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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22:59:57

저우쥔쉰

저우쥔쉰
周俊勳 / Chou Chun-hsun
파일:d2467116.jpg
직업 바둑기사
소속 대만기원, 중국기원
생년월일 1980년 2월 23일 ([age(1980-02-23)]세)
국적
[[대만|]][[틀:국기|]][[틀:국기|]]
출신지 대만 자이현
입단 1993년(중국기원)
단급 九단
누적우승경력 50회(대만 기사 1위)
한큐바둑 닉네임 白金之星(P)
홈페이지 페이스북

1. 개요2. 생애3. 주요 경력4. 대만기원 퇴출 사건
4.1. 배경
4.1.1. 중국위기회4.1.2. 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4.1.3. 해봉기원4.1.4. 대만기원
4.2. 경과
5. 여담6. 성희롱 분쟁7. 주요 기사와의 상대 전적
7.1. 한국 기사7.2. 중국 기사7.3. 일본 기사7.4. 대만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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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바둑 기사.

2. 생애

6세 때 바둑을 처음으로 접했고, 이후 재능을 드러내어 11세 때는 중국으로 유학하여 쑹쉐린(宋雪林) 九단 문하에서 바둑을 배웠다. 13세 때인 1993년에는 중국에서 프로 三단을 인정받았고, 이듬해 귀국하여 대만에서 다시 입단 과정을 거쳐 정식 프로 기사가 되었다. 이후 초고속으로 승단하여, 4년 만인 1998년 대만 바둑 사상 최초로 九단이 되었다.

이미 10대 중반에 대만 국내 기전에서 우승하는 등 대만 국내에는 사실상 적수가 없었고, 200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세계 기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2년간 병역의무를 마친 후 2001년 후지쯔배에서 이세돌, 목진석, 고노 린을 꺾고 4강에 올랐고 2004년 후지쓰배에서도 구리이세돌을 연파하고 8강에 오르는 등 꾸준히 세계 기전에 출전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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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2007년 LG배 조선일보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후야오위(胡耀宇) 八단을 2:1로 꺾고 대만에서 활동하는 기사로는 최초로 메이저 세계 대회 우승을 차지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2] 저우쥔쉰은 1국을 완승하고 2국은 막판 대역전 반집패를 당했지만, 3국에서 우세를 잡은 후 후야오위의 추격을 뿌리치고 반집을 지켜냈다.

이 우승으로 대만의 바둑 영웅으로 부상하며 전 국민적인 스타가 되었는데, 이듬해 2008년에 대만기원(臺灣棋院)의 개혁안을 반대하다가 5년간 대만기원 주최 국내기전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아 큰 논란이 되었다. 대만에는 대만기원 뿐 아니라 해봉기원(海峰棋院), 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應昌期圍棋教育基金會) 등이 있는데, 이들 사이의 바둑계 개편 과정에서 대만기원이 제시한 개혁안을 저우쥔쉰이 거부했던 것. 이후 저우쥔쉰은 해봉기원이나 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가 주최하는 기전에 출전하는 식으로 활동을 이어가다가, 해봉기원을 이끌던 린원보(林文伯) 회장이 대만기원 이사로 취임한 이후 1년 7개월 만에 대만기원에 복귀했다. 관련 기사

이후로도 대만 바둑계 1인자로 활약하다가,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신예 기사들의 거센 도전에 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5년 하반기에는 랭킹이 5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관련 기사[3]

한국바둑리그/2022-23시즌에 특별 초청으로 참가하는 대만 '보물섬정예' 팀 감독을 맡게 됐다.

3. 주요 경력

4. 대만기원 퇴출 사건

4.1. 배경

대만에는 중국위기회와 이를 뒷받침하는 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 대만기원, 해봉기원 등이 난립하면서 각자 경쟁하고 있는 구도여서 저우쥔쉰도 2007년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직후 대만을 대표하는 정통성있는 바둑단체가 설립되기를 희망한 바 있다. 관련 기사

4.1.1. 중국위기회

중국위기회(中國圍棋會)는 1952년에 설립되어 대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바둑단체로서 1974년 최초의 대만 바둑기전인 명인전을 출범시키고 1979년에 대만에 직업기사(프로기사) 제도를 처음 도입하기도 하였다. 응씨룰을 채택하였고 직업기사들의 평가를 위하여 품위승강새(品位升降賽)[9]를 도입하여 승품이나 강품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잉창치(應昌期)가 창립시부터 오랫동안 실무자 내지 실권자로 관여하였으며 그가 설립하고 그와 그의 자손들이 운영하는 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應昌期圍棋教育基金會)가 주 후원자이다.

4.1.2. 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

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應昌期圍棋教育基金會)는 잉창치(應昌期)에 의해 설립되어 중국위기회를 후원하면서 명인전, 기왕전, 국수전, 영대배 등을 주최하였으나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를 개최한 이후 199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 중점을 두어 활동하게 됨에 따라 대만 내에서 불만이 생겨 대만기원이 설립되면서 두 단체가 공존하게 되었다.

4.1.3. 해봉기원

해봉기원(海峰棋院)의 설립자 린원보(林文伯)는 일찌기 린하이펑 九단에게 바둑을 배운 적이 있고 이후 사돈을 맺었다. 초대 대만 명인전 우승자이기도 하다. 이후 명인전 우승 상금을 밑천으로 사업에 투신하여 석품(矽品)그룹을 세우고 사업적으로 성공한 후 1998년에 해봉문교기금회(海峰文教基金会)를 설립하고 2008년에 배생문교기금회(培生文教基金会)와 통합하여 해봉기원을 출범시켰다.

4.1.4. 대만기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만기원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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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2. 경과

2008년 2월, 대만기원이 기사들의 사전동의 없이 품위유지조항과 기사들의 수입 분배조항이 포함된 개혁안을 발표하고 기사들의 서명을 요구하였다. 저우쥔쉰을 비롯한 12명의 대만 기사들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여 거부하였고 대만기원은 5년간 이들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의료보험 혜택과 원생지도권한 등을 박탈하였다. 이들은 대만기원을 떠나 중국위기회(中國圍棋會)에 가입하였고, 이 와중에 저우쥔쉰의 왕좌 타이틀도 박탈되었다.
이후 저우쥔쉰과 동료 기사들은 대만기원이나 중국위기회가 아닌 제3의 단체인 중화직업위기협회(中華職業圍棋協會)를 창립하였고 우사공사(友士公司) 등의 찬조를 받았다. 퇴출 1년 7개월 후, 해봉기원(海峰棋院) 회장 린원보(林文伯)의 중재로 대만기원은 수정된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저우쥔쉰을 비롯한 퇴출기사들이 이를 수락하고 대만기원에 복귀하게 되어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국위기회가 분노하여 자신들이 주최하던 옥덕배 십단전과 명인전을 폐지시키는 바람에 저우쥔쉰의 명인전 연속우승 기록도 16연패로 마감되었다.[10] 참고 자료(1) 참고 자료(2)

5. 여담

사진에서 보이듯 얼굴 우측이 온통 붉은 색인데, 선천적으로 있는 홍반(紅斑)이다. 어릴 적에는 이것 때문에 많은 놀림을 당하고, 심한 콤플렉스 때문에 학교에 제대로 출석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바둑 공부에 열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스타가 된 이후로는 붉은 얼굴이 오히려 자신의 상징이 되었다. 대만 초등학교 교과서에 ‘붉은 얼굴의 바둑왕(紅面棋王)’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이야기가 수록되었을 정도. 잦은 결석으로 중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지만 프로 기사로서 활약한 이후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관련 기사

아버지가 바둑을 즐겼는데 어느날 7살짜리 남자아이였던 장쉬에게 패하고 집에 와서 7살인 저우쥔쉰에게 바둑을 가르쳤다고 한다. 참고

동생 저우핑창(周平强, 1982-) 역시 프로 바둑 기사로, 2016년 현재 六단이다.

14세 연상의 부인 정수칭(鄭淑卿)은 일본에서 활약하는 왕밍완(王銘琬) 九단의 동생이다.[11]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2014년 11월 11일 천스위안 九단과의 제10기 국수전 본선리그전 대국에서 4패 무승부를 연출하였다.

2017년 1월 4일에 중국의 텐센트에서 서비스하는 한큐바둑에서 ‘Master(P)’라는 ID로 활동하던 알파고와 격돌하여 흑번으로 첫수를 천원에 착점하고 흉내바둑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알파고의 60연승 행진의 희생물이 되었다.

6. 성희롱 분쟁

2023년 8월 15일 여자기사 쑤성팡(蘇聖芳)이 주간잡지 경주간(鏡週刊)에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바둑 국가대표 감독인 저우쥔쉰이 2022년 11월중 두 차례 자신을 성희롱하였으며 다른 기사들과 함께 위협을 행사하였다고 폭로하였다. 저우쥔쉰은 대리인을 통하여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히는 한편 상호간의 오해에 대하여 사과하면서 8월 15일 저녁에 국가대표 감독직을 사임하였다. 참고 자료

7. 주요 기사와의 상대 전적

7.1. 한국 기사

7.2. 중국 기사

7.3. 일본 기사

7.4. 대만 기사



[1] 이세돌은 2002년, 2003년, 2005년 후지쓰배에서 우승했다. 저우쥔쉰은 당대 가장 까다로운 기사를 2번이나 꺾은 것.[2] 대만 출신 기사로는 린하이펑, 왕리청, 장쉬가 메이저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바 있다. 다만 이들은 모두 일본기원 소속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사들이다.[3] 저우쥔쉰의 나이가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최근 바둑계 추세를 감안하면 적은 나이가 아니기는 하다.[4] 이후 기전중단[5] 준결승에서는 최명훈 八段에게 패했고 3위결정전에서는 린하이펑 九단에 고배를 들었다.[6] 대만기원배는 이후 왕좌전으로 새로 출범[7] 이듬해 해제[8] 대만바둑 연속우승 최고기록이자 세계기록 타이. 하지만 기전이 중단되어 한국의 조훈현 九단이 패왕전(覇王戰)에서 세운 세계 기록인 16연패를 경신하는데는 실패하였다.[9] 품(品)은 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에서 규정한 대만의 단위제도로 一품(品)이 제일 높고 (단위제의 九단에 해당), 九품이 제일 낮다 (初단에 해당).[10] 중국위기회는 2011년부터 옥덕배 여자명인전을 개최하여 이후 2018년까지 7기를 운영하다가 기전을 중단시켰다. 2019년부터는 대삼위기문화예술기금회(大森圍棋文化藝術基金會)가 새로이 대삼배 여자명인전을 출범시켜 2023년 현재까지 6기가 진행되었다.[11] 왕밍완 九단은 어머니쪽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하여 다른 형제들과 달리 아버지의 성인 鄭씨 대신 어머니의 성인 王씨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