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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8:36:12

요시노부 유괴 살인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건 경위3. 범행 동기4. 재판과 그 이후5. 수사상의 문제점6. 기타

1. 개요

吉展ちゃん誘拐殺人事件

1963년 일본에서 발생한 유괴 살인 사건. 요시노부짱 사건(吉展ちゃん事件)이라고도 불린다.

2. 사건 경위

1963년 3월 31일 도쿄도 다이토구 이리야정(現 마츠가야)에 거주하던 건설업자의 장남 무라코시 요시노부(당시 4세)가 자택 인근 공원에 놀러간다고 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요시노부는 이웃에 살던 친구의 집 2층에서 놀다가 공원에 간다는 말을 하고 나갔고 그날 저녁 함께 공원에 놀러 나갔던 동생들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요시노부가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모친이 행방을 묻자 동생들은 공원에서 요시노부를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시점에는 요시노부가 유괴당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는 경찰에 미아신고를 했고 언론에는 유괴가 아닌 행방불명 사건으로 보도되었다. 당일 오후 7시경에 수색요청이 나왔으나 이후 관할 경찰서의 대처는 매우 미흡했고[1] 이 초동 단계에서의 대처가 부실수사로 이어졌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4월 1일 경찰은 당시 요시노부가 공원에서 30대로 추정되는 남성과 대화하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유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4월 2일 오후 5시경부터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범인은 요시노부의 몸값으로 50만엔을 요구했는데 경찰은 3년 전 발생한 다른 유괴 살인사건[2] 당시 언론의 과열된 취재 경쟁으로 최악의 사태에 놓였던[3] 사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언론사들에 보도를 자제할 것을 요청하고 보도협정[4]을 체결했다.

경찰은 가족들에게 요시노부의 안부를 묻는 내용의 통화를 약 4분 이상 끌도록 하여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데 성공[5]했고 목소리를 통해 '도호쿠벤을 사용하는 40~50대 가량의 남성'으로 용의자를 추정했다. 한편 4월 7일 범인의 요구대로 요시노부의 모친 혼자 지정된 장소에서 몸값을 넘기는 동시에 사전에 대기하던 경찰들이 현장을 포위하여 범인을 체포하는 작전이 예정되었으나 사전 신호 실수로 모친이 운전하는 차량이 예정보다 일찍 출발해 경찰이 현장에 2분 가량 늦게 도착했다. 이 때문에 범인은 이 얼마 되지 않는 틈을 타 몸값 50만엔을 강탈하여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범인으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었고 요시노부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경찰의 이런 실책에 당시 수사본부 총괄급 위치에 있었던 경시청 수사1과의 한 경부보는 '경시청의 수치'라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결국 4월 19일부터 경찰은 수사 체계를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범인의 육성을 공개하여 제보를 받기 시작했다. 제보 중에는 범인과 직결되는 유력한 것들도 적지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범인 체포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4월 25일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는 한 남성이 경시청 아타고서를 찾아와 자기 형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제보를 했고 이에 따라 남성의 형인 전직 시계공 오바라 타모츠(小原保, 당시 28세)[6]가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당초 경찰의 추정과 남성의 실제 연령대가 달랐고 오바라는 다리에 장애가 있어 걸음걸이가 특징적이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걸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띌 수밖에 없으나 이에 관한 목격정보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3월 27일부터 4월 2일까지 고향인 후쿠시마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존재했기 때문에 코하라는 혐의 없음으로 간주되었다. 1963년 12월 다시 코하라에 대한 수사가 실시되었으나 이 때도 4월 1일 아침에 후쿠시마에서 오바라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부상해 결국 다시 수사가 중단되었다.

범인도, 요시노부의 행방도 찾지 못한 채 2년이 지난 1965년 5월 결국 경시청은 수사진 물갈이를 단행했다. 히라즈카 하치베(平塚八兵衛)[7]를 필두로 새로운 사건 담당으로 투입된 수사관들은 문제의 전화 녹음 테이프를 듣고 진범이 오바라라고 확신했다. 수사관들은 다시 코하라의 고향인 후쿠시마를 찾아가 사건 발생 전날 오바라를 봤다는 목격자를 찾아가 사실을 확인한 결과 실제 목격 일시는 3월 28일로 4월 1일은 목격자의 착각이었음을 밝혀냈다. 오바라는 3월 29일에 지인의 집에서 떡을 해 먹었다고 진술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해는 의 작황이 좋지 않아 떡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도쿄로 돌아온 히라즈카는 경시청 간부에게 오바라를 경시청으로 이감시켜 강제수사를 실시하겠다고 요청했다. 간부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어디까지나 경시청 차원의 정식 수사가 아닌 히라즈카 본인의 책임 하의 임의 수사로 간주하고, 경시청 구류기간을 10일로 제한하는 조건으로 수사를 허가했다.

당시 오바라는 절도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는데 6월 23일 경시청 이감 후 구류기간이 끝나는 7월 3일까지는 어떻게든 진범 여부를 밝혀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촉박했다. 조사 과정에서 히라즈카 형사는 자신이 밝혀낸 사실과 오바라의 증언을 대조하면서 거짓 증언을 하나씩 논파해 갔으나 그는 그 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기에 더해 언론에서는 오바라에 대한 강제수사를 놓고 인권침해라고 떠들던 상황이었다.

구류기간이 끝난 7월 3일, 드디어 오바라에게서 결정적인 증언이 나왔다. 그는 후쿠시마에서 도쿄로 돌아온 4월 3일 전차를 타고 가던 중 닛포리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8]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는데 실제 닛포리 화재는 그 전날인 4월 2일에 발생했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았다. 히라즈카 형사가 이 점을 추궁하자 오바라는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고 유괴 사실을 인정하며 사건 당일 이미 요시노부를 살해했다고 증언했고, 7월 5일 아라카와구 엔츠지(円通寺) 경내에서 요시노부의 백골 시신이 발견되었다.

3. 범행 동기

후쿠시마의 빈한한 농가 출신이었던 오바라 타모츠는 어렸을 때 앓은 골막염의 후유증으로 한 쪽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되어 성장한 뒤 다리가 불편해도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인 시계공 일을 택했고 1960년에 도쿄로 상경하여 우에노의 한 시계점에 취직했지만 시급 2만 4천엔으로는 생활이 빠듯했기 때문에 부업으로 시계 중개상을 하다가 적발되어 해고되었고 이후에는 일정한 직업 없이 생활했다.

일정한 직업은 없어도 시계나 귀금속 중개를 하면서 돈을 벌고는 있었으나 감당하기 힘든 액수의 을 지게 되었고 이를 변제할 방법을 궁리하던 그는 문득 이전에 본 영화 '천국과 지옥[9]'의 예고편을 떠올리고 영화를 바탕으로 아이를 유괴해서 부모로부터 몸값을 받을 계획을 세웠다.

3월 31일 오후 5시 45분경 오바라는 다이토구의 한 공원 화장실에서 아이들이 물총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그 중 한 아이, 즉 요시노부의 물총이 고장난 것을 보고 고쳐 주겠다며 접근해 요시노부를 공원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도중에 요시노부가 오바라의 걷는 모습을 보고 "아저씨, 다리 아파?"라고 묻자 요시노부를 살려 두었다가는 자신의 범행이 발각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후 9시경 오바라는 소변을 보고 싶다는 요시노부를 엔츠지 경내로 데려가 사람의 왕래가 뜸한 곳에서 용변을 보게 했다. 이 때 주지가 그들 뒤편을 지나가자 주지가 자신들을 봤다고 착각한 오바라는 절의 묘지에서 잠들어 있던 요시노부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묘비 아래에 감추었다.

4. 재판과 그 이후

1966년 3월 17일 도쿄지방법원은 오바라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변호사 측은 계획적 범행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항소했다. 동년 9월부터 3회에 걸쳐 항소심이 진행되었지만 11월 도쿄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했다. 이에 변호사 측은 최고재판소에 상고했으나 1967년 10월 13일 최고재판소에서 끝내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고 4년 후인 1971년 12월 23일 미야기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오바라의 시신은 가족묘에 들어가지 못한 채 가족묘 바로 옆에 작은 봉분 상태로 사실상 가매장이나 다름 없이 묻혔다고 한다.

5. 수사상의 문제점

사건이 장기화된 원인으로는 아래와 같은 수사상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6. 기타

일본에서 최초로 보도협정이 체결된 사례로, 요시노부 사건을 계기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2차 피해 및 사생활 침해 방지를 위해 유괴 사건 발생 시 보도협정을 체결하는 관례가 생겼으며 범인이 몸값 탈취에 성공했다는 점이나 영구미제로 끝날 뻔했다는 점,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해 범인의 육성이 공개되어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전후 사상 최대의 유괴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범인의 체포에는 성공했으나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피해자 구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경시청 상층부에서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고 이는 1964년 4월 1일 일본 최초로 유괴사건 전담 수사팀으로서 경시청 수사 1과 산하 특수범 수사과가 설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 김의 전쟁의 원작에 해당하는 『私戦』의 저자 혼다 야스하루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논픽션 『유괴』를 집필하였고 1979년 '전후 최대의 유괴 요시노부짱 사건(戦後最大の誘拐 吉展ちゃん事件)'이라는 제목으로 TV 드라마화되었다.

금품을 노린 어린이 유괴 사건이라는 점, 범인이 몸값만 챙기고 피해자를 돌려주지 않은 채 달아났다는 점이 1년 전인 1962년 한국에서 발생한 조두형 유괴사건과 유사하며 조두형 사건 당시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두형이를 돌려줘요'[10]라는 노래가 제작된 것처럼 요시노부 사건을 소재로 한 '돌려주오 지금 당장(かえしておくれ今すぐに)'이라는 노래가 제작되었다.

남쪽으로 튀어, 나오미와 가나코 등의 저자 오쿠다 히데오도 이 사건을 바탕으로 2019년 소설 『죄의 궤적』을 집필하였다. 한국에는 2021년 5월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1] 사건 다음 날에야 경시청 수사과에 연락이 닿았다.[2] 1960년 도쿄 세타가야구에서 당시 7세의 남아가 유괴, 살해당한 사건.[3] 피해 아동이 아직 생존한 상태에 언론이 사건의 상세 경위를 경쟁적으로 일일이 보도하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범인이 끝내 피해 아동을 살해했다.[4]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에만 있는 제도로, 수사 정보가 일반에 공개되어 범인을 자극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경시청 또는 각 지방경찰청에서 언론 보도를 일체 삼갈 것을 요구함에 따라 각 언론사간에 맺어지는 자체 협정. 보도시 생명에 큰 위협이 되거나 인권 침해가 우려되는 경우에 체결되기 때문에 주로 금품 목적의 유괴 사건 또는 인질이 발생한 사건에서 이용된다. 엠바고와 비슷해 보이지만 보도 중지 기간이 정해져 있는 엠바고와는 달리 보도협정은 경시청이나 지방경찰청에서 요청하지 않는 이상 사건 관련 보도를 일체 할 수 없으며 언론이 직접 보도하지 않는 대신 경찰이 각 매체를 통해 입수된 정보 및 수사 경과 등을 공표하게 되어 있다.[5] 이후에 공개된 범인의 육성은 이 때 녹음된 것이다.[6] 사건을 다룬 일본 다큐멘터리 방송에서는 대부분 성씨인 小原를 '오바라'로 발음하지만 일부 방송에서는 '오하라'로 발음하기도 한다.[7] 당시 경시청 내부에서는 '수사의 신' 등으로 불리며 명형사로 통하는 인물이었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수사 방식이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비인권적이었다는 비판 의견도 있다. 이 사람은 제국은행 사건3억 엔 사건에도 관련되었는데 제국은행 사건은 엔자이 의심을 받고 있으며 3억 엔 사건은 히라즈카의 정보 누설로 용의자 오인체포 사건이 발생해 억울하게 체포되었던 남성이 자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8] 1963년 4월 2일 아라카와구 닛포리(現 히가시닛포리) 일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 사건. 인근 침구 공장 직원의 실수로 발생한 화재로, 약 7시간에 걸쳐 시가지 약 5,098m²가 불타고 주택 36채가 전소되었으며 사망자는 없었으나 220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참사였다.[9]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63년작 영화. 미후네 토시로가 주연을 맡았으며 미국의 작가 에드 맥베인의 소설 '킹의 몸값'이 원작.[10] 이미자의 노래다. 이 사건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