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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2 21:35:15

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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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기섭.png
경현(敬賢)
일산(一山)
출생 1906년 11월 20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 중정리
사망 1936년 5월 21일
공주형무소
서훈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청년운동2.3. 비밀결사, 그리고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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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유기섭은 1906년 11월 20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 중정리에서 아버지 유병위(柳秉蔚)와 모친 은진 송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유대원(柳大源)은 기정진(奇正鎭)과 임언회(任憲晦) 문하에서 수학하고 전우 등과 교류하면서 유교 전통의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한 유학자였다. 그는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통리기무아문을 사학으로 간주하고, 일본과 서양과의 공생은 국가가 비록 존재하더라도 망국보다 못한 것이며, 사람이 살아있어도 죽음마도 못한 것이라며 개화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유기섭의 부친 유병위는 공부를 위해 성균관에서수학한 뒤 귀향하여 학문 연마와 강학에 힘썼다. 그는 개화정책과 신교육운동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1908년 논산에 신학교가 설치되자, 그는 매제인 이철영(李喆榮)과 함께 이를 격렬히 비판하는 내용의 서한을 향교와 서원에 발송했다. 한일병합 후에는 토지와 재산을 문중과 가난한 친족에게 나눠주고 여종과 노비를 내보냈으며, 나라가 망했는데도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죽을 때까지 칩거했다.

유기섭은 이렇듯 유교 전통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일제에 대한 반감이 큰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배일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대종교 지도자 강석기(姜錫箕)가 대종교 남도본사를 부여면 인근의 장암면 장하리에 설치한 뒤 대종교 신자가 되어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또한 신학문을 배격한 부친의 영향으로 향리에서 고모부 이철영이 운영하는 서당에서 오랫동안 한학을 수학했을 뿐 보통학교를 비롯한 어떠한 제도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독학으로 역사, 세계지리 등 다방면에 지식을 겸비했고, 시서에도 능했다.

2.2. 청년운동

1926년, 유기섭은 21살의 나이로 부여청년회에 가담했다. 부여청년회는 1920년대 중반 부여지역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신진 청년들이 등장하고 청년운동이 변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결성되었다. 그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을 주도했다. 1926년 5월 23일 부여면의 유지와 청년 등 40여 명과 함께 시대일보 부여분국 사무실에서 부여청년회의 창립 발기회를 개최하여 일주일 후에 창립대회를 가지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5월 30일 그는 40여 명의 지역 유지, 청년들과 함께 부소산에 있는 사비루(泗沘樓)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부여청년회를 결성하였다. 창립총회에서는 경과보고를 가진 후 회칙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그는 이 무렵 청년단체의 여러 부서 가운데 중요한 직책인 재정을 담당하는 재무부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특히 청년단체의 중점 사업인 교육을 총괄하는 학무부장으로도 선출되었다.

부여청년회는 청년단체의 혁신과 청년운동의 노선 전환이 추진되는 분위기 속에서 결성되었지만, 조직 체계와 간부 구성에서 1920년대 초반에 결성된 다른 지역 청년단체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간부들은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었으며,조직도 회장을 포함한 간부 중심으로 운영되는 체계였다. 이 시기 다른 지역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이 청년운동을 주도하면서 기존 청년단체를 혁신하거나 혁신의 내용을 담은 청년단체를 새로이 결성하던 양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는 부여면의 유지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반면 사회주의를 따르는 청년들의 영향력이 미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1926년 11월 천도교 종리원에서 임시의장 김삼현(金三鉉)의 사회로 임시총회를 열어 회칙을 개정하고, 의연금 징수, 농촌야학 설립, 회관 문제 등의 활동 방향과 내용을 토의하였다. 또한 조직 체계에서 일부 부서를 없애고 새로운 부서를 설치했으며, 기존 회장단과 부장 중심의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 민주적인 운영을 강화하기 위해 위원제로 전환하였다. 이때 유기섭은 재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날 총회는 창립 당시 선출된 회장과 부회장 등 유지들이 물러나고 청년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인물들이 대폭 기용된 점이 두드러졌다.

이날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총회가 끝난 후 열린 연설회였다. 부여청년회는 총회를 마친 후 회원과 지역민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극 공연과 음악 연주에 이어 연설회를 가졌다. 연설회는 천도교청년동맹 회원이자 사회주의자인 이황(李晃)이 “조선청년 사명”이라는 연제로 연설했으며, 이어 사회주의 사상단체 일월회(日月會) 회원 신태섭(辛泰燮)의 연설이 있었다. 그러나 연설 도중 일제 경찰이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연설회를 중단시켜 버렸다.

부여청년회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활동은 임시총회의 결의대로 야학의 설립과 운영이었고, 유기섭이 이 활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12월 그는 지역 어린이들의 문맹을 타파하기 위해 야학 설립에 노력을 기울여 부여면 중정리에 대왕의숙(大旺義塾)을 설립하였다. 야학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8~14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한글 등 기초교육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같은 시기에 용정리와 쌍북리에서도 야학이 설립되었으며, 3개 야학의 학생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점차 사회주의에 감화되었다. 그는 후에 재판을 받던 중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4년 전부터 대왕서당을 설립하고 8세~14세 정도의 20여 명을 모아 가르쳐 왔는데 학생은 빈민의 자녀로서 안색이 나쁘고 혹자는 아침밥을 먹지 못하며, 혹자는 저녁밥을 먹지 못한다. 그 생활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한편 부자는 높은 집에서 기거하며 안일을 탐함은 필경 현대 사회제도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므로 사유재산제도를 파괴하고 빈부의 구별을 없애 각각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희망하고 있었다.”

유기섭은 부여지역에서 고립 분산적으로 운영되는 야학 교재의 통일과 친목 도모 등을 위해 야학연합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1929년 4월 3일 부여면 쌍북리 농민야학회관에서 부여지역 11개 면에 설립된 18개 야학 대표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여야학연합회(扶餘夜學聯合會)’의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야학연합회는 야학 교사가 연합하여 교재를 통일하고, 교양 방침을 일신하며, 야학 교사들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는 회장으로 선출되어 이 단체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유기섭은 청년운동을 벌이고 있을 무렵 조선농민사 지방주재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그의 기자 활동은 <조선농민>이 기획한 전국의 명승지를 조명하는 기사 가운데 사비루를 소개하는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계몽운동 성격의 생활혁신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1929년 5월 조선일보사가 “조선 사람아! 새로 살자”라는 슬로건 아래 색의(色衣), 단발(斷髮), 건강 증진, 상식 보급, 소비 절약, 허례 폐지 등을 주창하며 시가 행렬, 전단 살포, 강연회 개최와 영화 상영 등 다방면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5월 중순 조선일보의 생활개신 선전일을 맞아 지역 유지와 활동가들과 함께 ‘부여생활개신연구회’의 발기회를 조직하고, 6월 초에 지방 유지와 청년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이 단체의 사업부 상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부여생활개신연구회는 농민운동대회를 개최하고 부여 각 지역을 순회하며 선전 강연회를 열었다. 이 운동은 이후 ‘문자보급운동’으로 전환되었다.

2.3. 비밀결사, 그리고 최후

1930년 1월 27일, 부여농업보통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일본인 교사의 배척을 내세우며 동맹휴학투쟁을 벌였다. 일제 경찰은 동맹휴학을 주도한 학생들의 조사 과정에서 학교에 뿌려진 격문의 영향으로 일어난 사실을 파악하고 격문 관련자를 찾기 위해 지역 주요 활동가의 집과 조선일보사 부여지국을 포함한 30여 곳을 수색했다. 이때 유기섭은 가택 수색을 당한 후 노명우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노명우와 함께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대전지검 강경지청으로 송치되었다. 하지만 그가 격문 작성과 배포, 학생들의 동맹휴학투쟁과 관련 없음이 밝혀져 2월 17일 무혐의불기소되어 풀려났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활동했던 청년운동단체들이 일제의 규제로 인해 활동이 힘들어지자, 유기섭은 지역의 활동가들과 새로운 활동 방향과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1931년 1월 15일 노명우·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祺泳)·이원인(李原人) 등과 함께 홍산에서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농민을 기초로 공산주의 사회의 수립을 위한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을 활동 목표로 정했으며, 공개조직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노동자·농민 자녀들을 지도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부여군의 남면 마정리, 규암면 합송리, 장암면 장하리, 부여면 중정리 등지에서 운영되던 농민야학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교육하였다.

유기섭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비밀결사를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1931년 1월 조선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서진(徐震)으로부터 사유재산제도 부인과 공산주의적 사회제도 건설의 목적을 가진 비밀결사를 조직하자는 제의를 받고 즉시 수락했다. 1월 22일, 그는 서진, 조선일보 부여지국 기자이며 ‘부여격문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언도받고 석방된 강성구(姜星求)와 함께 부여면 가탑리 유기선(柳基璇)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비밀결사의 목적은 불합리한 사회의 개혁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었으며, 조직 명칭을 붉은 별이자 ‘적화’를 의미하는 ‘화성당(火星黨)’으로 정하였다. 그는 조직선전부를 담당했으며, 서진이 계획부, 강성구가 비서부를 맡았다.

화성당은 만 20세 이상으로 당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한 자에게 당원 자격을 주고, 당원은 당비 부담, 음주 금지, 규약 엄수를 해야 하며, 비밀 누설자는 엄벌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노동자와 농민에게 공산주의 의식을 고취시켜 당원을 모집하는 행동강령도 마련하였다. 이들은 당원 규합을 위해 형평사 부여지부 서기장 김동진(金東眞)과 서기 박주완(朴周完), 부여농민조합에 참여하고 있던 강병무(姜秉武)에게 화성당의 조직 계획을 설명한 후 가입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26일 규암면 합송리에 있는 농민학원에서 결당식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접촉했던 세 명이 위험 등의 이유로 가입을 거부하자, 유기석은 서진, 강성구와 논의한 끝에 화성당 결성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유기섭을 포함한 세 명이 화성당 결성을 추진한 지 불과 수일 만에 활동을 중단한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이 밝힌 표면적인 이유는 접촉한 사람 모두가 가입을 거부하여 결성의 어려움을 느꼈고, 세 사람으로는 비밀결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무렵 지역에 많은 활동가가 존재한 상황에서 단기간에 소수의 사람만 접촉한 후 활동을 중단한 점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비밀결사의 구상과 계획에 대한 충분한 준비 없이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대중운동 에 자극받은 다소 즉흥적 발상이었던 듯하다.

화성당 결성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2개월여가 지난 후 결성 시도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4월 3일 서진이 먼저 피체되었고, 유기섭은 다음날 대종교 지도자인 강석기의 장례식에 강성구와 함께 참석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가입 권유를 받았던 김동진을 포함한 세 명과 부여농민학원 교사로 활동했던 오기영이 피체되었다. 그는 같은 해 6월 8일 서진·강성구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4개월만인 1931년 10월 9일에 예심에서 유죄로 종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12월 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인정 심문 후 치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방청이 금지된 채 공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징역 2년을 구형받았으며, 변호를 맡은 김병로와 홍긍식(洪兢植)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하였다. 12월 28일 결심 공판에서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두 사람과 함께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검사가 즉석에서 항고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심리가 진행되었다. 1932년 6월 2일 그는 강성구와 함께 징역 1년을 언도받았고, 서진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12월 28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귀향하여 1933년 1월부터 이원인이 운영하는 중앙일보 부여지국의 총무 겸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1933년 7월 부락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를 조직하고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위장 조직하고 항일농민운동에 힘썼다. 또한 비밀결사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에 가담하여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활동을 수행했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조직 전환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 체계에서 공산주의 이론과 투쟁방법을 연구하는 교양부를 없애고 실천성을 강조하는 조직부와 선전부를 신설하였다. 이때 유기섭은 조직부를 맡았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1933년 4월 부여면 대왕리의 낙화암 근처에서 회합을 가지고 야학 개설, 연극·강연을 통한 농민의 사상 교양, 연고지 중심의 활동분담 지역 결정 등의 활동 지침을 결정하였다. 유기섭은 오기영과 함께 부여면을 담당했으며, 홍산면은 이원인·노명우, 규암면은 노명우·오기영, 장암면은 최재봉·강일구가 분담하였다. 그러나 결성한 지 불과 3개월 만인 6월 하순, 공산주의자협의회는 자진 해산했다. 이는 일제 경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공산주의자협의회가 해산된 지 2개월 만인 1933년 9월 초 협의회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유기섭은 10월 5일에 체포되었고, 2년 만인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5월 21일 공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유기섭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