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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4:21:27

영불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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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nte[1] Cordial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rmany_GB_France.gif
잡지 PUNCH 지에 1904년 실린 풍자화.[2]
1. 개요2. 배경3. 내용

1. 개요

영불협상 | 英佛協商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영국 프랑스
영어 Entente Cordiale[3] 프랑스어 Entente Cordiale

1904년 프랑스영국 사이의 식민지 문제를 둘러싼 협정.

그러나 이 협정이 역사상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순히 강대국 사이의 식민지 배분을 둘러싼 타협 때문이 아니라, 백년전쟁 이후 수백년의 세월에 걸쳐 대립을 했던 유럽의 영원한 라이벌, 절대로 서로 손잡지 않을 것이라 보았던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맺은 동맹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이다.[4] 여러모로 20세기동맹의 역전.

또한 이 영불협상은 러불동맹영러협상과 합쳐져 삼국협상으로 발전했으며, 이 협상으로 맺어진 양국간의 동맹관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이어져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양국은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게 되고 그 이후로도 쭉 이어지게 된다.

2. 배경

19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 양 측은 모두 외교적 고립 노선을 겪게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프랑스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타의적으로 왕따 외교적 고립을 당한 반면 영국은 '영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내세우면서 자발적으로 고립을 자처한 것이었다.[5]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독일 제국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내쫓은 후 기존의 현실정치(Realpolitik)을 뒤엎고 강력한 확장주의인 세계정치(Weltpolitik)을 표방했다. 독일의 패권주의적인 행보는 빠르게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망쳤고, 이런 외교적 실책에 힘입어 프랑스는 러시아 제국과 러불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영국도 이 시기에 들어와 동맹국을 구하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인 줄루 전쟁보어 전쟁에서 체급에 걸맞지 않는 졸전으로 군사적인 자신감이 대폭 꺾인데다가, 산업화의 후발주자였던 독일이 매서운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던 것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빌헬름 2세가 무제한 건함 경쟁을 선언하면서, 영국의 역린인 해군력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에 영국은 동맹국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영국은 독일과 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에 돌입했지만 독일은 비밀동맹, 영국은 공식동맹을 고집하면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는 독일 측이 '영국이 설마 오랜 원한관계를 가진 프랑스나 러시아와 동맹을 맺겠어?'라는 생각으로 배짱을 부린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외교관계로만 따지자면, 영국은 영일동맹의 일원이고, 프랑스는 러불동맹의 일원이었으니 서로 충돌이 생겨야 정상적이었겠지만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던 양측은 모두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6] 프랑스는 러시아가 일본에게조차 고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단히 실망하여 새로운 동맹국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영국 역시 독일을 견제할 만한 동맹국이 필요했다. 마침내 서로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그로 인해 프랑스와 영국 양국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물밑접촉이 시작되었고,[7] 1904년 4월 마침내 양국은 합의안을 도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동맹관계가 탄생한 것이었다. 이후 1907년 영러협상이 타결되면서 영-불-러의 삼국 협상으로 확대되었지만, 영국은 조약상으로는 프랑스와도, 러시아와도 동맹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꾸준히 영불협상과 영러협상이 군사적 의무를 지니는 동맹이 아님을 강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불-러가 협상국이라 불린 것도 정식 동맹조약 없이 협상만 해서 그런 것이었다.[8]

3. 내용

영불협상에서 양국은 합의 사항을 크게 3개의 문서로 남겨 놓았다.

[1] 어떤 국가들 간의 견해와 이해관계가 동질하다거나,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정책을 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aliance(동맹)와 good relations(선린 관계)의 중간 정도를 의미한다.[2] 맨 좌측 새된 홀로 있는 남자는 카이저 수염에서 알 수 있다시피 독일이며, 중절모를 쓴 남자는 일명 '존 불'이라는 영국의 의인화이고, 삼색기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일명 '마리안'으로 프랑스를 상징한다. JOHN BERNARD PARTRIDGE (1861-1945)의 작품.[3] 프랑스어 철자와 동일하며, 발음은 /ˌɒn.tɒnt ˌkɔː.diˈɑːl/ 이다.[4] 다만 양국이 동맹을 맺은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닌데 펠리페 2세부터 30년 전쟁까지의 합스부르크 가문, 영국-네덜란드 전쟁 당시의 네덜란드, 사국 동맹 전쟁 당시의 스페인, 크림 전쟁 당시의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사례가 있다.[5] 영국이 전통적으로, 유럽 내에서 세력 균형의 추를 자처하면서 이득을 챙기던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외교노선이기도 하다.[6] 영일동맹은 동맹국이 2개국 이상과 전쟁을 벌일 경우 선공이던 후공이던 참가하는 것을 조항으로 삽입했다. 프랑스가 일본에 선전포고하거나 영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거나의 상황이 일어난다면 자동으로 세계대전이 완성되었다.[7] 이전인 1881년 3월 영-프 양국간에 대독일 동맹 회담이 열린 적이 있었지만 양국간 식민지 문제로 인해 파토가 나고 말았다.[8]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정식 동맹조약을 맺어서 동맹국이라 부른다.[9] 이 사항은 기밀사항이었다.[10] 사실 이 사항은 1888년 콘스탄티노플 회담에서 유럽의 주요 열강들 전부가 합의한 사항이었는데 프랑스가 승인을 보류하는 바람에 효력이 정지되었다가 영불협상을 기점으로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수에즈 운하의 운영권은 쭉 영국이 가지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를 국유화했다. 이에 영국은 격노하여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이집트를 탈탈 털고 수에즈를 점령했지만, 소련과 미국의 협박으로 철수하여 결국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독자적인 핵개발을 추진하여 양국 모두 핵보유국이 되었다.[11] 세네갈(당시 프랑스령)과 감비아(당시 영국령)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었다.[12] 기니(당시 프랑스령) 해안에 위치한 작은 섬이었다.[13] 나이지리아(당시 영국령)와 니제르(당시 프랑스령).[14] 덕분에 태국은 세계에서 단 4개국만이 누렸던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었고, 식민지도 아니었던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일본도 태국을 합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15] 이는 양국이 결국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공동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합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