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도빌 공방전 | |
콩고 내전과 냉전의 일부 | |
날짜 | |
1961년 9월 13일 ~ 9월 17일 | |
장소 | |
콩고 카탕가 주 자도빌[1] | |
이유 | |
콩고 정부에 반하여 독립을 선언한 카탕카국이 콩고 정부에 대한 봉기 목적과 모토르 작전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군대를 이끌고 유엔 평화유지군의 전진기지를 공격 | |
교전국 | |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아일랜드군 | 카탕가국 |
지휘관 | |
팻 퀸란 소령 노엘 캐리 중위 | 로제 풀크[2] 앙리 라지모네 용병 사령관 미셸 드 클라이 용병 사령관 |
결과 | |
카탕가국의 승리 | |
영향 | |
유엔 평화유지군의 활동 위축 이후 콩고 정부군과 유엔 평화유지군의 합동 공격으로 카탕가국 멸망 | |
병력 | |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아일랜드 평화유지군 158명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아일랜드군, 인도군, 스웨덴군 500명 지원 시도[3] | 카탕가 반군 및 프랑스, 벨기에, 로디지아 등 다국적 용병부대 3,000명 푸가 CM.170 마지스테르 훈련기[4] |
피해 | |
유엔 평화유지군 - 3명 전사[5] 13명 부상 158명 포로 | 카탕가 반군 및 용병부대 - 300여 명 전사 1,000여 명 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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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콩고 내전에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처음 파병된 아일랜드군 158명이 1961년 9월 13일 카탕가 반군과 프랑스, 벨기에, 로디지아 용병 3000명과 맞서 싸운 전투다.2. 전개
자도빌에 있던 신콜로베 우라늄 광산은 맨해튼 프로젝트 보고서에도 나오는 세계 유수의 우라늄 광산으로 여기서 나온 우라늄을 가지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쓰인 폭탄을 만들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이러한 콩고의 풍요로운 자원은 열강들의 군침거리였다.
이후 콩고 내전이 발발하여 소련 등의 지원을 받던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와 벨기에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권의 지원을 받던 촘베,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카사부부 대통령간의 삼파전으로 번졌다.
특히 카탕가 주지사였던 촘베는 1960년 독립을 선포하고 콩고 정부와 전쟁을 결의했다. 그는 프랑스, 벨기에, 로디지아 백인 용병단을 대거 고용하고 주 병사들을 동원하여 콩고 정부와 싸웠다. 한편 카사부부와 루뭄바의 갈등은 심해젔고 카사부부와 촘베는 모부투 세세 세코를 사주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루뭄바를 체포했다. 이후 루뭄바는 촘베에게 보내저 휘하의 벨기에 용병에 처형된다.
한편 유엔 평화유지군은 주력이었던 인도군의 계획에 따라 모토르 작전[6]이란 공세 작전을 입안하여 카탕가 주의 백인 용병단과 카탕가 반군을 제압하려고 했다.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카탕가의 수도였던 엘리자베스빌을 공략하던 중에 저항하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터져 유엔은 난처한 입장에 처했고 촘베는 보복을 엄명했다.[7]
한편 카탕가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유엔군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는데 자도빌에 도착한 유엔 평화유지군은 원주민들의 박대를 받았다. 그들이 말이 평화유지군이지 실상 콩고 정부군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산 마을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카탕가 원주민들에겐 사실상 열강이 병력을 보내 광산 자원을 뺏어간다고 여겨졌다.
35대대 A중대의 아일랜드군은 대민지원을 예상하고 파병되었기 때문에 무장이나 방어 장비가 매우 빈약했으며 보급도 형편없었는데 식수를 석유용 드럼통에 담아 보급해 줘 거의 마실 수 없었고 탄약도 부족했다.[8]
아일랜드군 파병 1년 전에 파병된 아일랜드, 스웨덴, 인도 구르카 병력들이 인근의 카미나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자도빌의 아일랜드군에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엔군 본부가 있던 엘리자베스빌은 너무 멀었고 유엔군 주력은 모토르 작전에 정신이 없었다. 자도빌의 아일랜드군은 고립되어 사실상 좋은 표적이 되었다.
3. 전투
1961년 9월 13일 오전 7시 14분 아침 미사가 한창이었을 때 카탕가 반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미리 파 놓은 참호와 방어 시설에서 격렬한 총격전 끝에 1파를 격퇴했지만 이후 600명 규모의 2파, 3파가 계속 들이닥쳤다.반군은 말이 반군이지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는데 무장 수준이 아일랜드군보다 훨씬 좋았고 81mm 박격포와 프랑스제 75mm 야포, 다수의 중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지휘 수준도 좋았는데 반군의 사령관 로제 풀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이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에 참전하여 놀라운 활약을 펼친 베테랑 군인이었다.
그는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군 대령으로 있으면서 외인부대 사령관으로도 활약했다. 프랑스인, 벨기에인, 영국계 로디지아인이 주축이었던 1000여명 백인 용병단은 카탕가 반군의 주력이었으며 사실상 프랑스-벨기에 정규군의 훈련도를 가지고 있었다.[9]
콩고 내전에는 상술했듯 로디지아 출신 백인[10] 용병단들도 대거 참가했는데 자도빌 전투에도 상당수가 참전했다. 이들의 지휘 아래 카탕가 군은 격렬한 포격과 중기관총을 쏟아내면서 아일랜드군을 압박했다.
한편 퀸란 소령의 아일랜드군은 전투 경험은 전혀 없고 무장도 빅커스 기관총, 브렌 경기관총과 리-엔필드, L1A1 SLR소총, 칼 구스타프 m/45 기관단총 정도로 빈약했지만 그야말로 용전분투했는데 적의 81mm 박격포와 야포 사격을 61mm 박격포로 대포병사격을 해서 분쇄했고 미리 치밀하게 짜둔 참호와 방어시설에서 격렬한 총격전과 막사시설 옥상에 배치해둔 저격수들의 교묘한 저격을 퍼부어서 밀고 들어오는 카탕가군을 격파했다.
수 일 후 포위된 아일랜드군은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보냈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총알이 소모될 때까지 버틸 것이다. 위스키를 좀 마셔도 될 것 같은데."
아일랜드군의 사격은 정확하고 효과적이었으며 용병단 장교들이 아일랜드군에게 밀려 패주하는 카탕가 반군을 막기 위해 헌병대에게 사격을 가하라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한편 지원 요청을 받은 카미나의 유엔군은 수차례 자도빌의 포위된 병력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으나 모두 백인 용병단에게 가로막혀 번번히 도움을 주지 못했다. 루피라 다리에서 벌어진 프랑스-벨기에 용병단의 거센 공격으로 인도군 구르카 병력들 3명이 전사하고 아일랜드 유엔군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그들은 허겁지겁 철수 했다.
자도빌의 아일랜드군은 이때까지 전사자는 한명도 없고 부상자만 5명 정도였다. 반면 카탕가군은 용병 30명을 포함해서 300명이 전사한 상태였다. 용병단 사령관 로제 풀크는 명예로운 항복을 권했으나 퀸란 소령은 거절했다. 그러나 아일랜드군을 괴롭힌 식수 문제와 보급 부족은 점점 아일랜드군의 형편을 어렵게 했다.
이때 반군은 아일랜드군이 상상하지 못한 신무기를 동원했는데 바로 푸가 마지스테르 제트 훈련기 였다. 1대 밖에 없었고 훈련기라서 무장도 빈약하고 성능도 엄청난 건 아니었지만 대공화력이 전무한 자도빌의 아일랜드군에겐 치명타였다. 푸가기가 폭탄과 기총 사격을 퍼부어서 부상자들이 크게 나왔다. 그들을 실어나르려던 헬리콥터도 피탄되어 철수했고[11] 수송용 자동차도 파괴되었다.
전투기가 공중폭격을 퍼붓자 아일랜드군은 크게 당황하고 사기는 급전직하했으나 이내 격렬한 대공사격으로 전투기의 공중폭격을 방해했다. 그러나 계속된 지원요청도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식수와 탄약마저 떨어지자 결국 퀸란 소령은 로제 풀크의 두번째 항복제의를 심사숙고 끝에 받아들였다.
158명이 모두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일시 억류되었다가 촘베와 유엔의 협상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4. 이후
자도빌 전투에 참가한 35대대 A중대 아일랜드군은 그야말로 용전분투하여 압도적인 전력의 다수의 적을 상대로 큰 전과를 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항복해서 패전하자 아일랜드군은 그들의 활약상을 은폐했다. 서방 열강들 역시 모토르 작전에서 자기들의 치부가 노출될까봐 자도빌의 아일랜드군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국으로 돌아온 A중대 병사들은 자도빌의 바보들(Jadotville Jack)로 불리면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퀸란 소령은 그들에게 훈장을 줄 것을 제안했으나 묵살당했다.
이후 퀸란 소령은 아일랜드군에서 대령까지 승진했으나 자도빌의 오명은 그가 1997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 따라다녔다. 로제 풀크는 그야말로 전쟁이 천직이었는지 이후에도 계속된 각지의 분쟁과 내전에 참가했다. 예멘, 나이지리아 등지에서 용병 활동을 했고 북예멘에서는 MI6를 지원했다. 수많은 작전으로 명성을 쌓아 올려 천 개의 목숨을 가진 사나이로 불리는 등 프랑스 외인부대의 살아있는 전설 취급을 받다가 2011년 프랑스 니스에서 자연사했다.
촘베는 승전했으나 이후 스웨덴 유엔 평화유지군이 사브 29 툰난을 대거 반입하여 푸가 마지스테르 훈련기를 격추시키고 콩고군과 합세하여 계속 공세하여 결국 항복하였고 카탕가국도 패망하여 콩고 정부에 다시 병합되었다. 이후 그는 스페인으로 망명 갔으나 1964년 연합정부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다시 콩고로 복귀하여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친외세적인 정책을 펼치고 부패하여 결국 카사부부 대통령에게 해임되었다.
1965년 서방의 지원을 받은 모부투 세세 세코가 쿠데타를 일으켜 카사부부를 축출하고 촘베는 다시 스페인으로 망명하였다. 1967년 프랑스 정보부 DGSE의 전신인 SDECE에게 납치되어 알제리로 끌려갔고[12] 감옥에 갇혔다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196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일랜드군 참전용사들은 지속적인 명예 회복 투쟁을 벌인 끝에 2005년 아일랜드 정부가 처음으로 이들의 공로를 인정했고 퀸란 소령의 명예도 회복되었으며 2006년에는 전원에게 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영화 자도빌 포위작전이 개봉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 현재 리카시로 개명[2] 르네 풀크라고도 불린다.[3] 외곽에서 자도빌 전투를 지원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 카탕가군 측 CAS(근접항공지원) 기체[5] 인도군[6] 힌디어로 '때려 잡는다'는 뜻이다.[7] 이후 콩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촘베와 협상하려던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카탕가 주 백인 용병이 몰던 전투기에 격추되어 사망했다.[8] 유엔군의 첫 해외파병이었다 보니 모든 게 어설프고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헬멧도 평시에 군사경찰들이 쓰는 것과 같은 플라스틱이라 방호력이 전혀 없어 자도빌 전투 당시 전투원들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싸웠다. 하필 눈에 띄기 좋은 하늘색이라 오히려 표적만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제대로 된 방탄모에 하늘색 UN 외피를 씌우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9] 지휘관을 비롯한 고참들은 2차대전 참전 경력자들이었으며 2차대전 참전 경력이 없는 젊은 용병들도 다들 한 번 이상 실전을 겪어 본 인원들이었기 때문이다.[10] 이들은 19세기 말 로디지아에 정착한 영국인 농부들의 후손들로, 흑인들의 공격을 받아 땅을 빼앗기거나 가족을 잃고 용병이 된 케이스가 많았다.[11] 영화에선 추락으로 나오지만 실제론 피탄되어 철수했다.[12] 그동안 촘베를 지원하던 프랑스가 뒷통수를 친 이유는 1967년에 카탕가주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서방은 미국을 중심으로 모부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콩고의 분열을 바라지 않았던 서방 열강은 반란의 구심점이었던 촘베를 그냥 팽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