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축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유민수(축구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진주 유씨[1] |
출생 | 1889년 9월 23일 |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이리 (현 황해북도 평산군 예성리)[2] | |
사망 | 1955년 7월 4일[3] |
묘소 | 황해북도 평산군 예성리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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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9년 9월 23일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이리(현 황해북도 평산군 예성리)에서 아버지 유경명(柳庚鳴, 1854 ~ 1920)과 어머니 수안 이씨(遂安 李氏, 1867 ~ 1909. 2. 23)[4]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4월 5일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이날 시위에는 30여명이 참가했는데, 그는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를 향해 시위행진을 전개했다. 그 뒤 이를 제지하려던 일본군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얼마 뒤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은 그는 공소에 이어 상고까지 했으나 1919년 8월 30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55년 7월 4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유민수에게 1982년 대통령표창,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