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의 실제 집단
赤報隊-세키호다이. 에도시대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는 교체기에 존재했던 부대. 창설자 및 지휘자는 사가라 소조. 이마에 붉은 띠를 둘렀다 해서 적보대로 불렸다.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결성된 의용부대로 농민, 재야인사들로 구성되어, 당시의 중심지인 에도(도쿄)로 쳐들어가는 관군(유신군)에 앞서 길목의 마을을 정찰하고 협력을 받아내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당시 계속되는 내전, 기근, 질병으로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사가라 소조(相楽 総三)[1]가 이끌던 적보대 1번대는 유신정부가 포고한 조세반감령을 전하며 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항복으로 에도결전이 무의미하게 된 데다가, 재정이 부족했던 유신정부는 조세반감령 약속을 번복하고 적보대를 유언비어를 퍼뜨린 가짜관군으로 몰아 처벌했다.
그러나 사실을 따져보면, 적보대장 사가라 소조는 '초망(소모)', 즉 자발적으로 궐기한 존황파 지사로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관동 지방 공작원같은 존재로 막부측을 도발하는 사건들을 일으켰고, 적보대 창설 이전에 일어난 에도 사쓰마 번저 방화사건, 즉 보신 전쟁 발발의 단초를 제공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사가라가 이끄는 1번대만 사츠마번의 지휘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정부군이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진 막대한 채무를 감당할 수 없어 조세 반감령을 철회했는데도 사가라는 계속 이것을 선전했고, 귀환 명령을 내리자 적보대의 다른 부대들은 명령에 복종해 귀대했는데 사가라의 1번대만 혼자서 명령에 불복종한 채 철군을 거부하고 주변에서 군량, 군자금을 현지조달하며 전진했기 때문에 신정부의 이름만 빌어다 약탈을 하는 가짜 관군이라는 추궁을 면할 수 없었던 것. 게다가 하필 타이밍도 최악이었는데, 쿠와나번에서 적보대 별동대가 약탈행위를 하거나 심각한 월권행위를 저질렀다는 등의 이유로 체포되어 상당수의 대원이 처형당하고 별동대의 명망 있는 귀족들이 교토로 돌려보내지는 참사가 있었다. 이것이 지휘계통을 이탈하고 독단적으로 진격하던 사가라의 1번대가 반란군이라는 인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결국 사가라는 1868년 3월 시모스와에서 붙잡혀서 참수당한다.[2]
훗날에 와서야 사가라 소조의 손자 기무라 가메타로의 노력으로 현창비가 세워지는 등 오명은 씻어지지만, 이렇듯 지나치게 미화되었기 때문에 진상에는 다소 논란거리가 있다. 사가라 소조는 쇼와 3년(1928년), 정5위의 관위가 주어졌고 다음 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2. 일본의 테러 단체(또는 개인)
자세한 건 적보대 사건 참고.3.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의 적보대
진정한 사민평등을 목표로 하는 사가라 소조의 지휘 아래 유신지사 측의 선봉에서 싸워온 부대. 유신정부의 조세감면 정책을 선전하며 유신지사들의 힘을 키워주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에 어린 시절의 사가라 사노스케도 감복해 집을 뛰쳐나오면서까지 적보대에 참여했을 정도.그러나 그들이 북상하던 도중 에도결전이 무의미해지게 되면서, 본디 아직 역량이 모자랐던 유신정권으로서는 당초 내세웠던 조세감면을 이룰 여건이 아니었고, 그래서 적보대를 가짜 관군으로 몰아세워 조세감면 그 자체를 없었던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원래부터 적보대는 평민 출신이 많아 토사구팽해도 아까울 게 없었다고 판단한 것.
이로 인해 적보대 전원이 시모스와(코슈 가도와 나카센도에도 이 지명이 나온다.)에서 몰살당했고, 사가라 소조는 참수당해 목이 내걸렸다. 생존자는 준병이었던 사노스케와 가츠히로 둘 뿐이다. 이로 인해 둘은 메이지 유신에 대해 깊은 환멸감과 증오를 갖게 된다.
[1] 본명은 코지마 시로 사에몬 마사미츠. 아버지 코지마 효마는 시모사국 소마군의 부농으로 매관매직을 통해 하급무사의 신분을 얻은 자였다.[2] 교토의 유력 가문들인 귀족(쿠게)들은 처형당하지 않았고, 명령에 복종해 귀대한 2번대는 처벌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