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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18:15:23

장병하

파일:장병하.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유미나가 마사오(弓長正雄)[1]
본관 안동 장씨[2]
출생 1928년 2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분천리[3]
사망 2021년 12월 13일 (향년 93세)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자택
가족 배우자 이선녀, 슬하 3남 2녀
장남 장기혁[4], 차남 장재완, 3남 장재구[5]
장녀 장정숙, 차녀 장영숙
학력 안동중앙심상소학교[6] (졸업)
안동농림학교 (농과 9회[7] / 졸업)
영남대학교 (법학 55 / 학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920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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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교사. 1999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28년 2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되던 1931년 안동군 안동읍 안기정(현 안동시 안기동)으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안동중앙심상소학교(現 안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안동농림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44년 10월 교내 항일비밀결사 대한독립회복연구단[8]에 입단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참모부의 일원으로 황병기 등 단원들과 함께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제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안동군 읍내 일본인 기관 및 요인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당초 1944년 12월 22일을 거사일로 잡았으나, 준비 부족으로 시일을 1년 뒤로 미뤘고, 1945년 2월 17일에도 거사를 실행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자 1945년 3월 10일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며 거사를 추진했다. 이들은 무장봉기를 통해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대, 안동읍사무소를 점거하고 확성기 방송을 통해 의거 사실을 알려 안동군민 모두가 함께 하는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고, 1945년 3월 7일부터 12일까지 6일간 장병하를 비롯한 9회생과 8·10회생 단원 54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안동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9]

그 뒤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안동형무소에 이감되어 미결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안동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불기소처분받고 안동경찰서로 호송되었다가 8월 17일 마침내 출옥했다.

출옥 후 교육공무원에 입직해 1946년 안동 길안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안동중앙초등학교와 대구초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55년에는 영남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 졸업했다.

그 뒤 경상북도 장학사, 대구시 장학사, 대구대봉초등학교 교장·대구삼덕초등학교 교장을 거쳐 1993년 대구죽전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여 46년 4개월간 교육계에서 후진양성에 앞장섰다.

정년퇴임 후에는 광복회 이사 및 광복회 대구·경북 생존지사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광복회 대구시 달서구 초대지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청소년 대훈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2011년을 전후로 대장암이 발병해 수술을 한 차례 받았고, 이후 지속적으로 투병 생활을 이어나갔다.

2021년 12월 13일 오전 2시 45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빈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되었다. 그의 유해는 12월 17일 오전 7시 발인 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1] 1945년 8월 16일 형사사건부[2] #[3] #[4] 영남대학교 경영학과(67학번)를 졸업했다.[5] 영남대학교 조경학과(79학번)을 졸업했다.[6] 現 안동초등학교.[7] 그 유명한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동기동창이다. 이 덕분에 1978년에 동기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8] 안동농림학교 학생 황병기(黃炳基)는 1943년 여름 안동군 월곡면에 봉사 겸 지방 실태조사를 나갔는데, 이때 우연히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李炳華)를 만났다. 그는 이때 이병화로부터 임청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 학생들 중심의 독립운동의 중요성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돌아와서 이갑룡(李甲龍)·윤동일(尹東一)·강동석(姜東錫)·손성한(孫聖漢) 등과 함께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을 조직했다.[9] 부산형무소 사전검명부에 따르면, 장병하는 1945년 3월 10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1945년 8월 16일 기소유예로 출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