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정팔진(丁八鎭) |
자 / 호 | 기숙(基淑) / 기수(己修) |
본관 | 나주 정씨(羅州 丁氏)[1] |
출생 | 1897년 1월 9일 |
경상북도 대구군 달서면 성당동 (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183번지[2]) | |
사망 | 1977년 4월 24일 (향년 80세) |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 |
종교 | 기독교[3]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20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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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97년 1월 9일 경상북도 대구군 달서면 성당동(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183번지)에서 아버지 정규오(丁奎五, 1864. 4. 19 ~ 1932. 6. 16)[4]와 어머니 성주 이씨(1861. 2. 8 ~ 1938. 1. 26)[5]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0년 8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이현수(李賢壽)[6]를 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포고문·경고문·긴급경고문·자유신보(自由新報)·물품불구매(不購買)고지서·납세거절 협박문·유고문(諭告文)·군사주비단 단칙(軍事籌備團團則)·임시교통사무국 장정(章程)·의용단(義勇團) 취지서·독립공채(獨立公債) 모집에 관한 인정서(認定書)·독립공채 모집 임명장·독립공채 증권(證券)을 작성 후 인쇄하였다. 그리고 인쇄된 문서를 경상북도 관내 조선인 군수·면장 등 관리들과 지역 부호들에게 발송했고, 늦은 밤에는 이 문서들을 대구부 관내 길거리 곳곳에 뿌려놓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또한 이현수·서장환(徐章煥)·곽종해(郭鍾海) 등과 함께 1923년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림으로써 각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했고, 이에 경상북도 대구부·평안남도 평양부·전라북도 전주군 등지에 거주하는 외국인 선교사와 경상남도 부산부에 거주하는 외국인 의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이어 워싱턴군축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신문사와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1월 일본 제국 경찰의 갑작스런 가택수색을 당한 뒤 앞서 언급한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13종의 문서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던 문서 등이 압수되었고, 동지 20여 명과 함께 경상북도경찰부에 검거되었다. 그런데 당초 1923년 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했으나 다시 체포돼 1923년 3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1977년 4월 24일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별세했다.
1977년 12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10년 11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1] 초암공파(草菴公派)-감찰공계(監察公系) 28세 진(鎭) 항렬.[2] 현재는 사라진 지번으로, 대구문화예술회관 입구 오른쪽 주차장 일부로 추정된다.[3] 독립신문 상해판 제23호 (1923. 2. 17)[4] 자는 진오(晉五).[5] 이중립(李仲立)의 딸이다.[6] 정덕진 독립유공자 공적개요에는 이귀수(李貴壽)로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