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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20:25:44

우정화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3년[1] 4월 8일
경기도 장단도호부 장북면 항동리
(現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항동리[2] 181번지)
사망 1945년 1월 22일 (향년 51세)
본관 단양 우씨[3]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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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3년 4월 8일 경기도 장단도호부 장북면 항동리(現 연천군 백학면 항동리 181번지)에서 아버지 우병연(禹秉淵, 1875.4.18. ~ 1937.8.12.)[4]과 어머니 의령 남씨(1870.7.13. ~ 1940.7.3.)[5]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우병연은 참봉을 지냈다.

1919년 3월 29일 밤,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도덕암산(道德岩山) 위에서 24촌 지간의 족형(族兄)인 우정시를 비롯한 마을 주민 1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다음날인 30일 밤 마을 경내 시라위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31일 밤 마을 주민 7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도면 고읍리(現 개성시 장풍군 고읍리)에 있는 장도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그날 밤 11시 경에는 시위군중 150명과 함께 장도면 석주원리(現 개성시 장풍군 사시리)에 있는 장도면장 윤좌영(尹佐榮)의 집을 찾아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주로 야간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던 4월 2일 오전 10시부터 정오가 지날 무렵까지 항동리 옛 시장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동네 주민들과 고랑포 시장으로 향하는 사람 100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2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어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9월 11일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3년 12월 24일부터 1926년 9월 28일까지 3,500엔의 세액을 내고 자가용탁주제조면허를 취득하여 탁주 제조에 종사했다.#

이후 1945년 1월 22일, 해방 7개월을 앞두고 사망하였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단양우씨안정공파족보 권 2 265쪽에는 1894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6.25 전쟁 전에는 단양 우씨 집성촌이었다. 독립유공자 우정시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안정공파(安靖公派)-현감공(縣監公) 원규(元珪)파 27세 정(楨) 항렬.[4] 자는 성심(聖心).[5] 남명원(南命元)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