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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6 15:05:32

이을진


이을진
李乙珍
본관 장수 이씨
출생 1331(충혜왕 원년)
사망 1400년(정종 원년) 5월 13일
부모 아버지 이길상(李吉祥) 어머니 군부인(郡夫人) 담양 설씨(潭陽 薛氏)
부인 홍천 용씨 용지우(龍之雨)의 장녀
자식 장남이종화(李從華) (1353 ~ 1414)
장남 양후공(襄厚公) 이종무 (1360 ~ 1425)
봉호 통산군(通山君)
시호 무정공(武靖公)
추증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1]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이을진은 고려말에 활동한 장수로서 여러 공을 세웠지만 우왕의 사주를 받고 이성계를 죽이려한 김저의 옥사로 한순간에 몰락하였다. 장수 이씨의 중시조이기도 하다.

2. 생애

1331년에 문하시중 군기시윤(軍器寺尹)을 역임한 이길상(李吉祥)과 군부인(郡夫人) 담양 설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수 이씨 시조 이임간(李林幹)의 증손이자 이원만(李元萬)의 장손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관직생활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379년 9월에 충주단양도병마사(忠州丹陽道兵馬使)로 임명되어 왜구들의 침입을 대비했다.

1353년에 장남 이종화(李從華)를, 1360년에는 차남 이종무(李從茂)를 낳았고 1381년에는 21세의 이종무를 이끌고 강원도 바다에서 도적들을 토벌하였고 동년 4월에는 왜구가 지리산에서 도망쳐 무등산로 들어가서는 규봉사(圭峯寺) 암석 사이에 목책을 세웠는데, 3면이 깎아지른 절벽인데다 벼랑을 따라 좁은 길 하나만 나 있어 겨우 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당시 이을진은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였는데 죽음을 무릅쓰는 결사대 100인을 모집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돌을 굴리고 불화살로 그 목책을 불태우는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왜구가 수세에 몰리자 벼랑으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고 남은 왜구들은 바다로 도망가 작은 배를 훔쳐서 달아났는데, 前 소윤(少尹) 나공언(羅公彦)이 쾌선(快船)으로 추격하여 모두 죽이고 13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381년 10월에 왜구가 반남현을 노략질하니, 원수(元帥) 지용기(池勇奇)와 함께 전투를 벌여 물리치고 배 1척을 잡아서 불태웠으며 9명의 목을 베었다. 적병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고 전한다.

1383년 9월에는 지문하사(知門下事)에서 강릉도원수(江陵道元帥)로 임명되었고 왜구가 홍천현을 함락시키자,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과 함께 왜구와 싸워서 5급을 베었다. 뒤이어 동년 10월에는 부원수(副元帥) 권현룡, 병마사(兵馬使) 곽충보와 함께 동산현에서 왜구를 공격하여 20여 급을 베고, 말 72필을 획득하는 등의 공을 세웠고 적들은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고성포(高城浦)로 물러나 정박하였다. 또 이을진은 진무(鎭撫) 김광미(金光美)를 보내 우왕에게 전리품을 바쳤는데 우왕이 이을진과 권현룡, 곽충보에게는 백금(白金) 각 50냥을, 전력을 다해 싸운 군인 3인에게는 은사발 각 1개를, 김광미에게는 말 1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1383년 11월에 고성포에 물러나 정박하고 있었던 왜구들이 낮에는 배를 타고 있다가 밤에는 해안으로 올라와 약탈을 일삼자 이 때문에 이을진은 우왕에게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385년 9월에는 다시 강릉도원수로 임명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387년 9월에 양구현 사람인 양부(楊富)의 딸을 간음하려고 졸병 10여 인을 이끌고 양부의 집을 포위했으나 잡지 못했고 결국 양부의 처를 강간하였다. 당시 양부는 죽은 지 100일이 못 되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사헌부에서는 이을진을 탄핵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장 100대를 때린 뒤 회덕현으로 유배 보냈다. 《고려사》에서는 이을진은 강릉에 있을 때 남의 집 딸을 데려다 첩으로 삼았는데, 그 휘하의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아 군사를 데리고 마을을 뒤져서 다른 사람의 딸을 강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강간사건이 일어나고 3년이 지난 1388년 4월에는 최영이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에 임명되고 조민수가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가 되었으며 이성계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었는데 이때 이을진은 팔도도통사 조전원수(八道都統使 助戰元帥)에 임명되었다. 그렇게 이성계 휘하로 들어가 최영을 보좌하여 제2차 요동정벌에 참전하였고 결국 동년 5월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우왕을 폐위시켰다.

1389년 11월에 최영의 생질 前 대호군(大護軍) 김저, 최영의 친족 前 부령(副令) 정득후가 몰래 우왕을 알현하여 이성계 암살을 모의했고 곽충보가 모의에 응하는 척 이성계한테 모두 알려 김저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국문하여 내응한 자들을 모두 체포하는 과정에서 이을진도 함께 잡혀오게 된다. 결국 1389년 11월 22일에 김저가 옥중에서 갑자기 죽으면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정지·이거인(李居仁), 前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유혜손(柳惠孫)·前 밀직(密直) 이유인(李惟仁)·유번(柳蕃)·조호(趙瑚)·안주(安柱) 등 27인과 함께 유배 보내졌고 그렇게 이을진은 여러차례 국문을 당하고 유배를 갔으며 왕의 생일에 사면하는 과정에서도 이림(李琳)·이색·조민수·권근·이숭인 등과 함께 사면되지 않았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가 즉위교서에서 이을진의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으로 보내라고 하여 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8년간 어떠한 행적도 없다가 1400년 5월 13일에 향년 69세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무정공(武靖公)[2]이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 아양곡(峨洋谷)에 을좌했다고 전하나 실전되었다.

3. 기타

김저의 옥사 당시 변안열의 심복(心服)[3]이었다.

1964년 이전《장수이씨세보》혹은 이삼로가 작성한 《고산실기》등에서는 3세 이길상과 4세 이을진의 항렬이 바뀌어져 있었다. 그래서 《국조방목》같은 기록을 보면 5세 이종화의 아버지가 3세 이길상으로 나오는 등의 오류가 있었지만 1998년 《장수이씨대동보》 기준으로 이것이 수정되었다.

공민왕 때 정승을 지냈다는 《장수이씨대동보》의 기록이 있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에 봉해졌었는데 이을진의 처가 홍천 용씨 집안의 족보에서는 장천부원군과 통산군(通山君)이 합쳐져서 통산부원군(通山府院君)으로 이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1] 순충적덕보조공신은 조선시대 때 2등공신의 아버지에게 내려지는 공신호이다. 이을진은 차남 이종무가 4등 구충대좌명공신(救忠戴佐命功臣)이 되었기 때문에 공신호가 없어야 되지만 《장수이씨족보》에서는 순충적덕보조공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 《장수이씨족보》의 기록이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나오지 않는다.[3] 믿고 맡길 수 있는, 즉 충성스러운 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