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갑성(甲成) |
본관 | 교동 인씨[1] |
출생 | 1894년 9월 16일 |
황해도 봉산군 감당면 녹탄동[2][3] (現 황해북도 린산군 동사리·석련리) | |
사망 | 1960년 7월 17일[4] (향년 65세) |
묘소 | 대전광역시 서구 갈마동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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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4년 9월 16일 황해도 봉산군 감당면 녹탄동(現 황해북도 린산군 동사리·석련리)에서 아버지 인월황(印月璜, 1871. 4. 13 ~ ?)[5]과 어머니 배천 조씨(白川 趙氏, 1864. 8. 5 ~ ?)[6]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어려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어느 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세웠다. 그러다가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연해주로 건너가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국제정세를 주시하던 중, 조선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에서 활동할 뜻을 세우고 1920년에 귀국하였다.
귀향 후 그는 고향인 황해도 평산군에서 평산청년회(平山靑年會)를 주도하여 조직하였고, 1920년 12월 2일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결성될 때 평산청년회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여, 주기철 등과 함께 의사부(議事部) 임원에 선출되었다. 조선청년회연합회는 비록 일제의 허가를 받아 창립된 합법적인 등록단체였지만, 창립 당시 전국 각지에서 116개 청년단체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3.1 운동 이후 분산된 청년단체의 역량을 결집시켜 민족의식을 제고하고 청년운동을 대중화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이같은 청년회를 중심으로 표면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면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연통부(聯通府)의 평산군 군감부(郡監府) 산하 면사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7월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으로 세워진 연통부는 독립운동자금모집 및 임시정부의 선전, 민족의식의 고취, 독립운동세력의 규합 등을 주요 활동지침으로 정하였다. 이렇게 연통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연통부의 조직이 발각되는 것과 더불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21년 10월 11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2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12월 출옥 후 그는 무장투쟁에 투신하고자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하였다. 러시아 군대에서 훈련을 수료한 뒤 1924년 5월 31일 중국 관내로 건너갔으며, 윈난성 쿤밍시 윈난부성(雲南府城) 사묘가(士廟街) 15호 생활미술사에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남사관학교(雲南士官學校)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고 하사에 임관했다.# 그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대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1943년 장교로 광둥성에서 활동 중, 일본 제국 육군 특무대에 붙잡혀 국내로 이송되어 연금생활을 하였다.
연금생활을 지속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에 임관되어 1952년 초대 충남병사구 사령부 사령관(現 대전충남지방병무청장)을 지내고 이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60년 7월 17일에 죽었다.
사후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