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영화에 대한 내용은 오빠생각(영화) 문서
, 2017년에 방영한 대한민국의 예능에 대한 내용은 오빠생각(예능)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
대한민국의 동요.
1925년 당시 12세의 소녀였던 최순애(1914~1998,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아내.)가 잡지 어린이[1] 에 투고하여 발표한 동시에 작곡가 박태준이 선율을 붙여 만든 곡이다. 열 한살 소녀였던 작사가 최순애는 도쿄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뒤 어린이 계몽 운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던 8세 위의 오빠 최영주를 그리며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서울가는 오빠에게 비단구두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는데 세월이 흘러도 아무 소식이 없는 오빠를 생각하면서 시를 썼다고 한다. 당시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쪽을 보면서 울다가 집에 왔다고 한다.
당시 최영주는 동경으로 유학을 갔으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피해 다시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왔다. 이후 동아일보 수원지국 기자로 일하면서 화성소년회를 결성하였고, 1925년 방정환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개벽사와 색동회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어린이』, 『신여성』, 『학생』 등의 편집 사무를 맡았다. 『소파전집』 출간, 망우리에 있는 소파 방정환 묘비의 건립 등 방정환 기념 사업의 실무를 맡기도 하는 등, 방정환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해방 몇 달 전 사망했는데, 최영주의 묘는 망우리에 있는 방정환의 묘 지척에 조성되어 있다.[2]
동요 오빠생각 때문인지 최영주가 동생인 최순애에게 고운 댕기를 사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끝내 돌아오지 못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최영주가 사망할 당시 최순애는 만 31세의 성인 여성이었기 때문. 더군다나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최순애와 결혼하려 할 때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두 사람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 최영주였으니만큼, 성인이 된 이후 오누이의 관계가 나빴던 것도 아니다.
2. 가사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오빠 말타고 서울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3. 표절의혹
1919년 일본에서 발표된 동요 '하마치도리'를 표절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마치도리'와 끝부분 일부를 제외한 부분의 박자 전개가 유사하다는 것. '하마치도리'는 '오빠 생각'이 지어진 1925년보다 빠른 1920년에 JVC에서 음반이 제작된 기록이 있는데, 새를 소재로 삼은 노래라는 것도 유사하다. 다만 선율의 유사성이 표절이라고 볼 정도는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직접 들어보고 판단하자.1919년 작곡된 일본 동요 하마치도리(浜千鳥 ) |
4. 그 외
- 당시 잡지를 보고 있던 박태준은 바로 그 자리에서 곡을 붙였으며,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시를 보고 크게 감동받아서 당시 13세였던 최순애에게 편지를 보낸 게 결혼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3] 이 부분은 2018년 2월 1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 가사 중 '우리오빠 말타고 서울가시면'이라는 부분이 있지만, 실제로 수원에서 서울까지 말을 타고 갔을 것 같지는 않다. 이 노래가 쓰여진 1924년은 이미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지도 19년이나 경과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 클론이 이 노래를 샘플링한 동명의 곡을 부른 적이 있다.
- 쟁반노래방 2002년 11월 28일 방영분(유재석, 홍록기, 송은이 출연)의 도전곡이며 7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사실 송은이가 가사를 거의 다 알고 있어서 2~3번째 만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2절 첫 소절 가사인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에서 '북'자 1글자 때문에 시간이 걸리게 됐다.[4]
- 1 대 100 27회 후반전에서는 '뜸북새'가 우는 곳을 묻는 문제가 첫문제로 출제되었는데 여기서 순식간에 생존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 이 노래는 가사 이면에 당시 암울한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한국은 일본한테 국가가 점령당한 상태였었기 때문.
[1] 1925년 11월호, 당시 표기로는 '옵바생각'. 시는 1924년에 만들었고 투고를 1925년에 했다고 한다.[2] 윤석중, 「어린이운동의 선구자들」, 『조선일보』, 1961.5.5.[3] 당시 이원수는 15세로, 두 사람은 불과 2살 차였다. 이원수도 고향의 봄을 초등학생 때 지었을 정도로 그 당시부터 이미 문학 재능이 상당히 출중했었다.[4] 심지어 찬스를 2차례나 썼는데도 하필이면 자리바꾸기와 전화찬스였다. 마지막 찬스에서 한 소절 다시 듣기를 통해 가사를 알아내면서 성공했다.[5] 여기선 '북' 부분을 빨리 풀었지만, 7, 8소절에서 고전해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