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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21:16:41

예테보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C3%B6teborg_in_moon_light.jpg
예테보리 (스웨덴)
시장 요나스 아테니우스 [[온건당|]]

1. 개요2. 역사3. 출신인물4. 기타

1. 개요

스웨덴 서부에 위치한 항만 도시이며 제2의 도시이다. 예테보리 항구를 통해 스웨덴의 해상을 통한 수출입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 인구는 약 59만 명, 광역권을 포함하면 약 107만 명으로 스웨덴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며 베스트라예탈란드 주의 실질적인 주도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부산과 비슷한 도시. 또한 예테보리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쭉 내려가다보면 헬싱보리(Helsingborg)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 말뫼까지도 갈 수 있다.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에도 이 루트가 나온다.

ö의 표기법은 대개 이기 때문에 괴텐베르그 혹은 외테보리라는 이름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웨덴어의 ö발음은 그때그때 다르다. 현지 방언을 잘 살려서 발음해보면 야따볼ㄹㄹㄹ리 정도가 된다[1] 스웨덴어 g의 발음은 구개음화 현상 때문에 '이'(반모음 /j/, 영어 y와 비슷한 발음) 비슷하게 될 수도 있는데 ö앞에 g가 결합했을 때 그러하다. 이때에는 ö도 '에' 비슷하게 발음되므로 두 음소를 합쳐 '예'로 적도록 한다. 그래서 올바른 표기법은 '예테보리'. 영어로는 '고텐버그(Gothenburg)'라고 부른다. ö의 점 두개를 무시하고 그대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도 영미권 사람들이 '고테보그' 또는 '고테버그'라 발음하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스웨덴인들도 잘 알아듣는다(…)

2. 역사

파일:external/www.naturproduktion-bh.se/vastergot.gif

배너스보리와 함께 스웨덴의 베스트라예탈란드 주(Västergötland)의 주도이다. 위의 그림은 베스트라예탈란드 '지방(Landskap)'의 지도로, 예테보리 하나만 해안으로 향해있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데 그 이유는 예전에는 북쪽의 보후슬랜(Bohuslän)과 남쪽의 할란드(Halland)가 각각 노르웨이덴마크 영토였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예테보리를 보여준다. 현재 스웨덴은 전통적인 지역 구분 개념인 지방(Landskap)이 아닌 주(Län)를 행정단위로 채택하고 있는데, 베스트라예탈란드 주는 예테보리 위쪽의 해안선도 포함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전체에서 예테보리는 역사 이래로 계속 중요한 도시로 간주되었다. 이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스웨덴과 덴마크는 박터지게 싸웠고, 여러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대서양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창구를 지키기 위해 스웨덴이 들인 노력은 결코 러시아부동항을 찾기 위한 노력에 뒤지지 않는다. 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겨울 동안에는 발트해를 이용하기 힘들 때가 있고, 결정적으로 예테보리가 없으면 스웨덴은 발트 해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선 덴마크 영해인 외레순 해협과 벨트 해협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테보리의 전신은 14세기경 건설된 마을인 뢰되세(Lödöse)이다. 예타 강 하구에 자리잡은 지금의 예테보리와 달리 뢰되세는 예테보리로부터 약 40km 떨어진 내륙에 자리잡고 있었다. 뢰되세는 대서양으로 통하는 스웨덴의 창구이자 무역 중심지로 기능했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후스 성에 주둔 중인 덴마크군과 노르웨이군이 뢰되세를 봉쇄할 수 있다는 위험성으로 1473년 지금의 예테보리가 위치한 앨프스보리 성 근처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 니야뢰되세(Nya Lödöse, 새로운 뢰되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럼에도 이 마을은 여전히 적의 공격에 취약했다.

스웨덴이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이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앨프스보리(Älvsborg) 성 바로 옆에 마을을 새로이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스웨덴의 독립 이후 스웨덴과 덴마크는 완전한 라이벌이 되었고 덴마크는 스웨덴의 유일한 대서양 창구인 니야뢰되세를 차지해 덴마크 본토와 노르웨이를 연결하려 했다.

이를 막기 위해 스웨덴이 치렀던 대가는 막대했다. 북방 7년 전쟁의 결과, 1570년에 체결된 슈테틴 조약에서 스웨덴은 이미 죄다 불타버리고 허물어진 성과 예테보리 일대의 지배권을 돌려받기 위해서 150,000 릭스달러(Riksdaler)를 덴마크에게 배상했는데 이는 스웨덴 전체 국력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스웨덴은 이를 완전히 지불했다.

1603년, 구스타브 1세의 아들 칼 9세가 불타버린 니야뢰되세와 앨프스보리 성을 대신해 예타 강 기슭 북쪽과 건너편 섬에 마을을 하나 세웠다. 그는 새로 세운 마을이 예타 강 바로 옆에 지어졌다는 뜻에서 새로 세운 마을의 이름을 '예타 강의 도시'라는 뜻의 '예테보리'라고 명명했다. 예테보리에는 주로 네덜란드 출신의 상인들과 이민자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해운 강국으로 전성기에 접어든 참이었고 네덜란드의 기술력을 탐낸 칼 9세는 여러가지 당근을 제시해 네덜란드인들을 끌어들였다. 종교의 자유는 기본이며 20년 간 세금 면제에 관세 인하, 심지어 의회에 대표를 파견할 수 있는 권리와 금은화 주조권까지 인정받았다. 이렇게 당근을 제시한 대가로 스웨덴은 네덜란드인의 기술력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짧은 전성기를 누린 예테보리였으나 여전히 적의 공격에 취약한건 매한가지였다. 예테보리 건설과 동시에 앨프스보리 성도 재건했지만 1611년, 칼마르 전쟁 당시 예테보리는 덴마크군에 의해 다시 전소되었고 1613년에 스웨덴은 크네레드(Knäred) 조약을 통해 이 도시를 다시 돌려받기 위해 무려 국력의 30%를 덴마크에 지불해야 했다. Danskjävlar!!! [2] 예테보리는 그만큼 중요한 도시였고, 그 대가는 헛되지 않았다.

1621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불타버린 예테보리를 재건할 것을 명해 오늘날의 예테보리가 세워졌다. 재건된 예테보리는 스웨덴의 서방 창구이자 네덜란드, 독일, 스코틀랜드 등 유럽 각국 출신의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번영하였다. 이후 스웨덴이 유럽 열강 중 하나로 성장하면서 숙적 덴마크를 두들겨 패고 예테보리를 위협하던 직접적 원인인 보후슬랜과 할란드를 할양 받으면서 도시를 향한 위협은 대폭 낮아졌다. 도시의 안전이 보장되면서 예테보리는 스웨덴의 중요 항구로 성장하였고 그 중요성은 스웨덴의 도시 중 유이하게 외국 상인과 교역할 수 있는 도시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18세기에는 스웨덴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어 아시아 국가와의 교역으로 번성하였으며 19세기에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상업 도시에서 공업 도시로 전환하여 스웨덴 제2의 도시라는 지위를 굳혔다. SKF나 볼보 등 스웨덴 유수의 기업이 처음 생겨난 곳도 바로 이 예테보리였다.

3. 출신인물

4. 기타


[1] 대체로 얘때보-리같은 느낌으로 읽는다고 생각하면 된다.[2] 이런 과정은 스웨덴어 위키피디아에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3] 브리기테가 토르비욘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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