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월 21일 ~ 2022년 8월 24일 (향년 90세)
1. 개요
일본의 기업인. 교세라의 창업주이며, 일본항공 JAL 회장을 역임했다.파나소닉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의 혼다 소이치로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경영인 중 한명으로 평가받으며 가장 최근까지 살아있던 경영의 신으로 일컬어진다.
한국에서는 우장춘 박사의 사위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2. 생애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출생이다. 가고시마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후 300만 엔을 빌려 27세의 나이로 교세라의 전신인 교토세라믹을 설립했다(1959년). 다른 회사의 공장 한구석에서 종업원 28명의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교토 세라믹은 독자적인 세라믹 기술을 바탕으로 전자·산업용 종합부품회사로 기반을 굳힌다. 1984년에 이나모리 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교토상을 창설, 매년 인류사회의 진보발전에 공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표창해왔다. 같은 해 통신분야에 뛰어들어 민간 이동통신업체 DDI를 설립한다.[1]65세 때 퇴임 후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됐으나 2010년 일본항공이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부탁으로 77세의 나이로 일본항공(JAL)의 회장으로 취임했다.[2] 이때 파산 상태의 재정을 고려해 무보수를 선언했다. 45개 적자노선을 폐지하고 4발기들을 퇴역시키고[3] 1만여 명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조직을 바꾸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파산 직전의 JAL을 8개월 만에 흑자로 돌려세우고 2년 연속 최고 실적을 낸 후 2013년 3월에 퇴임했다.
이후 교세라의 명예회장직으로 활동을 하다가, 2022년 8월 24일 노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 관련 기사
3. 기타
- 한국인 육농학자인 우장춘 박사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나모리 가즈오가 우장춘 박사의 넷째딸과 결혼했기 때문. 즉 그의 자녀들과 후손들은 전부 한일 혼혈인 셈이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1958년 12월에 결혼을 했는데, 장인인 우장춘 박사는 그 이듬 해에 작고한 터라 오랜 시간 같이 지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한국에 대해 잘 아는 경영인으로 통한다. 교세라의 한국어 홈페이지에서도 이나모리 회장의 한국과의 인연을 자세히 써놓았을 정도였다.
- 축구선수 박지성과도 인연이 깊다. 박지성이 처음 프로 생활을 시작했던 J리그 교토 퍼플 상가의 구단주였기 때문. 박지성이 일본을 떠나서 네덜란드로 진출하기 직전에, 계약 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무급으로 천황배 대회 결승전을 뛰면서 1골 1 어시스트라는 뛰어난 활약으로 교토 퍼플 상가의 우승을 이끌었는데, 이것이 구단의 첫 우승 타이틀이었다고 한다.[4] 이런 인연 덕분에 당시 구단주 신분으로 박지성을 직접 만나서 감사와 격려의 말도 건냈다고 한다. 그 말이 바로 "어디로 가든 응원하겠지만 언젠가 교토로 꼭 돌아와주게. 그대가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온다고 해도 받아주겠네." 였다고 한다. [5]
- 정치적으로는 이전부터 일본의 민주당 계열과 친했다. 일본항공 재건을 부탁한 하토야마 총리도 민주당 출신 총리였다. 이후에도 입헌민주당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자민당과는 관계가 좋지 못하다.
[1] 이 DDI는 2000년 다른 두 통신회사인 KDO와 IDO를 합병하여 KDDI로 바뀐다.[2] 이러한 결정에는 당시 하토야마 내각의 국토교통대신이던 마에하라 세이지와의 인연이 주효했다. 교세라가 교토에 기반을 둔 회사이고, 마에하라는 교토대학 출신에다가 교토 2구가 지역구였다. 동향인 만큼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였다.[3] 당시 일본항공은 브라질까지 보잉 747을 갖고 미국을 경유해 운행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계 브라질인이 많고 미국-일본간의 수요도 터져나간다 해도 브라질은 일본에서 너무 멀고도 멀었다. 게다가 2007년 원월드 항공동맹에 일본항공이 가입한 이후 굳이 일본항공 자신이 브라질을 갈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미국에서 아메리칸 항공이, 유럽에서 영국항공이 브라질까지 가 주니까 굳이 자신들이 브라질에 갈 필요 없이 코드셰어로 때워도 되었다. 이후 구조조정 기간 중에 스카이팀에서 델타 항공이 나서서 항공동맹을 옮기라고 꼬드겼지만, 이나모리 회장은 오랜 제휴 관계를 이해관계 때문에 바꾸는 것은 안 된다며 이를 반려했고, 그 결과 2024년 현재도 원월드에 남아 있다.[4] 지금도 교토 상가 FC의 우승컵은 2002년 천황배 우승컵이 유일하다.[5] 박지성이 대회 우승 후에 유럽으로 진출할 때, 이나모리 회장이 박지성의 가족들과 함께 나눈 식사 자리에서 했던 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