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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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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투수 조련3. 투수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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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재직하는 동안 2015년 하반기부터 비판받던 부분이 팀의 승승장구와 함께 크나큰 구멍으로 발견되며 더더욱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에 따른 기아팬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2. 투수 조련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로 돌아온 14,15시즌에는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구위와 제구를 잃어가던 심동섭을 리바운딩시키고 구속이 10km 가까이 하락한 임준혁을 컨트롤형 투수로 재탄생시켰다. 또한 용병으로서 부족한 성적이었던 조쉬 스틴슨의 투구폼을 교정해, 그라운드볼러로서의 포텐을 터트리면서 제법 호평을 들었었다.

그러나 이후 스프링캠프 기간동안 이대진에게 투구폼을 교정 받은 투수들이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하거나 성적이 떨어진 경우가 많았기에 팬들의 평가가 갈수록 떨어졌다. 대표적인 투수로는 현재 두산으로 이적한 홍건희. 교정 전 시즌에 있었던 혹사의 여파라기에는 너무나 지나치게 떨어진 구위와 투구패턴 단순화, 투구폼의 변화 등 그에 따른 제대로 된 관리나 문제 조정이 제대로 되지 못해 팬들 사이에서 선수가 망가졌다는 의견이 많았다. 박정수의 경우도 전역 후 마무리 캠프에서 투구폼을 교정했으나, 이후 밸런스가 무너져 해당 시즌 5월에 일찌감치 2군으로 내려가서 올라오지 못했다. 16시즌 전, 투구폼을 교정했던 심동섭, 한승혁도 시즌 초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제대로 투구폼의 정착이 되지 않아 본래 제구가 상당히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이며 성적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한승혁의 경우 이후 시즌에서도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가 유동훈의 조련을 통해 다소 제구력을 잡아 그에 따른 활약을 전반기 막판에 보여주었다가, 1군 복귀 후 점차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패턴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것이 이대진의 투수조련 능력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더욱이 투구폼과 투구패턴의 조언을 받아 수정했던 팻 딘이 17년 시즌 중반 성적이 급락하였고, 원래의 투구폼과 모션을 되찾은 후 8이닝 12K를 기록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이후 한국시리즈까지 좋은 성적을 거둔 모습으로 인해 이대진의 코칭 능력에 팬들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6년 시즌 용병 투수 지크 스프루일 역시 시즌 중반 이대진에게 투구폼 교정을 받고나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해 팬들의 원성을 샀다. [1]

선수보는 안목 역시 팬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부분에는 보증수표가 대표적인 예시. 결국 선발자원이라는 김진우, 홍건희, 김윤동 모두 선발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불펜자원이던 임기영이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면서 이후 선발로 정착하였다. 다만 김윤동의 경우는 혹사의 여파가 크고, 김진우는 선수시절 내내 드러났듯이 멘탈이 한번 안 좋아지면 회복이 굉장히 더딘 타입이라는 변명거리가 있다.

다만 2019년에 박준표, 하준영, 전상현, 문경찬이 각성하면서 막판에 투수조련에 있어 업적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터진 시기가 김기태감독이 사퇴한 이후라 사실 이대진이 키운 투수들이 이것보다 더 있는데, 김기태 감독이 투수운용에 끼친 영향 때문에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다라는 의견도 나오는 중. 이 점은 SSG 랜더스 코치로 가면서 21시즌부터 제대로 밝혀질 듯 하다.

3. 투수 교체

결론만 말하면 김기태 체제에서 투수코치의 교체 권한은 전혀 없었다.[2] 밑의 글은 사실상 추측에 불과한 편이니 그냥 읽고 넘기면 된다.

위의 항목에서 언급한 투수 조련 및 육성의 실패로 인하여 1이닝을 제대로 믿고 막을 수 있는 투수가 이대진 재임 기간 동안 KIA에는 없었다. 그 영향으로 인해 이대진이 코치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 기아는 4월부터 자주 행하는 변칙적인 투수교체, 속칭 이닝 쪼개기가 잦아 많은 비판을 받았다.[3]

그리고 위와 같은 이닝쪼개기 뿐 아니라 그냥 이대진 투수코치는 투수교체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모습을 종종 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7월 20일의 고척돔에서 벌어진 넥센전. 정용운이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좌타인 채태인이 나오자 투수 교체를 감행했는데, 그 상대가 우투수인 한승혁이었다는게 문제. 뒤에 주자가 있을 경우 투구내용이 심각하게 떨어지는건 둘째치고서라도 채태인과의 상대전적이 5할에 다다를 정도로 최악의 선택지였다. 어떤 기준으로 교체를 한 건지 전문가도 일개 팬들도 상당히 의아해했으며, 결국 채태인에게 역전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좌타에게 언더투수를 기용한다던지, 상대전적이 유독 좋지 않은 투수를 박빙에 올린다던지 하는 기용이 잦아 당시 팬들 사이에서는 어지간히 야구 좀 볼 줄 아는 팬을 투수코치에 앉혀도 이대진보다는 상식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거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혹사기질도 있어 당시 김윤동만 해도 혹사 순위권 5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김윤동의 경우에는 초반에 선발로 출장하다가 이대진 본인이 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불펜으로 내린 케이스인데 풀타임도 뛴 적이 없는 선수를 관리는 커녕 무분별하게 등판시키며 특히 1아웃을 막기 위해 지고 있는 경기에도 올린다거나,[4] 자신이 해태시절에나 할만한 롱릴리프 연투를 시키는 등의 문제를 종종 드러냈다. 결국 불확실한 등판으로 정작 필요할 때는 등판을 못시키는 경우도 있어 연패를 끊을 수 있는 상황에서 끊지 못하고 타선에 요행을 기대는 모습도 나타났다.

하지만 2군으로 강등된 이후에 1군 투수진의 교체 및 혹사 문제가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이 이대진의 잘못이 아닌 김기태의 잘못이라고 보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투수코치가 투수진 관련한 전권을 쥐었다 해도 교체에서는 조언을 해줄 수는 있어도 누굴 교체할지 직접 판단하는 것은 감독이기 때문에 이에 미치는 영향이 한계가 있기 때문. 결국 이런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감독의 경기 및 시즌 운용 능력이 가장 큰 문제라 볼 수 있다.[5] 하지만 이대진 역시 이런 상황에서 딱히 할 말은 없는게 5년동안의 투수진 육성 실패로 쓸만한 투수가 몇 명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고, 이들을 계속 등판 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어서 이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2018년 8월 16일 위기상황에 몰린 김윤동을 내리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가려는 본인을 말리는 감독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그간 투수교체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난을 덜 받았던 김기태 감독이 투수운영에 영향을 주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당시 팀 분위기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1] 과거 임기준도 함께 제시가 되었으나, 임기준은 커리어 내내 지속된 부상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2] 사실 이대진이 교체를 지시했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게 당장 기아에서도 19시즌 박흥식 대행 체제같이 코치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선언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코치가 교체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다른 팀도 마찬가지.[3] 당장의 경기에서도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추천할 수 없는 행위. 안타나 볼넷을 내주고 교체되는 투수는 상실감을 느끼고 주자가 있는 상황에 올라오는 투수는 당연히 부담감을 느낀다. 이러한 상황을 반복하게 되면 투수는 최소한의 이닝을 소화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며 위기상황을 겪는 경험이 들쭉날쭉하게 되어 차후 투수 육성에도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투수교체의 문제는 결국 불펜 투수들이 상시대기하게 되며 자신의 컨디션 관리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될 뿐더러, 지속적인 연습피칭으로 인해 피로도가 누적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시즌 중이나 말미에 구위 및 구속저하를 낳게되는 상황을 만들게 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한국시리즈나 플레이오프와 같은 중요한 단기전에서만 사용되는 방식이다.[4] 불펜 투수의 경우는 단순히 몸을 푸는 것만 해도 체력 소모를 많이 하는 편. 그렇기 때문에 현대야구에서는 철저하게 필승조와 추격조로 분업화하여 해당 상황이 아니라면 컨디션 점검의 목적이 아닌 이상 등판을 자제시킨다.[5] 실제로 김기태는 LG 시절에도 투수 혹사 문제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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