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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19:29:55

이호민

파일:전주고 투수 이호민.png
<colbgcolor=#eb1c24><colcolor=#fff>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No.1
이호민
출생 2006년 8월 28일 ([age(2006-08-28)]세)
전라남도 강진군 신전면[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나주북초(해남군리틀)[2] - 이평중[3] - 전주고
신체 184cm, 85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2025년 2라운드 (전체 15번, 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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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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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소속 우완 투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전주고 시절 정우주와 더불어 원투펀치로 활약했다. 정우주에 비하면 많이 안 알려졌지만 실질적인 전주고의 에이스 투수였다.

제79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준결승에 선발 등판해 4⅓이닝을 던졌고, 마운드를 이어받은 정우주가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고 2사 만루가 된 상황에서 다시 등판해 이닝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전주고가 강릉고에 1점 앞서있던 8회초 2사 1,2루에 또다시 등판해 이닝을 막았고 9회까지 삼자범퇴로 끝내며 승리를 이끌었다. 투구수가 60개가 넘어가 결승전에는 등판하지 못했지만 이호민의 호투 덕에 전주고는 결승에 진출했고,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신세계 이마트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해 8이닝 105구 6피안타 2사사구 12탈삼진 1실점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3학년 최종 성적은 23경기 73이닝 5승 0패 ERA 1.36 90탈삼진 19볼넷 WHIP 0.96을 기록했다.

이러한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면서 청소년대표에 승선했다. 청소년대표 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평가가 상승하게 되었다.

2.2. KIA 타이거즈

파일:2025 기아 2라운드 투수 이호민.png

지난 활약 덕분에 평가가 올라가면서 3~4라운드에 뽑힐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KIA 타이거즈의 2라운드 선택을 받았다.[4][5]

2.3. 국가대표 경력

2.3.1. 제13회 BFA 야구 청소년 선수권대회

같은 팀 1라운드로 지명된 김태형, 3라운드에 지명된 박재현과 함께 선발되었다.

필리핀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1이닝 3탈삼진으로 삼자범퇴를 기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최고 구속 147km/h, 평균 구속은 140km/h대 초반으로 구속은 높지 않지만 섬세한 제구력[6]을 바탕으로 한 탈삼진 능력, 경기 운영 능력, 변화구 구사 능력이 고루 뛰어나다. 구사 가능한 구종은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으로 특히 체인지업은 낙차가 크고 빨라 완성도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100구 이상 던져도 투구 내용이 안정적일 만큼 스태미너 역시 좋아, 추후 증속만 제대로 된다면 롱릴리프 내지는 선발 자원으로서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4. 여담



[1] 두산 베어스 감독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과 같은 고향이다.[2] 강진북초에서 전학[3] 화순중에서 전학.[4] 오히려 구단 내에서는 이호민이 더 앞에서 뽑힐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KIA 순번까지 내려오자 망설임 없이 뽑았다고.[5] 전상일 기자는 이호민과 박건우를 2라운드 다크호스로 평가했다. 실제로 이호민은 2라운드 KIA로 박건우는 2라운드 KT로 갔다.[6] 이호민의 공을 자주 받았던 전주고 포수 이한림이 말하기를 공 한 개, 한 개 반, 두 개 등 이런 식으로 뺄 수 있을 정도로 자기가 던지고 싶은 곳에 던질 줄 안다고 한다. 이러한 손감각 덕분에 ABS 시대에 잘 맞는 투수일 것으로 평가받았다.[7] 전주고 진학 문제 때문에 이호민이 이평중으로 전학을 가 졸업까지 함께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