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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20:42:15

이스탄불 더비

파일:갈라타사라이 SK 로고.svg
파일:페네르바흐체 SK 로고.svg
갈라타사라이 SK
Galatasaray S. K.
페네르바흐체 SK
Fenerbahçe S. K.
크탈라르아라스 데르비 (Kıtalararası Derbi)[1]

1. 개요2. 유래3. 사건 사고4. 다른 종목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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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소속으로 이스탄불을 연고지로 둔 갈라타사라이 SK페네르바체 SK가 벌이는 더비 매치를 뜻한다. 베식타스 JK파티흐 카라귐뤼크 SK도 이스탄불 팀이긴 하지만, 보통 저 두 팀 간의 대결을 말한다.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최대의 더비 매치로 이름이 높다.

정식 명칭은 크탈라르아라스 데르비(Kıtalararası Derbi), 즉 대륙 간 더비라는 뜻이다. 이스탄불 내의 유럽 대륙 쪽에 연고를 두고 있는 갈라타사라이 SK와 아시아 대륙 쪽에 연고한 페네르바흐체 SK 간의 더비이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이 더비 매치가 만들어진 계기는 후술할 다음 문단에서 설명한다.

첫 경기는 1909년 1월 17일 경기로 갈라타사라이가 2-0으로 이겼으며, 2022년 4월 10일 경기까지 모두 396번 경기를 치렀다. 가장 최근인 2022년 4월 10일에 열린 리그 32차전이자 396번째 경기는 2-0으로 페네르바체가 이겼다. 통산 상대 전적은 382전 149승 124무 125패인 페네르바체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2. 유래

1905년에 창단된 갈라타사라이와 1907년에 창단된 페네르바흐체는 서로 창단 멤버들이 판이하게 달랐다. 갈라타사라이는 주로 오스만 제국 귀족들로 이뤄졌던 반면에 페네르바흐체는 사병 및 하급 장교들로 이뤄진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됐다.[2] 그러다 보니 초창기엔 갈라타사라이가 재정이나 여러 요소에서 앞서면서 페네르바흐체를 압도했다.

일단 공식적인 첫 경기는 1909년 1월 17일 친선 경기였는데 갈라타사라이가 2-0으로 이겼다. 그 뒤로도 갈라타사라이가 7전 전승에 무실점으로 압도하다가, 1914년 1월 4일 8번째 경기에서 페네르바흐체가 4-2로 처음으로 이겼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점수 차가 난 경기는 1911년 2월 12일 경기로 갈라타사라이가 7-0으로 이겼던 경기이며, 페네르바흐체는 2002년 6월 11일 리그 경기에서 6-0으로 이긴 게 가장 크게 이긴 경기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Galatasaray-Fenerbah%C3%A7e_1913-14.jpg
1913~14 시즌 챔피언십에서 경기를 벌이기 전, 양 팀 선수들끼리 모여 찍은 사진.
부유한 귀족 팀과 가난한 군인 팀의 격돌이다 보니 처음부터 감정이 쌓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꼭 그런 건 아니었다.[3] 오히려 이스탄불 리그 시절인 1950년대만 해도 서로 사이 좋게 응원하고 지면 승자에게 격려하는 응원을 보이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리그 1(뒤에 튀르키예 쉬페르리그로 개편)으로 자리를 잡고 차츰 서로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TV란 매체의 등장과 같이 리그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경쟁을 언론과 기업들이 유도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어찌 됐든 엄청나게 뜨거운 반응을 불러오며 팀 내 수익에 엄청나게 영향을 끼쳤다.

다만, 더비 경기라는 것 자체가 대부분 이렇게 '의도는 좋았다'로 시작하긴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차이는 드러나기 마련이고, 나아가 서포터들 자존심 문제 및 온갖 갈등에 결정적으로 돈과 수입 문제가 개입되면서 결국에는 감정 싸움으로 변하며 라이벌전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맨체스터 더비도 처음에는 사이 좋게 웃으며 경기를 하던 관계였다. 세계 각지 스포츠 더비들 상당수가 비슷한 역사를 거쳤다.

3. 사건 사고

2013년 5월 12일에 열린 374번째 더비 경기 직후, 집으로 돌아가던 페네르바흐체 팬이자 20세 청년이었던 부락 이을드름 군이 갈라타사라이 팬이었던 유수프 O.[4]라는 사람과 시비가 붙어 몸싸움을 벌이다 칼에 맞아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용의자 유수프는 사건 발생 이틀 후에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이스탄불의 섬유 공장에서 일하는 전과 3범(폭행 치상 등) 노동자로 드러났다.

경찰 조사에서 10여 명의 페네르바흐체 팬과 시비가 붙어 몰매를 맞던 중 정당방위 차원에서 휘두른 칼이 이을드름 군을 찌르게 되었고, 상대를 죽일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 이후로 튀르키예 축구계 전반에 걸쳐 자성하는 분위기가 일어나면서 응원 문화 개선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베식타스 JK 서포터들의 9월 경기장 폭동 사태 이후로 없던 얘기라도 된 듯 13-14 시즌 내내 튀르키예 축구계에서 연일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파쏘리그(PASSOLIG)'라는 축구 관람 사전 등록제 겸 실명제까지 도입했으나 크게 개선되지는 않고 있다.
파일:attachment/2013 튀르키예 시위/direnisin_rengi_olmaz.jpg
베식타스 JK, 페네르바흐체 SK, 갈라타사라이 SK서포터가 뭉친 모습. 이스탄불 개매패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저 시기에 게지공원 재개발과 관련하여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때 저 두 팀의 서포터와 베식타스 서포터[5]가 함께 연합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름하여 Istanbul United. 깨알 같은 CHP

4. 다른 종목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흐체는 축구 말고도 농구, 수구, 배구, 조정, 장애인 휠체어 농구, 육상, 승마, 요트, 플레잉 카드 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포츠 팀을 가지고 있기에 이 팀 소속 선수들도 맞붙으면 더비가 일어난다. 이런 점은 유럽의 다른 유명 라이벌들도 마찬가지이다. 단, 대다수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축구를 제외하면 농구가 가장 인기가 많은데, 농구에선 주로 아나돌루 에페스와 페네르바흐체가 경쟁하고 있고 갈라타사라이는 우승권에서 멀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5. 여담

모든 종목을 통틀어 이스탄불 더비를 처음 경험한 대한민국 선수는 배구 선수 김연경으로, 2011-12 시즌부터 2016-17 시즌까지 튀르키예 여자 배구 리그 페네르바흐체에서 뛰며 리그와 각종 컵 대회에서 갈라타사라이와 수차례 맞붙었다. 특히 2016-17 시즌은 리그 결승전이 이스탄불 더비로 치러져 그 열기와 신경전이 관중과 감독, 선수단을 가리지 않고 대단히 뜨거웠으며, 끝내 페네르바흐체가 3연전을 내리 이기면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후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김민재가 2021-22 시즌부터 쉬페르리그 페네르바흐체에서 뛰게 되면서 이스탄불 더비를 경험한 첫 대한민국 축구 선수가 되었다.

마테야 케즈만은 튀르키예에 와서 첫 더비 매치에 출전한 뒤 인터뷰에서 "(오늘 내 경기력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저 살아남은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케즈만은 튀르키예에서 망하고 만다.


[1] The Intercontinental Derby, 대륙간 더비[2] 참고로 베식타스 JK노동자들 위주로 창단됐다.[3] 실제로 초창기부터 계층 갈등이 격화된 사례로는 엘 수페르클라시코영원한 적들의 더비 등이 있다.[4] 튀르키예에서는 언론사에서 범인이나 민감한 개인의 이름을 모자이크 처리할 때 성씨의 첫 글자만 쓰고 나머지는 쓰지 않는 식으로 쓴다. 가령 O이면 성씨가 오잔(Ozan)일 수도 있고, 오스만오을루(Osmanoğlu)일 수도 있다. 튀르키예의 성씨는 수만 가지에 달하기 때문에 저렇게만 써도 익명성이 보장된다.[5] 베식타스도 갈라타사라이, 페네르바흐체와 라이벌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