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정문규(鄭文圭) |
일본식 성명 | 智山文圭 |
본관 | 경주 정씨 |
생몰 | 1915년 8월 11일 ~ 1970년 12월 18일 |
출생지 |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현매리[1] |
사망지 | 경기도 안성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정문규는 1915년 8월 11일 경기도 안성군(현 안성시) 서운면 현매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유한제약주식회사(柳漢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하던 중[2], 주오대학 동창인 최승우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충칭 망명을 권유했다. 1943년 3월 이를 결행하여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1944년 7월 정문규는 “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후 1945년 7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취급령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미결구류일수 중 7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석방되었다. 이후 안성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0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정문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