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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7-20 17:10:21

우하교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윤흠(允欽) / 노암(魯菴)
본관 단양 우씨[1]
출생 1872년[2] 5월 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 상인동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3]
사망 1941년 3월 20일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3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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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83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우하교는 1872년 5월 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아버지 우권동(禹權東)과 어머니 인천 이씨[4]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훗날 옥천 전씨 전전동[5]와 혼인하였다.#

어려서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자라서 서찬규(徐贊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크게 분노하여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했다.

1915년 음력 1월 15일 윤상태(尹相泰)·박상진·서상일·이시영(李始榮)[6] 등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를 조직하였다.

우하교는 임진왜란의병장 우배선의 후손인 대구 지역의 중산층 혁신유림으로서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하였으며, 사립교육기관 및 곡물상 등지에 의연금을 희사하는 등의 형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917년 군자금 모집활동이 일제 경찰에 포착되어 3개월 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국외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자, 그 또한 조선국권회복단에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한편 조선국권회복단은 유림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조국의 독립을 세계 온 나라에 호소하려는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그는 조선국권회복단과 유림들의 연락을 담당하는 한편, 고향 마을의 같은 문중 사람 우경동·우성동·우승기·우찬기·우하삼(禹夏三) 등 5명과 함께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유예불기소처분선고받고출옥했다. 이어 1919년 6월 30일 다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역시 불기소처분선고받고 출옥했다.

그러나 1919년 8월 윤상태가 검거되자, 우하교는 8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예심에 증인으로 불려나가 사건을 부인하였다가##2 그해 10월 소위 위증죄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41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우하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2012년 5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유고로 《노암문집(魯菴文集)》이 있다.


[1] 판서공파-정랑공 홍적(洪迪)파 27세 하(夏) 항렬. 족보명은 우하흠(禹夏欽).[2] 1873년생이라고도 한다.#[3] 단양 우씨 판서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우경동·우성동·우병기·우승기·우찬기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이석린(李錫麟)의 딸이다.[5] 초명 전성녀(全姓女). 전석수(全錫壽)의 딸이다.[6] 대한민국 제1대 부통령 이시영과는 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