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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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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7b00><colcolor=gold> 제3대 중화민국 육군총사령
장파쿠이
張發奎
파일:장발규.jpg
출생 1896년 7월 25일
청나라 광동성 시흥현
사망 1980년 3월 10일 (향년 83세)
영국령 홍콩
국적
[[대만|
대만
중화민국
]][[틀:국기|
행정구
중화민국
]][[틀:국기|
속령
중화민국
]]
향화(向华)
학력 무창 육군무비학당
직업 군인, 정치인
계급
참전 국민당의 1차 북벌
4.12 상하이 쿠데타
난창 폭동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
중일전쟁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국민혁명시기2.3. 반장전쟁2.4. 중일전쟁2.5. 국공내전과 그 이후
3. 매체에서4. 참고문헌
4.1. 저서4.2. 논문
5.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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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반장파에 속했으나 중일전쟁 중에 장제스에게 복종하여 항일에 힘썼다. 국공내전 이후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6년 광동성에서 태어난 객가인이다. 1912년 황포초급군교를 거쳐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고 무창의 육군무비학당을 졸업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단행하자 호국전쟁에 가담해 호국군 영장, 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중국국민당에 가입, 1922년 천중밍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쉬충즈 휘하에서 천중밍 토벌에 가담했고 1925년 국민정부 설립 이후 리지천 휘하에서 국민혁명군 4군 12사단장을 지내다가 확대개편 과정에서 4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2.2. 국민혁명시기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나서 4군을 지휘, 우페이푸 군대를 격파했고 탕성즈의 8군과 주페이더의 3군, 천밍수의 11군과 함께 서로군에 배속되어 전진을 계속했다.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우한 국민정부의 편에서 서서 리쭝런과 대치했다. 1927년 6월 12일 우한의 중국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29차 회의에서 탕성즈 부대와 함께 4집단군으로 편성되어 4집단군 2방면군 총사령관에 임명, 탕성즈와 함께 난징 토벌을 시도했으며 7월에 청첸, 주페이더와 함께 안휘성을 침공하여 8월 7일 난창을 점령했다. 쑨촨팡의 공세로 쉬저우를 잃은 장제스는 군사적 권위에 타격을 입고 하야해야 했다.

초기에는 국공결렬에도 반대하여 중국공산당과 긴밀히 연계했으나 곧 분공조치에 따르기로 했는데 중국 공산당은 내부에서는 이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도 장파쿠이와 함께 토지개혁을 실시하려고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1927년 7월 중국 공산당 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리리싼, 윈다이잉, 담평산 등을 파견하여 강서성에서 장파쿠이의 휘하 부대를 이용하여 혁명을 실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장파쿠이는 2방면군에서 공산당원을 제거하는 것을 고려하던 중이었다.

공산당은 1927년 8월 1일, 장파쿠이의 부대가 광저우로 이동하여 난창이 빈 틈을 타 난창 폭동을 일으켰는데[1] 국민당 좌파를 포섭하기 위한 차원에서 장파쿠이를 쑹칭링 등과 함께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선출했으나 장파쿠이는 전혀 호응하지 않고 주페이더와 함께 가차없이 진압했다. 이후 리지선과 광동의 대권을 놓고 경쟁하였으나 패배하여 복건성 경계 지역으로 밀려났다.

장파쿠이는 광동에서의 열세를 만회할 겸 1927년 11월 리지선이 장제스와 합작하기 위해 난징으로 가자 왕징웨이 지지를 통전, 황기상과 함께 휘하의 리지선 군대를 축출하고 장황사변을 일으켜 반장을 시도했는데 리지선, 황샤오훙의 부대가 오주에 집결하여 장파쿠이를 토벌하고자 했고 천밍수도 여기에 가세했다. 장파쿠이는 먼저 황샤오훙을 물리쳐 기반을 튼튼히 한 다음에 천밍수를 사대하기 위해 조경과 오주 일대로 전진했는데 광저우에 잔류했던 4군 교도단과 경위단, 경찰들 중 예젠잉이 단장으로 있던 4군 교도단과 주문옹이 지휘하고 있던 노동자 적위대, 4군 경위단 등 6천명의 공산당 계열 부대들이 광동성위원회 서기 장타이레이의 사주를 받고 폭동을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다. 이를 알게 된 장파쿠이는 황급히 황기상의 부대를 불러들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저우 폭동을 진압했다. 봉기가 실패한 장파쿠이는 하야를 통전하고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고 장파쿠이와 밀접한 관계였던 왕징웨이도 장황사변과 광저우 폭동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입지가 좁아져서 사직 후 프랑스로 외유를 떠나야 했다.

2.3. 반장전쟁

1929년 1차 장계전쟁이 일어나자 장제스 지지를 통전, 이 덕택에 4사단장에 임명되어 복직하여 호남성에서 광서군을 소탕한 후 호남에 주둔했다. 하지만 1차 장풍전쟁에서 농해철도 수비 명령을 받고 이를 거부하며 개조파의 반장 주장에 호응, 9월 17일 3전대회의 불법성과 난징 정부의 부패를 비난하며 반장을 통전하여 계계군벌의 잔여세력과 합작, 2차 장계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천지탕의 공격에 패했고 이에 탕성즈와 연대하여 장당전쟁을 일으켰지만 탕성즈와 사이좋게 토벌당했다. 1930년 중원대전이 일어나자 북평국민정부의 제1로군 지휘관 겸 4군 군장에 임명되어 근성있게 장제스 토벌을 통전하고 리한훈, 쉐웨를 거느려 장제스에 맞섰으나 또 참패했다.

1931년 탕산 사건을 빌미로 반장파들이 결집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차 양광사변을 일으키자 또 다시 참가하여 4집단군에 소속되어 허젠이 수비하는 호남 공략을 맡았다. 이때 왕징웨이를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9월 18일에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난징 국민정부와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통합했다. 1932년 1월 쑨커를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이 들어섰으나 경제위기와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달만에 퇴갤했고 1932년 1월 왕징웨이를 행정원장으로, 장제스를 군사위원장으로 하는 장왕합작 내각이 출범하였다.

이후 1936년 초공작전에 참여하여 절강, 강서, 안휘, 복건의 공산당 토벌을 맡았다.

2.4. 중일전쟁

파일:1938년장발규.jpg
1938년의 장파쿠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하자 8월 13일 심야, 8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일본군에 맞섰고 3전구 우익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8,10집단군을 이끌고 상하이 수비를 맡았다. 이후 9전구 2병단 총사령으로 항전에 임하다가 광저우 함락 이후 위한머우를 대신하여 광저우 수정주임 겸 4전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유명한 반장파였다는 점에서 장제스에 맞서 일본이 신정권을 수립한다면 사천의 판원화, 운남의 룽윈과 함께 이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 공작에 넘어간 왕징웨이로부터 왕징웨이 정권에 합류할 것을 권했으나 거절했다.[2] 이후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적극적으로 실시했으며 1939년 동계공세작전 직전 일본군의 역습으로 난닝을 잃고 참패를 당해서 4전구 사령관에서 사직하고자 했으나 장제스의 만류로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1939년 동계공세작전에 참여하여 일본군에 대한 유격전을 시행했다.

이후 6전구 사령관도 겸했으나 1944년 대륙타통작전이 일어나자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맞섰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참패했다. 1945년 5월 26일, 일본군에 대한 반격을 실시하여 난닝을 점령했고 8월에 승전을 맞이하여 광저우에서 화남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일본군 항복 이후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무력으로 회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11월부터 12월 사이 군대를 출동하여 마카오를 포위하고 마카오 내부의 소요를 종용했으나 마카오 식민당국이 반포르투갈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영국을 통해 중재를 요청하자[3] 마카오 포위를 풀수 밖에 없었다.

2.5. 국공내전과 그 이후

종전 이후 1946년 광저우 행영주임이 되었으며 광서성에서 베트남 국민당을 지원하여 인도차이나 전쟁에 개입했다. 1947년 총통부 전략위원회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홍콩을 해방시킨 공을 인정받아 영국정부로부터 대영제국 훈장 1등급을 수여받았다. 1949년 1월 21일 하이난 특별구행정장관에, 1949년 3월 중화민국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1949년 중화민국이 몰락에 이르자 7월 모든 공직을 사직하고 영국령 홍콩에 망명하여 그곳에 은거했고 숭정총회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객가인들의 회합을 주선했다. 1952년 구멍위, 장궈타오 등 홍콩에 거주하던 저명한 정치가들과 중국자유민주전투동맹을 창설했다.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모두 그에게 서로 합류를 권했으나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았다. 1972년 쌍십절 기념행사에 참여하여 장제스장징궈와 회견했으나 전체적으론 중립을 지켰다. 1980년 홍콩 양화의원(養和醫院)에서 병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역시 객가인이었던 예젠잉[4], 중화민국에서는 장징궈가 조의를 표했다.

3. 매체에서

파일:건군대업장발규.jpg
영화 건군대업에 나온 장파쿠이. 배우 여애뢰(余皚磊)가 분했다.

카이저라이히의 국민당 좌파 팩션에서 육군 3성 원수로 등장한다.

4. 참고문헌

4.1. 저서

4.2. 논문

5. 관련문서



[1] 중국 공산당의 공식 주장에 따르면, 장궈타오는 끝까지 장파쿠이의 동의를 얻을 것을 주장.[2] 룽윈과 판원화 역시 거절했다. 사실 애초에 왕징웨이 정권에 붙은 군벌이 없었다. 장제스 하면 이를 갈던 반장파 군벌들도 장제스 제거를 일본 제국 타도보다 우선으로 두는 미친 짓은 안 했다.[3] 포르투갈 당국은 마카오에서 중국 국민당의 공개 활동을 합법화해주겠다는 유화책을 제시했다.[4] 예젠잉은 국민혁명 시기 장파쿠이의 참모장을 지낸 전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