 자에 한한다.
- 임기
현대와 마찬가지로 중의원 해산이 없는 이상 임기는 4년이었다.
4. 선거 결과
정당 | 의석수 | |||
대동구락부 | 54 | |||
입헌개진당 | 43 | |||
애국공당 | 36 | |||
규슈연합동지회 | 24 | |||
자유당 | 17 | |||
무소속(자치파) | 12 | |||
무소속(국권파) | 12 | |||
무소속(보수중정파) | 6 | |||
교토부 공민회 | 5 | |||
히로시마 정우회 | 4 | |||
미야기 정회 | 4 | |||
군마 공의회 | 3 | |||
교토 공우회 | 1 | |||
무소속 | 79 | |||
전체 | 300 | |||
<colbgcolor=#2D3865> 유권자 수 | 450,872명 | |||
투표자 수 | 422,594명 | |||
투표율 | 93.73% | |||
입후보자 수 | 1,243명 | |||
선출인원 | 300명 |
5. 선거 후 상황
5.1. 회파 결성
규슈연합동지회는 이름을 규슈동지회로 바꾸고 대동구락부, 애국공당과 함께 입헌개진당과 자유당에 연합 의사를 타진했으나, 입헌개진당이 단념하여 자유당과 통합하였다. 이를 계기로 자유당은 '입헌자유당'으로 당명을 바꾸었고, 원내에서는 '야요이 구락부'(弥生倶楽部)라는 회파를 결성했다. 한편 입헌개진당은 단독으로 의원집회소(議員集会所)라는 회파를 구성했다.한편 나머지 의원들은 당파색이 강한 두 민권파 정당에 대항하여 대성회(大成会)를 조직하였으며, 자유당에서 탈당한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계 의원들은 국민자유당을 구성했다.
이러한 판세를 상대적으로 친정부적인 '이당(吏党)'과 자유민권운동파인 '민당(民党)'으로 나눈다면, 대성회와 국민자유당을 이당, 입헌자유당과 입헌개진당을 민당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제1대 중의원은 이당 84석, 민당 171석으로 민당의 절대적 우세였다.
정당 | 의석 | ||
이당(吏党) | 84 | ||
대성회(大成会) | 79 | ||
국민자유당(国民自由党) | 5 | ||
민당(民党) | 171 | ||
입헌자유당(立憲自由党)[3] | 130 | ||
입헌개진당(立憲改進党)[4] | 41 | ||
무소속 | 45 | ||
전체 | 300 |
5.2. 의회 구성
1890년 11월 25일에 제1제국의회(第1帝國議會)가 구성되었으며, 중의원 의장은 입헌자유당의 나카지마 노부유키(中島信行)가, 부의장은 대성회의 쓰다 마미치(津田真道)가 선출되었다.5.3. 보궐선거 및 경정
1892년의 제2회 총선 이전까지 총 20개 선거구에서 보궐선거(補欠選挙)가 치러졌으며, 사유로는 임기 중 사망이 6건, 사임이 14건이었다. 또한 당선소송에서의 당선무효 결정으로 인하여 3개 선거구에서 재판소(법원)의 경정(更正)이 이루어졌다.6. 지역별 결과
민당 강한 우세 (75%~) | |
민당 우세 (50~74%) | |
민당 약한 우세 (~49%) | |
민당-이당 동률 | |
이당 약한 우세 (~49%) | |
이당 우세 (50~74%) | |
이당 강한 우세 (75%~) | |
무소속 강한 우세 (75%~) | |
무소속 우세 (50~74%) | |
무소속 약한 우세 (~49%) |
6.1. 도호쿠
지역 | 대성회 | 국민자유당 | 입헌자유당 | 입헌개진당 | 무소속 | 전체 |
아오모리현 | 0 | 0 | 4 | 0 | 0 | 4 |
이와테현 | 1 | 0 | 4 | 0 | 0 | 5 |
미야기현 | 4 | 0 | 1 | 0 | 0 | 5 |
아키타현 | 2 | 0 | 3 | 0 | 0 | 5 |
야마가타현 | 0 | 0 | 4 | 0 | 2 | 6 |
후쿠시마현 | 5 | 0 | 2 | 0 | 0 | 7 |
- 전반적으로 민권파가 강세였으나, 비민권파인 대성회도 의석을 많이 챙겼다.
6.2. 간토
지역 | 대성회 | 국민자유당 | 입헌자유당 | 입헌개진당 | 무소속 | 전체 |
이바라키현 | 1 | 0 | 2 | 3 | 2 | 8 |
도치기현 | 0 | 0 | 4 | 1 | 0 | 5 |
군마현 | 1 | 0 | 4 | 0 | 0 | 5 |
사이타마현 | 1 | 0 | 4 | 2 | 1 | 8 |
치바현 | 0 | 0 | 4 | 3 | 2 | 9 |
도쿄부 | 4 | 0 | 2 | 3 | 3 | 12 |
가나가와현 | 0 | 0 | 6 | 1 | 0 | 7 |
- 전반적으로 민권파가 압승하였다. 다만 수도인 도쿄부에서는 비민권파인 대성회가 약진하였다.
6.3. 주부
지역 | 대성회 | 국민자유당 | 입헌자유당 | 입헌개진당 | 무소속 | 전체 |
니가타현 | 0 | 0 | 9 | 3 | 1 | 13 |
도야마현 | 0 | 0 | 1 | 3 | 1 | 5 |
이시카와현 | 0 | 1 | 2 | 2 | 1 | 6 |
후쿠이현 | 0 | 0 | 4 | 0 | 0 | 4 |
야마나시현 | 1 | 0 | 0 | 0 | 2 | 3 |
나가노현 | 2 | 0 | 5 | 0 | 1 | 8 |
기후현 | 5 | 0 | 1 | 0 | 1 | 7 |
시즈오카현 | 4 | 0 | 2 | 2 | 0 | 8 |
아이치현 | 9 | 0 | 2 | 0 | 0 | 11 |
6.4. 긴키
지역 | 대성회 | 국민자유당 | 입헌자유당 | 입헌개진당 | 무소속 | 전체 |
미에현 | 1 | 0 | 3 | 2 | 1 | 7 |
시가현 | 4 | 0 | 1 | 0 | 0 | 5 |
교토부 | 5 | 0 | 1 | 0 | 1 | 7 |
오사카부 | 4 | 0 | 6 | 0 | 0 | 10 |
효고현 | 0 | 0 | 6 | 5 | 1 | 12 |
나라현 | 0 | 0 | 2 | 1 | 1 | 4 |
와카야마현 | 0 | 0 | 0 | 0 | 5 | 5 |
- 대성회가 우세인 전통적 수도권 교토·시가와 민권파 우세지역인 한신(阪神)권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6.5. 주고쿠
지역 | 대성회 | 국민자유당 | 입헌자유당 | 입헌개진당 | 무소속 | 전체 |
돗토리현 | 2 | 0 | 0 | 0 | 1 | 3 |
시마네현 | 5 | 0 | 0 | 0 | 1 | 6 |
오카야마현 | 4 | 0 | 3 | 1 | 0 | 8 |
히로시마현 | 2 | 0 | 1 | 2 | 5 | 10 |
야마구치현 | 0 | 0 | 0 | 0 | 7 | 7 |
- 돗토리와 시마네에서는 비민권파인 대성회가 초강세를 보였고, 오카야마와 히로시마에서도 비민권파가 민권파와 비슷한 의석수를 확보했다.
6.6. 시코쿠
지역 | 대성회 | 국민자유당 | 입헌자유당 | 입헌개진당 | 무소속 | 전체 |
도쿠시마현 | 0 | 0 | 1 | 3 | 1 | 5 |
카가와현 | 0 | 0 | 3 | 1 | 1 | 5 |
에히메현 | 0 | 0 | 5 | 2 | 0 | 7 |
고치현 | 0 | 0 | 4 | 0 | 0 | 4 |
- 4개 현 모두 민권파 절대강세 지역이었다.
6.7. 규슈
지역 | 대성회 | 국민자유당 | 입헌자유당 | 입헌개진당 | 무소속 | 전체 |
후쿠오카현 | 5 | 0 | 2 | 0 | 2 | 9 |
사가현 | 0 | 0 | 1 | 3 | 0 | 4 |
나가사키현 | 1 | 0 | 5 | 0 | 1 | 7 |
구마모토현 | 1 | 4 | 2 | 0 | 1 | 8 |
오이타현 | 4 | 0 | 1 | 1 | 0 | 6 |
미야자키현 | 0 | 0 | 3 | 0 | 0 | 3 |
가고시마현 | 0 | 0 | 7 | 0 | 0 | 7 |
- 전반적으로 민권파가 강세를 보였으나, 후쿠오카와 구마모토에서는 비민권파가 우세했다. 특히 구마모토에서는 국민자유당 당선자 5명 중 4명이 선출되었다.
7. 주요 당선자
7.1. 입헌자유당
- 고노 히로나카(河野広中; 후일 농상무대신): 후쿠시마 3구
- 기쿠치 간지(菊池侃二; 후일 오사카부지사): 오사카 5구
- 나카에 도쿠스케(中江篤介; 자유민권 사상가)[5]: 오사카 4구
- 나카지마 노부유키(中島信行; 의장, 전 가나가와현령, 재이탈리아 공사): 가나가와 5구
- 스기타 데이이치(杉田定一; 후일 홋카이도청 장관): 후쿠이 2구
- 마쓰다 마사히사(松田正久; 후일 대장대신, 문부대신, 사법대신): 사가 1구
- 하야시 유조(林有造; 후일 체신대신, 농상무대신): 고치 2구
7.2. 입헌개진당
- 다나카 쇼조(田中正造)[6]: 도치기 3구
- 다카다 사나에(高田早苗; 후일 문부대신, 귀족원 의원): 사이타마 2구
- 다케토미 도키토시(武富時敏; 후일 체신대신, 대장대신): 사가 1구
- 아마노 다메유키(天野為之; 후일 와세다대학 학장): 사가 2구
-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후일 문부대신, 사법대신): 미에 5구
-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후일 제29대 내각총리대신): 오카야마 3구
7.3. 대성회
- 마스다 시게유키(増田繁幸; 대성회 당수): 미야기 1구
- 모토다 하지메(元田肇; 후일 체신대신, 철도대신): 오이타 1구
- 스기우라 주고(杉浦重剛; 국수주의 사상가, 교육자)[7]: 시가 1구
-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 후일 체신대신, 내무대신)[8]: 후쿠오카 8구
- 쓰다 마미치(津田真道; 부의장): 도쿄 8구
- 오히가시 기테쓰(大東義徹; 후일 사법대신): 시가 3구
7.4. 무소속
- 구스모토 마사타카(楠本正隆; 전 니가타현령, 도쿄부지사): 도쿄 1구
-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후일 외무대신, 농상무대신): 가나가와 1구
[1] 역대 최고 투표율. 단, 이 시기의 중의원 총선거는 '1년 이상 일본 본토에 거주하고 15엔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내는 25세 이상의 남성'만이 선거권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전체 인구의 1.13%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권자 자체가 적어서 보통 선거 시행 후의 투표율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2] 당시 전체 인구 3993만 명의 1.13%[3] 회파명은 야요이 구락부(弥生倶楽部).[4] 회파명은 의원집회소(議員集会所).[5] 그의 호인 나카에 조민(兆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 자크 루소를 일본에 소개하여 '동양의 루소'로 불린다.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가 그의 제자이다.[6] 아시오 광독 사건의 해결을 위해 노력한 주요 정치가이며, 이 때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가 관리 모독죄로 투옥되기도 했다.[7] 후일 쇼와 덴노에게 윤리학을 가르쳤다.[8]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