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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DCA15><colbgcolor=#1A3051> | |||
출생 | 1931년 6월 23일 | ||
스웨덴 베스테르보텐 우메오 테그 | |||
사망 | 2018년 5월 23일 (향년 86세) | ||
스웨덴 고틀란드 | |||
재임기간 | 제28대 총리 | ||
1978년 10월 18일 ~ 1979년 5월 1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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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마리아 울스텐, 카타리나 울스텐, 니콜라스 보두앙울스텐, 크리스티안 보두앙울스텐 | ||
학력 | 스톡홀름 대학교 | ||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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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제28대 총리.총리 재임 이후에는 토르비에른 펠딘 내각에서 외무부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했다.
1930년대 이후로 자유당 출신인 처음이자 마지막 총리이다.
2. 생애
2.1. 어린시절과 젊은시절
1931년 6월 23일 스웨덴 베스테르보텐 주의 우메오에서 임학(林學) 감독관이었던 아버지 카를 아우구스틴 울스텐과 교사였던 어머니 카타리나 울스텐[1] 사이에서 태어났다.27세이던 1958년, 스웨덴 자유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했다. 1959년에는 미국을 여행하며 미국 공화당 내 리버럴 성향이었던 넬슨 록펠러의 뉴욕 주지사 선거 운동에서 참여하기도 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는 자유당 청년동맹 회장을 지냈고, 1964년에 스웨덴 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2.2. 정계 입문
중앙당의 펠딘, 자유당의 울스텐, 온건당의 보흐만 |
이후 1978년 봄에 당시 자유당의 당수였던 페르 알마크가 사적인 이유로 사임하자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같은해 가을부터는 당대표로서 중앙당 및 온건당과 원전 문제를 두고 발생한 갈등에서 친원전 및 실용주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우파연정의 와해로 이어졌다.
연정이 와해되면 총리가 사임해야하는 스웨덴의 관례에 따라 당시 총리였던 토르비에른 펠딘이 사임하자 이후 어느 정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정부구성에 난항을 겪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울스텐은 자유당 단독 집권이라는 해결책을 내세우며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 해당 정부 구성안에 당시 원내 제1당이었던 사민당이 기권하면서 울스텐 내각이 원내 제4당임에도 불구하고 출범하였다. 스웨덴 법률상 반대가 과반인 175표을 넘지 않으면 내각을 구성할 수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는 당시 스웨덴의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이다.
2.3. 총리 재임기간
울스텐 내각 |
1979년 총선 이후에도 자유당 단독정부를 유지할 계획을 고려했으나 결국 사의를 표명했고, 이후 다시 중앙당, 온건당, 자유당 3당의 우파 연정의 출범과 함께 중앙당 대표였던 토르비에른 펠딘이 총리에 선출되며 359일의 짧은 재임기간은 막을 내렸다.
2.4. 총리직 이후
1982년 의회 일반 정책 토론회에서 대화를 나누는 울스텐과 펠딘 |
해당 총선거에서 기존 38석이었던 자유당이 17석을 잃어 21석으로 의석수가 줄자 당 일각에서 사퇴 요구가 제기되어 1983년 10월 1일 당대표직에서도 물러난다.
이후 캐나다, 바하마, 이탈리아, 알바니아에서 대사직을 역임했다.
2.5. 사망
알바니아 대사직을 마지막으로 조용한 여생을 지내다가 2018년 5월 28일, 고틀란드에서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자연사.3. 평가
3.1. 긍정적 평가
"Ola Ullsten var med och bröt ett nära halvsekellångt socialdemokratiskt maktinnehav och kom att spela en huvudroll under den borgerliga regeringsperioden 1976-82. Han hade ett starkt socialliberalt engagemang och var analytisk och eftertänksam i sitt politiska ledarskap. Han insåg att politiska resultat nås genom samarbete i sakfrågor, ibland även med motståndarna. Han hade ett brett politiskt kunnande som satte avtryck i många av den tidens stora frågor; internationell solidaritet, jämställdhet, den stora marginalskattereformen 1981 och en ansvarsfull energipolitik."
"올라 울스텐은 반세기 가까이 이어져온 사민당의 집권을 종식시키는데에 크게 기여했으며, '76년부터 '82년까지 이어진 우파 연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사회자유주의에 대해 강한 의지을 가졌고, 그의 정치적인 리더십은 분석적이며 사려 깊었다. 그는 정치적인 결과가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협력과 때때로는 정적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가진 광범위한 정치적인 지식은 국제 연대, 양성 평등, 1981년의 거대한 세금 개혁과 책임 있는 에너지 정책과 같은 당시의 많은 큰 문제들에 인상을 남겼다."
얀 비요르크룬드 (前 스웨덴 자유당 대표)
"올라 울스텐은 반세기 가까이 이어져온 사민당의 집권을 종식시키는데에 크게 기여했으며, '76년부터 '82년까지 이어진 우파 연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사회자유주의에 대해 강한 의지을 가졌고, 그의 정치적인 리더십은 분석적이며 사려 깊었다. 그는 정치적인 결과가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협력과 때때로는 정적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가진 광범위한 정치적인 지식은 국제 연대, 양성 평등, 1981년의 거대한 세금 개혁과 책임 있는 에너지 정책과 같은 당시의 많은 큰 문제들에 인상을 남겼다."
얀 비요르크룬드 (前 스웨덴 자유당 대표)
3.2. 부정적 평가
"Samtidigt fanns hos Ullsten ett drag av obeslutsamhet som vid enstaka tillfällen kunde gå över i indolens. Inför svåra avgöranden hade han en tendens att glida undan och avstå från beslut ... jag irriterades av hans slarvighet och obeslutsamhet. Han hade svårt att hålla reda på namn ... Åsikterna om hans lämplighet som partiledare gick isär inom partiledningen och riksdagsgruppen ... 1982 års val blev folkpartiets sämsta val någonsin. Partiledarens ställning kom därmed självfallet i fokus ... Flera valkretsförbund krävde Ola Ullstens avgång ... En stor tidning beskrev läget inom folkpartiet som ett inferno."
동시에 울스텐에는 때때로 태만으로 변할 수 있는 우유부단함이 있었다. 어려운 결정에 직면했을 때 그는 슬그머니 떠나버리고 결정을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그의 부주의와 우유부단함에 짜증이 났다. 그는 주변인들의 이름을 외우는데에도 어려움을 겪곤 했다... 당시 당 지도부와 의회 내에서는 그의 당 대표 적합성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 1982년 총선거는 자유당의 사상 최악의 선거였다. 당 대표의 입장은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 몇몇 선거구 협회는 올라 울스텐의 사임을 요구했다 ... 한 주요 신문은 국민당 내부의 상황을 지옥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비요른 몰린 (前 스웨덴 자유당 의원)
동시에 울스텐에는 때때로 태만으로 변할 수 있는 우유부단함이 있었다. 어려운 결정에 직면했을 때 그는 슬그머니 떠나버리고 결정을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그의 부주의와 우유부단함에 짜증이 났다. 그는 주변인들의 이름을 외우는데에도 어려움을 겪곤 했다... 당시 당 지도부와 의회 내에서는 그의 당 대표 적합성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 1982년 총선거는 자유당의 사상 최악의 선거였다. 당 대표의 입장은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 몇몇 선거구 협회는 올라 울스텐의 사임을 요구했다 ... 한 주요 신문은 국민당 내부의 상황을 지옥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비요른 몰린 (前 스웨덴 자유당 의원)
"Djup skepsis inför Ullstens principlöshet, bitvis svaga tankekraft och bristande ledarförmåga."
"울스텐의 원칙 없는 태도, 부분적으로 사고력이 약하고 리더십이 부족한 상황에서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페르 알마르크(前 스웨덴 자유당 대표)
"울스텐의 원칙 없는 태도, 부분적으로 사고력이 약하고 리더십이 부족한 상황에서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페르 알마르크(前 스웨덴 자유당 대표)
4. 여담
올라 울스텐과 올로프 팔메 |
[1] 혼전 성씨는 뢰스트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