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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8:35:17

인류관 사건

1. 개요2. 제국주의와 박람회3. 오사카권업박람회의 의의4. 반발과 적극적인 전시 참여

1. 개요

人類館事件/「学術人類館事件」
1903년 오사카 텐노지에서 열린 제5회 내국권업박람회에서 아이누족, 고산족, 오키나와인, 조선인(대한제국), 중국인(청나라), 인도인, 자바인, 터키인, 아프리카인 등 총 32명의 사람들을 전시시키는 인류학술관을 열어 문제가 된 사건이다.

2. 제국주의와 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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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와 동시에 화려하게 시작된 전 국가가 모인 만국박람회는 각 나라의 자랑거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국이 개척한 식민지의 물품들을 자랑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엔 그 나라의 원주민들도 해당되었다.

인종 그 자체를 목적으로 전시가 박람회에 등장한 것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부터이다. 하지만 그 이전 만국박람회에서는 자국인을 전시품으로 한 곳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일본이 그랬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전시역을 맡은 게이샤에게 첫눈에 반한 청년이 프로포즈를 신청하거나, 기모노를 양보해 달라고 부탁한 여성의 존재 기록도 있었다.

3. 오사카권업박람회의 의의

메이지 시대, 다양한 문물·제도가 서구에서 이입되었지만, 박람회라는 행사도 그 중 하나였다. 국제박람회 참가 자체는 에도 막부 말기부터 시작되었지만, 메이지 시대가 되면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활발히 '내국권업박람회'라는 것이 개최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서구 문명의 문물·기술의 소개와 습득, 그리고 그 노력의 장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산업에 대한 투자를 모집하는 산업진흥이 목적이었다.

일본제국이 아시아로 확장하는 가운데 열린 오사카 박람회는, 지금까지의 박람회의 내용이나 전시 방식과는 차별화된 것이었다. 기존 만국박람회에서 채택되었던 제국주의의 식민주의적인 전시 방식, 즉 식민자가 현지인을 차별적으로 주시하는 전시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한 박람회가 되었다.

'인종 전시'는 민간업자가 주최하는 학술 인류관이라는 파빌리온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학술 인류관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풍속화보' 269호(1903년)

내륙에 가까운 인종을 모아, 그 풍속, 기구, 생활의 모습 등을 실제로 보여주는 취향으로, 홋카이도의 아이누 5명, 대만 생번4명, 류큐 2명, 조선 2명, 지나인 3명, 인도인 3명, 동 기린 인종 7명, 자바 3명, 벵골인 1명, 터키인 한 명, 아프리카인 한 명, 사정 32명의 남녀가, 각 그 나라의 주소를 본뜬 일정한 구역 내에 단합하면서, 일상의 기거 동작을 보는 것(이후, 오사카 아사히 신문 '박람회 부록 장외 여흥'과 거의 같은 내용)

■오사카 아사히 신문 '박람회 부록 장외 여흥'(1903년 3월 1일)
○ 인류관 비스듬히 정문을 향해 그 건물 있음. 준비의 사정으로 개관은 오는 5일경이 되도록 야간 개관은 미정이라고 하면 당분간은 낮에만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내륙에 가까운 인종 간을 모아 그 풍속, 기구, 생활의 모습 등을 실제로 보여주는 취향으로 홋카이도 아이누족 5명, 대만 고산족 4명, 류큐인 2명, 조선인 2명, 중국인 3명, 인도인 3명, 자바인 1명, 벵골인 1명, 사정 21명의 남녀가 각 그 나라의 주소에 만지는 일정한 구획 내에 단란하게 일상적으로 기거동작을 볼 수 있다. 또한 장내별로 무대와 같은 것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교체하는 〳〵 자국의 가무음곡을 연주할 수 있는 이유로 관객 입장의 입구는 앞쪽에 있고 출구는 뒤쪽에 있다. 통권은 보통 10센, 특등 30센으로 하고 특등에는 토인 등의 사진 및 별석에서 옅은 갈색을 제시한다는 것.
한편 대만관은, 극채색의 루문 및 익루를 가진 건축물이며, 그 중에는 대만에 관한 15부문(농업·원예부터 풍속까지)의 전시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이미 9년이 경과했던 대만의 실정을 내외에 알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대만관은, 그 후의 박람회에서도 항상 설치되게 되었고, 또한 식민지의 확대와 함께 증설되어 간 사하라관이나 만주관·척식관·조선관 같은 '식민지 파빌리온'의 모델이 되었다.

4. 반발과 적극적인 전시 참여

당시 일본은, 철도나 선박의 정비에 의해 국내 이동이 촉진되면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람회를 관람하러 오게 되었다. 게다가, 청일전쟁 이후에 일어난 일본 유학 붐으로 인해, 청나라나 조선 등에서 일본에 온 많은 사람들이 입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전시물에 대해 솔직하게 찬탄하고, 메이지 유신의 성과를 인정했다. 그러나 학술 인류관 운영에 청나라와 오키나와가 반발해, 외교 문제화되었다. 반대로, 후술한 아이누처럼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오키나와현이나 청나라가 자국민 전시에 항의하는 게 반인종차별적 목적이었다면 그건 아닌 게, 자국민이 타 인종과 같이 전시되는 걸 굴욕적으로 생각하여 항의했던 것이지, 결코 인종차별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