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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33:52

음악이 죽은 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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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현장. 바닥에 있는 것은 리치 밸런스와 버디 홀리의 시신이다.

The Day the Music Died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59년 2월 3일
유형 기상악화, 조종사의 과실
발생 위치 아이오와주 세로 고르도 카운티, 그랜트 타운쉽
기종 비치크래프트 보난자
운영주체 드와이어 플라잉 서비스
기체 등록번호 N3794N번
출발지 메이슨시티 시립 공항
탑승인원 승객: 3명
승무원: 1명
사망자 탑승객 4명 전원 사망

1. 개요2. 겨울 댄스 파티
2.1. 투어의 문제점들2.2. 웨일런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
3. 사고
3.1. 사고 원인
4. 후일담5. 여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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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 2월 4일 캔터키주 루이스빌에서 발행한 더 쿠리어 저널 3면 기사다.

1959년 2월 3일 아이오와주 클레어 레이크 근처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 사고다. 이 사고로 비행기에 탑승했던 로큰롤 스타였던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빅 바퍼가 사망했다. 이후 1971년 돈 매클레인이 이 사고로 사망한 가수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인 American Pie(노래)를 통해 이 사건은 음악이 죽은 날로 알려졌다.

2. 겨울 댄스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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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2월 2일 아이오와주 클레어 레이크에서 열린 겨울 댄스 파티 투어 포스터. 다음날 사고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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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2월 2일 아이오와주 클레어 레이크에서 열린 겨울 댄스 파티 투어에서 공연중인 버디 홀리. 왼쪽부터 웨일런 제닝스, 버디 홀리, 카를로 미스틀란젤로[1], 토미 올섭.

1958년 11월 크리켓츠를 탈퇴한 버디 홀리는 베이스의 웨일런 제닝스, 기타의 토미 올섭, 드럼의 칼 번치로 구성된 자신의 밴드를 만들었다. 당시 홀리는 크리켓츠 시절 매니저인 노먼 페티가 돈을 횡령한데다, 임신한 아내와 뉴욕에서 같이 살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2] 또한 영국 투어까지 계획했기 때문에 홀리는 미국의 중서부 24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기획한다. 홀리는 게스트 가수로 리치 밸런스, 빅 바퍼, 디온&더 벨몬츠를 초대했고, 지역에서 로큰롤 가수로 활동하던 프랭키 샤르도를 오프닝 가수로 영입했다.[3]

2.1. 투어의 문제점들

투어는 1959년 1월 23일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서 시작하여 사고 전날인 2월 2일 아이오와 주 클레어레이크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11번의 공연을 벌였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밥 딜런같이 공연을 보고 대중가수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나타났는데, 먼저 공연이 있는 도시들 간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대부분 500km가 넘는 거리를 10~12시간 동안 이동하는데 보내야 했다. 당시에는 고속도로가 없어 시골의 2차선 도로를 이동해야 했는데, 심지어 이동수단도 교회에서 빌린 노란색 스쿨버스가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버스의 난방시스템까지 고장나 게스트 중 누군가가 감기에 걸렸다.[4]

사고 전날 공연이 있던 아이오와주 클레어레이크는 원래 예정에 없었지만, 현지 프로모터의 요청으로 급히 공연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다음 공연장이 있는 미네소타 주 무어헤드까지 590km를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공연지인 아이오와 주 수시티는 또 520km를 이동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버디 홀리는 비치크래프트사의 보난자 비행기 N3794N번을 빌려 무어헤드와 인접한 노스다코타 주 파고로 이동하고자 했다. 비하인드 뮤직에 따르면 버디 홀리가 2월 2일 공연 후 비행기를 빌리게 된 이유를 당시 클레어레이크의 세탁소가 영업하지 않아, 버디 홀리는 더이상 깨끗한 옷을 입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안절부절하지 못해서라고 한다.

2.2. 웨일런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

여기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웨일런 제닝스와 디온(가수)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가장 잘 알려진 웨일런 제닝스의 주장에 따르면 홀리가 비행기를 빌린 이유는 자신의 밴드 멤버들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이때 독감에 걸린 빅 바퍼에게 제닝스가 비행기 좌석을 양보했고, 토미 올섭과 리치 밸런스가 동전 던지기를 했는데 여기서 밸런스가 이겨서 좌석을 차지했다. 원래 밸런스는 할아버지가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에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했지만, 인생에서 누군가를 이겨본 것이 처음이라며 용기를 내서 비행기를 탔다. 이 주장은 영화 라 밤바에 그대로 묘사되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2009년 디온이 더 팜 비치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 주장은 전혀 다른 내용이다. 디온에 따르면 홀리는 게스트들을 태우기 위해 비행기를 빌렸다는 것이다. 홀리는 공연이 끝난 후, 탈의실로 게스트 가수들을 따로 불러 자신이 비행기를 빌렸다고 말했다. 비행기 조종사인 로저 피터슨,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기획한 홀리, 최연장자인 빅 바퍼가 각각 좌석을 차지했고, 남은 한자리를 놓고 디온과 밸런스가 동전 던지기를 했는데, 디온이 이겼다. 하지만 디온은 비행기 좌석값이 자신의 한 달 집세와 같은 36달러라는 사실에 부담을 느껴 밸런스에게 양보했다. 이에 밸런스는 감사를 표하면서 디온에게 자신의 기타를 맡겼다고 한다. 현재까지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 중 누구의 말이 맞는 지는 알 수 없다.

3. 사고

1959년 2월 3일 오전 0시 55분 보난자 비행기 N3794N번이 메이슨시티 시립 공항을 이륙했다. 비행 서비스의 주인인 휴버트 제리 드와이어는 새벽 1시경 피터슨과 연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아침이 되어서 드와이어는 자동차를 몰아 계획된 경로를 추적하다가 오전 9시 35분경 공항에서 북서쪽으로 10km 떨어진 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가수들의 시신은 비행기 동체 밖에서 발견되었고, 조종사인 로저 피터슨의 시신은 조종석 안에서 수습되었다. 검시관 랄프 스마일리는 이들이 뇌에 큰 손상을 입어 사망했다고 밝혔다.

3.1. 사고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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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디 홀리의 유품을 조사하는 세로 고르도 카운티 보안관 제리 알렌.

민간 항공 위원회는 사고 원인을 분석하였다. 먼저 조종사인 피터슨은 4년여의 비행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구 비행 훈련은 필기시험만을 통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구름이 적고, 기상악화로 시야 확보가 어려운데다 인적이 드문 지역이라 지상 조명 조차 없어서 시각을 통한 비행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피터슨은 일반적인 인공 지평선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았는데, 사고기인 보난자 N3794N번은 스페리 F3 자이로스코프가 장착되었다. 문제는 스페리 F3 자이로스코프가 일반적인 인공 지평선과 반대로 위가 땅, 아래가 하늘이라는 점이다. 이는 피터슨이 더욱 조종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심지어 사고 당시 피터슨에게 제공된 기상 브리핑이 심각하게 부적절했다고 밝혀졌다.

이에 민간항공위원회는 사고 원인을 기상악화와 비행기 조종사 로저 피터슨의 과실로 결론 내렸다.

4.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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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댄스 파티 투어 2월 4일자 포스터를 보고 있는 대체가수 프랭키 아발론.

사고가 일어나자 바비 다린, 폴 앵카, 필 스펙터, 딕 클라크 등 여러 가수가 디온 등 살아남은 이들에게 전보를 보내 사실을 확인하였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끔찍하게도 겨울 댄스 파티 투어 일정이 2주나 더 남아있었다. 심지어 사고가 일어난 2월 3일 공연도 취소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열렸다. 디온&더 벨몬츠와 프랭키 샤르도를 중심으로 남은 공연을 벌였고, 홀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당시 15세의 무명가수였던 바비 비(Bobby Vee)[5]를 영입했다. 이후 파비앙 포트(Fabian Forte)[6], 지미 클랜튼(Jimmy Clanton)[7], 프랭키 아발론(Frankie Avalon)[8], 데비 스티븐슨(Debbie stevens)[9] 등 다른 가수들이 참여해 어떻게든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이때 몇몇 공연 프로모터들은 주요 가수들이 사망해 출연하지 않았다고 계약된 공연료를 주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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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설치된 추모 기념물

1988년 6월 사고로 사망한 3명의 가수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사고 현장에 설치 되었다. 1년 후인 1989년 켄 페켓이라는 팬이 3명의 가수들을 위한 추모 기념물을 설치하였다. 페켓은 2003년 7월 17일 겨울 댄스 파티 투어가 2번째로 열렸던 위스콘신 주 그린베이 리버사이드 블룸에 같은 추모 기념물을 설치했다. 또한 2009년 2일에는 빅 바퍼를 위한 기념물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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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2024년 현재까지 겨울 댄스 파티 투어는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뮤지컬 버디 홀리 스토리에서 버디 홀리 역을 맡은 존 뮬러가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의 유족들의 허락을 받아 존 뮬러의 겨울 댄스 파티 투어라는 이름으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존 뮬러가 버디 홀리, 레이 앤소니가 리치 발렌스[10], 바퍼의 아들인 제이 파일 리차드슨은 빅 바퍼 주니어로서 공연에 참가했다. 2013년 제이 파일 리차드슨이 사망하자, 린우드 섀서가 빅 바퍼를 맡아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버디 홀리의 아내 마리아 엘레나 홀리는 존 뮬러를 가리켜 버디가 했던 것을 똑같이 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인정했다.

이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여러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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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부검에 들어가기 직전에 아버지 빅 바퍼의 시신을 지켜보는 제이 페일 리처드슨.


[1] 디온&더 벨몬츠의 멤버로 당시 드러머인 칼 번치가 동상으로 입원했기 때문에, 카를로가 대신 드럼을 연주했다.[2] 디온에 따르면 홀리는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많은 돈이 필요해 어쩔수 없이 투어를 했다고 한다.[3] 그리 유명한 가수가 아니라 공연 포스터에 그의 노래인 Fake Out이 종종 Take Out으로 잘못 올라가고는 했다.[4] 누가 감기에 걸렸는지는 웨일런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이 달라 미스터리로 남았다. 제닝스는 빅 바퍼가 걸렸다고 주장하고, 디온은 리치 밸런스가 걸렸다고 주장했다.[5] 1943년 4월 30일~2016년 9월 24일.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른 Take Good Care of My Baby가 있다.[6] 1943년 2월 6일 생으로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31위를 기록한 I'm a Man이 있다.[7] 1938년 9월 2일 생으로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에 오른 Just a Dream이 있다.[8] 1940년 9월 18일 생으로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한 Venus가 있다.[9] 1928년 2월 1일~2001년 2월 17일.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14위를 기록한 Don't Let Him Shop Around이 있다. 겨울 댄스 파티 투어에 참가한 유일한 여성가수다.[10] 실제 리치가 아닌 라밤바의 리치와 닮았다.[11] BBC에 의해 너무 병적이라는 이유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