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uby(岡,ruby=おか)][ruby(本,ruby=もと)][ruby(武,ruby= たけし)]
1947년 7월 17일 일본 구마모토현 ~ 1988년? (향년 41세 추정)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일명 요도호 사건)을 일으킨 '적군파'의 멤버이자 텔아비브 공항 테러의 용의자 중 한 명인 오카모토 고조[1]의 형.
2. 상세
교토대학 출신이며 1968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사건[2]에 참가한 적이 있다. 전공투 시대부터 일본 공산주의자 동맹의 간사이 분트를 이르기까지 활동했고 적군파 결성에 기여한 바 있는 인물로 극좌 성향이 강했다. 1970년 북한에 망명하여 1976년에 결혼했다. 결혼 상대는 북한 여성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고치현의 일본인 여성인 후쿠토메 키미코[3]임이 밝혀졌다. 그룹의 멤버들과 결혼한 여성들은 전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었지만 북한의 사상에 대해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반면 후쿠토메만 친북 사상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납북되어 왔다는 설이 많다.이후 평양시에서 거주하다가 1980년 초 적군파의 리더인 타미야 타카마로와 방침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1983년 이후부터는 월북한 동료 테러범들 사이에서도 모습을 감추고 살았다. 이후 알코올중독으로 인민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설도 있고, 여러차례 교화소를 들락거렸다는 설도 있다. 이후 1996년 산사태에 휘말려 부인과 함께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지만 1980년대 말에 어선을 훔쳐 탈북을 시도했고 붙잡혀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정보가 북한을 취재한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나왔다.
요도호 멤버 시바타 야스히로의 아내 야오 메구미의 저서에서 "내가 아는 한, 오카모토씨와 그 부인은 망명 후 요도호 그룹이 주체사상을 따르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뇌 교정을 위해 격리되었고 결국 죽음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했다. 술로 세월을 보낸 것도 이때문이었을 것이고. 부부가 모두 북한의 체제에 녹아들 수 없었던 듯.
하지만 일본 경찰은 오카모토의 사망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걸정적인 단서가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국제 지명수배자로 수배하고 있다. (2024년 3월 한국인 관광객이 촬영한 수배 벽보)[4]
30살이 넘은 오카모토의 두 자녀들은 일본으로 귀국했다.
중학교 동창생인 마츠키 카오루의 누나가 납북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1] 岡本公三, 2명의 공범과 함께 26명을 살해했다. 오카모토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대사에 극형에 처해달라 요청했지만 가석방되어 무슬림이 되었다. 유난히 둘째형 타케시를 존경했다고 한다.[2] 신좌파 학생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도쿄대 혼고 캠퍼스를 점거한 사건[3] 福留貴美子.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홍콩, 북경을 경유하여 북한에 온 것으로 보인다. 야오 메구미의 저서에 따르면 "몽골을 동경해서 그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게 돼 버렸다"고 후쿠토메 자신이 얘기하였다고 한다. 하네다 공항에서 친구에게 전화로 '몽골에 간다'는 말을 남겼다는데 같은 해 8월 후쿠토메의 본가로 '어느 공산국에 와있다, 외국에 좀 더 체제해야 되겠다는 말과 함께 동생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결혼식에 갈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편지가 도착했는데 어째선지 동생의 결혼식 날짜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이상한 것은 1980년 입국에 요코하마의 친구 집에 2일 머물다가 오사카에 들렸다 고향 고치현으로 간다고 해 놓고 오사카 국제공항에서 재출국해 버렸다는 점이다.[4] 노인들 사이에 끼어있는 젊은 남성이 오카모토 다케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