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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9-23 16:51:52

우승기(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덕유(德有) / 월계(月溪)
본관 단양 우씨[1]
출생 1875년 4월 8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 상인동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2]
사망 1948년 6월 5일[3]
묘소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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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우찬기는 그의 4촌 형이다.

2. 생애

우승기는 1875년 4월 8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아버지 우하성(禹夏成)과 어머니 인천 이씨[4]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과 김창숙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같은 문중 사람인 우경동·우성동·우찬기·우하교·우하삼(禹夏三)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들은 '파리장서'를 통해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고종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독립청원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우승기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출옥 후 복역 중인 장석영·송준필 등을 찾아 물심양면으로 수습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8년 6월 5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판서공파-진사공 홍수(洪受)파 28세 기(基) 항렬.[2] 단양 우씨 판서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우경동·우병기·우성동·우찬기·우하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음력 4월 28일.[4] 이석수(李錫綏)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