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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레지스 드 캉바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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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젊은시절2.2. 국민공회2.3. 나폴레옹의 휘하로2.4. 나폴레옹 법전2.5. 프랑스 제국의 2인자

1. 개요

Jean-Jacques-Régis de Cambacérès
(1753.10.18. ~ 1824.03.08.)

프랑스 혁명시기의 정치가. 근대의 대표적인 법중 하나인 나폴레옹 법전의 저자들중 하나이다.

2. 생애

2.1. 젊은시절

몽펠리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몽펠리에의 시장을 지냈고, 그의 형은 후에 추기경이 되었다.

1774년 법학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툴루즈의 회계법원의 판사가 되었다. 1789년 삼부회에서 귀족 대표단을 두 배로 늘릴 경우를 대비해 몽펠리에 귀족을 대표하는 추가 대리인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표단이 증원되지 않아서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1792년 소집된 국민공회에서 에로[1] 주를 대표하였다.

2.2. 국민공회

온건한 공화주의자였고 국민공회 동안 중앙의 왼쪽에 앉았다. 루이 16세의 재판 중에 의회가 법정에 국왕을 앉힐 권한이 없다고 항의했고 또 국왕이 그의 변호를 위한 적절한 시설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이 진행되자 그는 루이에게 유죄를 선고하되 집행을 유예하는 쪽에 투표했다. 캉바세레스는 입법 기관의 비준이 있을 때까지 처벌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후에 그가 국왕살해죄로 추방되는걸 막았다. 캉바세레스는 자신이 특정 파벌에 헌신한 적이 없다는 걸 확실히 하였다. 그의 법률적 전문성은 당시 공회의 이들에게 유용한 도움이 되었다. 그는 모두와 친구이이지만 또 적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국민공회에 참석한 일부 사람들은 때때로 그가 입장을 오락가락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2.3. 나폴레옹의 휘하로

1793년부터 1794년 말까지 그는 국방위원회의 일원이었고, 나중에 로베스피르 사망 이후 총재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그 기간동안 혁명기의 있었던 많은 입법 작업을 하였다. 1795년 외교관으로서 스페인, 토스카나 대공국, 프로이센 왕국, 바타비아 공화국과 평화를 협상하였다. 그의 뛰어난 토론 능력 덕분에 1795년부터 1799년까지 500인 의회 의원 자리를 얻게되었다.

1799년 혁명이 더 온건한 단계로 접어들면서 법무장관직에 올랐다. 브뤼메르 쿠데타가 일어나자 쿠데타를 지지하였다.

2.4. 나폴레옹 법전

1799년 12월, 프랑스의 제2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나폴레옹 법전의 작성이다. 이 법전은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공포되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거의 캉바세레스의 작품이었다. 이 법전은 나중에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폴란드,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독일로 전파되어 유럽 법률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2.5. 프랑스 제국의 2인자

1804년 5월 18일 프랑스 제1제국을 선포하면서 캉바세레스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고위직을 유지했다. 1815년 6월 2일부터 7월 7일까지 제국의 수상 겸 귀족원 의장이 되었고 또한 1808년 파르마 공작[2]이 되었다.

나폴레옹 치하에서 1808년 스페인 문제와 1812년 러시아 침공과 같은 모험에 반대하며 절제적이고 이성적인 조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캉바세레스는 나폴레옹에게 극도의 신뢰를 받았고, 지속적으로 조언을 구했다. 나폴레옹이 군사 문제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되면서, 프랑스의 실질적인 국내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제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그의 인기에는 손상이 갔다. 점점 더 나폴레옹의 장관들이 나폴레옹에게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면서, 그의 권력은 계속 증가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무렵, 징병제를 집행하면서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지만, 그는 정부의 정의와 온건함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면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 복귀하자 법무장관직을 역임했다. 왕정복고 이후 1816년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루이 16세의 처형을 반대했다는 사실 덕분에, 1818년 공민권을 회복하고 귀국할 수 있었다. 그 후 1824년 사망할 때까지 파리에서 조용히 살았다.


[1] 본인의 고향인 몽펠리에가 속한 지역이다[2] 나폴레옹 퇴위 후에는 전 황후 마리 루이즈가 파르마 여대공의 칭호를 사용했으므로, 1815년부터 캉바세레스는 캉바세레스 공작이라는 칭호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