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올로프 팔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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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로프 팔메와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다.2. 스웨덴 정치인
2.1. 타게 엘란데르
비서 시절 | |
1969년 사민당 전당대회 당시[1] | 타게 엘란데르 퇴임 이후 |
2.2. 잉바르 칼손
2.3. 토르비에른 펠딘
1976년 스웨덴 총선거 양자 토론회 | 1982년 스웨덴 총선거 양자 토론회 |
1976년 2월 21일 외레브로에서 열린 토론회 | 1982년 우메오에서 열린 토론회 |
2.4. 올라 울스텐
올라 울스텐과 올로프 팔메 |
여담으로 스웨덴에서 올로프라는 이름을 사용한 총리는 이 둘뿐이다.[2]
2.5. 예스타 보흐만
1976년 스웨덴 의회 총선거 양자토론에서 맞붙은 올로프 팔메와 예스타 보흐만 |
이 둘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당시 온건당의 대표를 맡고 있던 보흐만은 여러 정책을 두고 사민당과 대립했는데, 특히 1975년에는 보흐만이 조기총선을 요구하며 당시 총리였던 팔메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2.6. 울프 아델손
2.7. 라르스 베르네르
의회에서 대화 중인 올로프 팔메와 라르스 베르네르 |
팔메는 복지국가와 혼합경제를 추진한 반면, 베르네르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요구해왔기에 이러한 이념적 차이가 종종 이 둘을 대립시키곤 했다. 더 나아가 팔메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인권문제를 두고 사사건건 충돌해온 반면, 베르네르는 다소 친소련적인 입장을 견지했기에 발생한 갈등도 없지 않았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강력한 사회안전망, 노동자 권리 증진과 같은 정책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의견을 공유했었기에 둘은 많은 경우에 협력하기도 했다.
아 둘의 관계는 경쟁과 협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스웨덴 정치의 축소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3. 해외 정치인
3.1. 빌리 브란트
이 두 지도자는 특히 개발도상국들과의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발 원조, 부채 탕감, 공정 무역의 확대 등을 옹호했다. 특히 팔메는 이 분야에서 매우 적극적이기로 유명했고, 강대국이 개도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둘은 또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적으로도 자주 협력하는 사이였지만 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있다.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해왔던 브란트는 스웨덴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발트 독일인 어머니를 둔 팔메는 독일어에 매우 유창했다고 한다.
3.2. 브루노 크라이스키
안슐루스 이후 유대인이었던 크라이스키는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떠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했기에 스웨덴어에 대해 어느정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팔메 역시도 상술했듯이 독일어에 유창했다.
3.3. 해럴드 윌슨
다만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는 둘의 입장이 상이했는데, 팔메가 베트남전에 있어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표한 반면, 윌슨은 다소 신중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