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倭語類解. 1781-82년에 간행되어 조선에서 사용된 일본어 단어 사전. 책의 서문에는 홍순명(洪舜明)이 일본의 외교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에게 물어가며 지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정확한 간행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총 2권 2책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일본의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郎)라는 개인이 소장 중이다.한국어문회에서는 배정한자들의 대표훈음을 정할 때 이 책을 비롯한 많은 옛 문헌을 참고했다.
2. 내용
상권은 목록 1장과 본문 56장, 하권은 목록 1장과 본문 54장으로 구성되었다.주로 역관들은 첩해신어, 인어대방으로 회화 공부를 하되, 왜어유해는 어휘집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단어를 찾아보았다.
1763년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의 해사일기 12월 16일 기록에 이 책의 편찬 배경이 나오는데 수석 역관이 조엄에게 "물명(物名)을 왜어(倭語)로 적은 책이 사역원에도 있지만, 그것을 차례차례 번역해 베끼기 때문에 오류가 많고, 또 저들의 방언이 혹 달라진 것도 있어 옛날 책을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요즘 왜인들을 만날 때에 그 오류를 바로잡아 완전한 책을 만들어 익히면 방언과 물명을 환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저들과 수작하기에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자, 조엄이 "세 사신이 상의하고 바로잡게 허락해 주어, 현계근과 유도홍을 교정관으로 정하고 수석 역관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는데, 완전한 책을 만들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말은 몇십 년마다 바뀌기 때문에, 첩해신어와 같은 일본어 회화책을 중간했듯이 단어 사전도 만들어 보충하자는 여론이 있었고, 실제로 단어 암기책인 왜어유해가 나온 이후에도 예전의 어휘집을 기회가 날 때마다 한 번씩 수정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초간본과 훗날 보강된 후간본의 내용이 꽤 다르다. 일본에서 왜어유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어휘집 화어유해(和語類解)는 마지막 장에 1837년 10월에 나에시로가와(苗代川)[1]에서 임진왜란 때에 포로로 끌려갔던 도공(陶工)의 후예 박이원(朴伊圓)이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책은 왜어유해에 없는 어휘들도 상당수 실렸다.
上:19a에 秀의 한국어 훈음은 'ᄲᅡ혀날 슈'(빼어날 수)라고 나왔다. 이때 히이ᄔᅦ루[秀, ひいでる]라는 표기가 나왔는데, 왜어유해에서 ㅥ는 매우 드물고 탁음 だ행은 ㅦ으로 보통 표기한다는 점에서 오기일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탁음 だ행의 표기에 ㅦ이 탁음 だ행의 표기에 흔하게 쓰였다. 'ᄕᅦ이'[泥, でい](上:8b), ᄕᅩ[怒, ど](上:23a) 등 다양한 예가 있다.
3. 의의
비슷한 단어 암기책이었던 역어유해(譯語類解), 동문유해(同文類解), 몽어유해(蒙語類解)와 함께 조선 시대 외국어 교육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그리고 첩해신어, 인어대방과 마찬가지로 왜어유해 또한 중세 한국어와 일본어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베껴가 화어유해(和語類解)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서도 수입해서 자주 사용했다. 주로 사쓰마 번(薩摩藩)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이 조선어를 잊지 않기 위해 공부했으며, 풍랑에 표류해 온 조선인들을 위해 통역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어 교재들은 조선어와 일본어가 변해온 자취를 보여주기도 한다.
1835년에 메드허스트가 출판한 구미권 최초의 한국어 어휘사전인 조선위국자휘 역시 천자문(千字文)과 왜어유해를 기본 텍스트로 한다. 다만 메드허스트 본인은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있다. 그래도 구한말 서양인들의 한국어 학습과 연구의 시초가 된 책이라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1] 단군을 제신으로 모시는 옥산궁(玉山宮)이라는 신사로 유명한데, 신사의 제사에서 불리는 노래는 '오늘이 오늘이소서'라는 한국의 시조집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시조와 많이 닮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인들이 지었던 신사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