冉牟
(? ~ ?)
1. 개요
고구려 고국원왕 때의 장수.2. 행적
많은 공을 세워 자신의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그 관등은 대형(大兄)에 이르렀다.사서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그 후손인 모두루의 묘지명에서만 그 존재가 언급되는 인물이다.[1]
모두루 묘지명의 기록에 따르면 염모의 선조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세울 당시에 함께 남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문은 대대로 고구려 왕실을 섬겨왔다. 즉 염모는 고구려 초창기 때부터 존재했던 상당히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왕실 직속 가신 집안의 출신이었던 것이다. 염모의 관등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유서 깊은 가문인 만큼 고구려 태왕가에서는 꽤 신임받았을 것이다.
이후 염모는 고국원왕 때에 반역 사건을 평정하였으며, 북부여 지방을 침략해온 모용선비(전연)를 격퇴하였다.[2] 염모는 큰 공을 세운 덕분에 북부여의 수사[3]에 임명되었으며, 그 가문이 대에 걸쳐 관직과 토지, 예속민 등을 하사받는 등 왕실의 은덕을 입었다고 한다.
이후 염모의 가문은 대대로 북부여 수사의 직책을 맡았으며, 그의 손자인 모두루 또한 광개토태왕 때에 북부여 수사가 되었다고 한다.
모두루 묘지명에는 묘지의 주인인 모두루에 대한 기록보다 그의 할아버지인 염모의 기록이 더 많아서 한때 묘지의 주인이 모두루가 아닌 염모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는 비문에서 모두루의 생애를 다룬 부분의 훼손이 심각하여 그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염모가 세운 공이 모두루의 가문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훗날 한강 유역의 아차산 일대 보루군 고구려 유물 중 염모형(冉牟兄)[4]이라고 표기된 접시가 발견된 바 있다. 때문에 장수왕 대에 염모의 후손이 한성백제 공략에 참여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순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1] 후손인 모두루는 염모의 손자인 것으로 여겨진다.[2] 특히 북부여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났던 곳이라 고구려에서는 대대로 신성한 땅으로 여겨왔다.[3] 일종의 지방장관과 같은 직책.[4] '형' 부분은 관등 혹은 직책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