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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09:15:54

오흥 심씨

{{{#!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008B8B> 吳興 沈氏
오흥 심씨
}}}
관향 저장성 후저우시
도시조 주문왕 희창
시조 담계재
중시조 심제량
집성촌 절강성, 장쑤성

1. 개요2. 상세3. 주요 인물
3.1. 남북조 시대3.2. 당 시대3.3. 송 시대3.4. 명 시대3.5. 청 시대3.6. 심가본3.7. 심균유3.8. 마오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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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흥 심씨(吳興 沈氏)는 중국 주나라 전국시대인 BC 500년 경부터 청나라가 멸망하는 AD 1912년까지 절강성(저장성)과 강소성을 세거지로 삼았던 중국 최고의 명문 황족 왕족 귀족 가문이었다.

2. 상세

중국 주나라 추존 천자 문왕(희창)의 10번째 왕자 담계재(희재, 주나라 초대 천자 무왕 희발의 동생)의 후손으로 담계재(희재)가 주나라의 제후국 심나라(沈國)를 건국하였으므로 오흥 심씨는 주나라의 천자족인 동시에 심나라의 왕족이었다.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약소국 심나라는 인접 초강대국 초나라의 보호를 받는 자치속국이 된다. 당시에는 약소국이 강대국의 보호자치국이 되면 약소국 왕세자를 강대국에 볼모로 보내 강대국의 장군으로 임명되는 관습이 있었다. 심나라의 왕세자 심윤술(沈尹戌)도 가족들을 데리고 초나라에 볼모로 잡혀 초나라의 좌사마 대장군으로 임관하였다.

BC 506년 인접 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는데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심나라의 군주 심자가(심윤술의 아버지)를 잡아죽인다.

이에 분노한 초나라가 채나라를 정벌하자 채나라는 오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오나라왕 합려는 손무(손자)와 오자서를 앞세워 초나라를 침략하였다.

초나라는 좌사마 심윤술을 총사령관, 영윤 낭와를 부사령관으로 세워 오나라군에 맞섰지만 낭와의 공명심으로 오나라 손무에게 크게 패하고 심윤술은 자결한다. 이후 초나라 성도까지 점령당해 심윤술의 부인과 막내 아들이 오나라로 끌려갔다. 오나라는 나중에 월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월나라는 다시 초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이 때 초나라의 영윤(수상)이 심윤술의 둘째 아들 심제량(沈諸梁)이었다. 심제량은 초나라가 점령한 약소국 섭국의 제후로 봉해졌기에 섭공(공작)이라고 불렸다. 심제량의 후손들은 심씨를 섭씨(엽씨, 葉)로 성씨를 개칭했다. 그래서 엽씨(섭씨, 葉)들도 심씨와 한 혈통이다. 오흥 심씨들은 이 때부터 오월 지역(절강성과 강소성)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오흥 심씨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이다. 동진 시기에는 심충(沈充)이 대장군 왕돈의 반란에 가담한 일 때문에 관직 진출이 막혔다가, 심경이 낙양을 끝까지 지키다 사망한 것이 인정받아 겨우 복권되었다. 다만 동진 시기에는 진군 사씨나 낭야 왕씨 같은 명문 귀족 가문에 밀려 주목 받지 못 했고, 송나라가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사서에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3. 주요 인물

3.1. 남북조 시대

3.2. 당 시대

예진황후 심씨(睿眞皇后 沈氏)의 5촌 당질(堂姪)이다.

3.3. 송 시대


3.4. 명 시대

심석전(沈石田)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강남의 시화로 알려진 문인 가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항(恒), 숙부 정(貞), 조부 징(澄), 동생 빈(?) 모두 시·서·화에 능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종2품 아장 겸 경략 겸 원임 통판 겸 동지사로 조선에 들어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의 왜군과의 협상에 큰 역할을 하였다.

​ * 영숙현비 심씨(榮淑賢妃 沈氏, ? ~ 1542년) : 명나라 제10대 황제 명 정덕제 주후조(明 正德帝 朱厚照)의 후비(後妃)이다.

​ * 황귀비 심씨(皇貴妃 沈氏, ? ~ 1581년) : 명나라 제11대 황제 명 가정제 주후총(明 嘉靖帝 朱厚熜)의 황비(皇妃)이다.

​ * 안비 심씨(安妃 沈氏) : 명나라 제11대 황제 명 가정제 주후총(明 嘉靖帝 朱厚熜)의 후비(後妃)이다.

3.5. 청 시대

3.6. 심가본

심가본(沈家本, 1840년 8월 19일 ~ 1913년 6월 9일)은 청(淸)나라 말기의 대신(大臣)으로 아버지 심병옥(沈丙莹)은 1845년(도광 25년) 진사에 급제하여 형부주사(刑部主事), 형부낭중(刑部郎中) 등을 지냈다.
심가본(沈家本)은 1883년(광서 9년) 진사에 급제하여 형부낭중(刑部郎中)을 지내고, 1893년 천진지부(天津知府), 1897년 보정지부(保定知府)를 거쳐, 1900년 직이안찰사(直隶按察使)로 있을 때,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8국 연합군(八國聯軍)이 보정(保定)에 진입하자 그 책임을 물어 몇 개월간 옥에 갇혔다. 1901년 옥에서 풀려나오자, 형부우시랑(刑部右侍郎)이 되고, 1907년 헌정편사관(憲政編査館) 1등 자의관(一等 諮議官), 수정법률대신 겸 대리원 정경(修订法律大臣 兼 大理院 正卿), 법부우시랑(法部右侍郎), 1910년 자정원 부총재(资政院 副总裁, 청나라 말기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1년 법부좌시랑(法部左侍郎)을 거쳐,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11월 2일 원세개(袁世凯)는 청나라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청나라의 모든 군권과 대권을 장악하고 신해혁명군을 진압하게 되는데, 심가본은 원세개 내각(袁世凯 內閣)의 사법대신(司法大臣)이 된다. 그러나, 1912년 2월 11일 원세개손문의 밀약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공화정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이 들어서게 되고 1912년 3월 10일 원세개가 손문(孫文)의 뒤를 이어 중화민국 제2대 임시 대총통이 되자 심가본은 사법대신에서 물러난다.

3.7. 심균유

심균유(沈鈞儒, 선쥔루, 1875년 1월 2일 ~ 1963년 6월 11일)는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대법원장이다.
1904년(광서제 30년) 진사에 급제하여 1905년 일본 명문 사립 대학 호세이 대학(法政大學, 법정대학)에 유학하였다. 1907년 청나라로 돌아와 1909년 저장성 자의국 부의장(浙江省 諮議局 副議長, 저장성 지방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절강도독부 경찰국 국장(浙江都督府 警察局 局长, 저장성 경찰청장), 절강성 교육국 국장(浙江省 教育局 局长, 저장성 교육청 교육감)을 지냈다.
1912년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중국 국민당의 전신)에 가입하였다.
1922년 중화민국 북경정부 참의원 비서장(北京政府 參議院 秘書長, 중화민국 북경정부 상원의회 비서실장 겸 사무총장)을 지내고, 1926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북벌군이 저장성을 함락시키고 임시정부를 세우자, 저장성 임시정부 정무위원 겸 비서장(浙江省 临时政府 政务委員 兼 秘書長, 저장성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실장)이 되었다.
1928년 상해법과대학 교무장(上海法科大学 敎務長, 상해법과대학 총장)이 되었을 때, 4·12 사건(四一二 政变, 4·12 정변)으로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3년 중국민권보장동맹(中國民權保障同盟)에 가입하였다.
1935년 상해문화계 구국회(上海文化界 救國会)를 조직하고, 1936년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全國 各界 救國聯合会)를 결성하였다. 같은해 11월, 칠군자 사건(七君子 事件)으로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유명한 칠군자(七君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풀려나, 1939년 통일건국동지회(统一國同志會)를 결성하고 1941년 황염배(黄炎培) 등과 중국민주정단동맹(中國民主政團同盟)을 발족하였다.
1944년 중국민주정단동맹이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으로 개칭되고, 중앙상무위원(中央常務委員)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고, 중국인민구국회 주석(中國人民救國会 主席)을 맡았다.
1946년 중국민주동맹을 대표하여 중국정치협상회의(中國政治協商會議)에 참가하였다.
1947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중국민주동맹을 단속하자 홍콩에서 민주동맹 1기 3중전회를 주재하고, 중국 공산당과 합작할 것이라고 성명하였다.
1949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제1기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인민정부위원(中央人民政府委員)에 당선되었다.
1949년 ~ 1954년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원장(最高人民法院 院長,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 1954년 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 1959년 제2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 1963년 제3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 1955년 제1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부주석(中國民主同盟 中央 副主席)을 역임하였다.
1955년 ~ 1960년 제2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中國民主同盟 中央 主席)을 역임하였다.
1960년 ~ 1963년 제3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中國民主同盟 中央 主席)을 역임하였다.
1954년 ~ 1959년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全國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副委員長,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 1963년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全國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副委員長,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중국정치법률학회 부회장(中國政治法律學會 副會長)을 역임하였다.

3.8. 마오둔

마오둔(茅盾, 모순, 1896년 7월 4일 - 1981년 3월 27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설가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가이다. 자는 안빙(雁氷)으로, 본명은 심덕홍(沈德鴻, 선더홍), 별명은 심안빙(沈雁氷, 선옌빙), 필명은 마오둔(茅盾, 모순)이다. 저장성 가흥(浙江省 嘉興) 출신으로,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1926년 마오쩌둥의 비서를 맡았다. 이후, 중국공산당 문화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에 마오쩌둥의 비서직을 다시 맡았고,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 1949년 ~ 1965년), 초대 중국작가협회 주석(1949년 ~ 1981년), 제4기 · 제5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1965년 ~ 1981년)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연방 방문을 직접 수행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홍위병과 사인방의 공산당 탄압 간부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사인방의 정치적 보호를 받았다. 사망 직전에 후야오방에게 공산당 당적 회복 청원서를 제출하여, 1921년 이후로 문화대혁명 전까지의 중화인민공화국 간부로서의 경력과 활동 등을 인정받아 공산당원 당적을 회복하였다. 중국 인민들에게서 거둔 거액의 인세 수입을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에 기탁하였다. 1981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1982년부터 중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마오둔 문학상이 개최되고 있다. 현대 중국 최고의 장편소설 작가로 평가된다.
아내 공덕지(孔德沚, 쿵더즈)도 중국 공산당원이었고, 남동생 심택민(沈澤民, 선쩌민, 1900년 6월 23일 ~ 1933년 11월 20일)은 중국 공산당 초기 당원으로 28인의 볼셰비키로 활동하면서 제11대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장관, 1931년 1월 ~ 1931년 4월)을 역임하였으나 1933년 34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심택민의 아내 장금추(张琴秋, 장친추, 1904년 11월 15일 ~ 1968년 4월 22일)도 남편을 따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28인의 볼셰비키로 활동하였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방직공업부 부부장(차관)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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