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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16:56:39

여시아문

고사성어
같을 여 바를 시 나 아 들을 문

여시아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개요2. 해석3. 기타

1. 개요

여시아문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뜻으로, 여기서 '나'는 결집에서 불경을 암송했던 십대제자 중 하나인 아난다를 가리킨다. 거의 대부분의 불경이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며, 아문여시(我聞如是), 문여시(聞如是)라고도 한다. 경전의 발음을 그대로 음차해서 이염마수단(伊焰摩須檀)이라고도 한다.

한국어로 번역될 때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등으로 번역된다. 조금 더 의역해서 "나 아난은 이렇게 보고들은 것을 나의 사견 전혀 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1]

원어인 팔리어로는 evam me suttam, 산스크리트어로는 evam mayā śrutam(एवं मया श्रुतम्, 에왐 마야아 슈루땀)이다. 티베트어로는 Hdi skad bdag gis thos pa[2]이다. 그리고 영어로는 Thus I have heard로 번역되며, 일본어로는 "뇨제가몬"이라고 음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독으로 적으면 是の如きを我聞きき(코노코토키오 와레키키키)가 된다.

직역하면 '이와 같이 나에 의해 들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의지로 들은 것이 아니라, 부처가 말한 대로 나에게 들린 것을 그대로 여기에 전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문장이 수동태로 쓰여졌고, '듣다'라는 동사가 아니라 '들린'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였다. 게다가 인칭대명사 또한 '나'의 도구격(mayā)을 사용하여 수동태 문장의 의미상 주어를 드러내었다.

불교 경전에서는 육성취라 하여 대부분의 경전에 여시아문 외에도 일정한 체제에 따라 기재하도록 한다. 그 체제는 다음과 같이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如是我聞, 一時佛在某處[3], 與大比丘衆某某[4]俱.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에 계시며 큰 비구 □□ 등도 함께 계셨는데...

여기서 여시(如是)는 신성취(信成就), '이와 같이'라는 뜻으로 '이와 같음'(모든 경의 법체), 아문(我聞)은 문성취(聞成就) 즉 '나(아난)에게 들려 주셨다'는 것(전달자), 일시(一時)는 시성취(時成就) 즉 그 불경의 법어가 나오게 된 시기, 불(佛)은 주성취(主成就), 즉 불경의 법어를 설법하는 주체 즉 석가모니 부처를 말하며, 재모처(在某處)는 처성취(處成就), 즉 법어의 설법이 이루어졌던 장소, 여대비구중모모구(與大比丘衆某某俱)는 중성취(衆成就) 즉 그때 아난과 함께 설법을 들었던 비구 및 보살들의 수와 이름이 들어간다.[5] 다른 예시로 금강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역문)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음독)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
(해석)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슈라바스티)의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무리 1250인과 함께 계셨다.

이 여섯 가지가 합쳐져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이 성립되기 때문에 육성취라 부른다. 이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즈음에 아난이 직접 석가모니에게 "여래 멸후에 법장(法藏)을 결집 편찬할 때 첫머리에 무슨 말을 두어야 되겠습니까?"라고 답을 구하자, 석가모니는 모든 불경의 첫머리에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불(一時佛) 재모방모처(在某方某處) 위제사중(爲諸四衆) 이설시경(而說是經)이라 하라."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해진다.# 불교식 육하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경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입적한 후에 아난다가 사부대중을 모아 경전을 결집(結集)하면서 자리에 올라가 맨 처음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네 글자를 소리내어 불렀을 때,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대중은 모두 "바로 어제까지 부처님을 뵈었는데 오늘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말하고 있구나. 정말 부처님께서는 이제 열반에 드셨고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단 말이냐?" 하며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고 한다.

2. 해석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란 자신에 의해 일어난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앞의 청문(聽聞)을 설명하고, ‘이것은 내가 네 가지 담대함[四無畏]과 열 가지 힘[十力]를 갖추고, 우왕(牛王)[6]의 지위에 있고, 사자후를 하며,[7] 일체 존재의 최상자, 법의 자재자, 법왕, 법주, 법의 섬, 법의 귀의처, 정법의 최상전법자이고 정각자인 저 세존의 면전에서 직접 들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미 또는 법 또는 형식에 대해서 의문이나 의심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모든 천신과 인간이 이 법에 대한 불신(不信)을 소멸시키고, 믿음의 성취를 일으키고 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고타마의 제자는 말하면서 가르침에 대한 불신을 없애고 믿음을 키운다.
디가 니까야, 범망경(梵網經) 주석서, DN-a, I, 29
불법의 대해는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고, 지혜로 건널 수 있다. “이와 같이”의 의미는 바로 믿음이다. 만약 사람의 마음에 깨끗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불법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불법에 들어갈 수 없다. 믿지 않는 자는 “이 일은 이와 같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믿지 않는 모습이다. 믿는 자는 말한다. “이 일은 이와 같다.” 비유하면 소가죽이 부드럽지 않을 때는 구부리지 못하는 것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도 이와 같다. 비유하면 소가죽이 이미 부드럽다면, 쓰임에 따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다.
대지도론(大智度論) T.25, 62하~63상. “모든 불경은 어찌하여 처음에 “이와 같이”라는 말을 하는가?란 질문에 답하여.

초기 불교의 전승은 붓다의 열반 후, 제1차 경전 결집에서 마하가섭이 주도하여 정리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25년째 되는 해부터 석가모니의 시자(侍子)로써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었던 제자 아난다[8]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말로 서두를 떼며 불경을 암송하였고, 당시 결집에 모인 5백 명의 참가자와 함께 이를 합동으로 통째 암송해서 전했다. 이때 '여시아문'은 아난다가 듣고 붓다가 말한 것을 증명하는 표현으로 경전의 첫 머리에 제시되었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동시에 당시 모인 5백 명의 비구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석가모니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은 결집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또한 불경의 최초 문자화는 불교계에서는 제3차 경전 결집(파탈리푸트라 결집)이 있었던 기원전 244년의 일로 보는데, 이 제3차 경전 결집을 주도한 인물이 호불(好佛)의 군주로 유명한 아쇼카 대왕(기원전 304-232년)이다. 제3차 경전 결집 무렵까지 불교 승가는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문자로 접한 게 아니라 구전으로 듣고 전한 것이 되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이러한 초기 불자들의 체험에 부합하는 도입부였다고 할 수 있다.[9]

리처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알렉산더 윈(Alexander Wynne), A. K. 워더(A. K. Warder)와 같은 불교학자들은 이들 초기 불전에 역사적 부처 자신 또는 적어도 부파 불교 이전의 원시불교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호진 비구는 『무아 · 윤회 문제의 연구』(2015)에서 불경이 문자로 고정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10] 스리랑카에서라고 했는데, 이미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마찬가지로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패엽경들이 발굴된 점을 감안하면 불경의 최초 문자화는 스리랑카에서만 이루어졌던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볼 여지도 있다.

3. 기타



[1] 아미타경언해 등 15세기의 언역 불전에는 "如是我聞ᅀᆞᄫᅩ니"(如是我聞하사옵시니.)라고 훈토를 달고, "이 ᄀᆞᆮ호ᄆᆞᆯ 내 듣ᄌᆞᄫᅩ니"(이 같음을 내 듣잡오니/듣자오니.)로 번역했다.[2] 이와 같이(Hdi skad)/내가(bdag gis)/들었다(thos pa).[3] 여기서 모처는 불경에서 때로는 기수급고독원, 죽림정사, 영축산 등 수시로 바뀐다.[4] 여기서 모모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해당 경전의 법어를 설법하였을 때 설법하는 자리에 있었던 석가모니의 제자 및 보살들의 이름이 들어 간다.[5] 단 비구 및 보살들의 세세한 이름은 경전에 따라 생략될 때도 있다.[6] 인중우왕(人中牛王)의 줄임말로 소의 몸집과 빛깔이 다른 소보다 훨씬 훌륭한 것, 즉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킨다.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구절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구절과 통한다.#[7] 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자는 석가모니 부처와 그 설법이 지니는 위엄을 은유하는 상징물로 쓰인다.[8]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서도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일컬어졌다.[9] 전근대 시대에는 중요한 내용을 문자로 기록해서 정리해 전하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능력을 중시했던 것처럼 보이는 사례가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불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본질상 구전으로 선포되는 복음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도 파울로스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3:6)라고 코린토스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에 쓰기도 했는데,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권위를 인정은 해도 '교사'의 살아 있는 가르침과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구두전승의 권위 역시도 강력히 주장했다. 신약성경을 구성하는 4대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는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입말을 통해 전해 내려온 자료, 구전되는 기억이었으며, 코덱스는 메모, 혹은 초고를 기록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초기 교회의 대다수 신자는 복음서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원재료를 모아 놓은 문헌'이자 어떤 중요한 역사 기록으로는 봐도 그 자체로 완결된 문헌으로 간주하지는 않았고 구약과 같은 경전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예수를 알았던 이들이, 나중에는 이 사람들을 알았던 이들이 매주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고, 이야기를 듣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입장이 이야기에 점차 스며들고, 공동체의 요구와 문제가 이야기에 담겨 살이 붙었으며, 그 살이 붙어서 불어난 이야기가 문자가 되고, 그 문자로 남은 '기록'으로서의 복음서가 초창기의 전승을 오롯이 전하는 것처럼 굳어져 단순한 메모 내지 초고에서 '경전'으로까지 위치가 격상되게 되었다는 것이다(윌리엄 슈니더윈드 저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에코리브르, 2006년 및 존 바턴 <성서의 형성-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비아, 2021년, 53~4쪽 및 136~7쪽). 이러한 사도 및 초창기 설교자들로부터의 구전 전승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전(聖傳) 또는 거룩한 전승이라고 부르는데, 라틴어로는 Traditio, 그리스어로는 Paradosis이다. 그리스도교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서의 형성이 1) 예수의 공생애 2) 사도들과 초창기 설교자들로부터 구전된 전승 3) 복음사가들에 의한 복음서 집필 단계를 거쳤다고 보고 있으며, 복음사가들의 복음서 집필 단계에서 기존의 기록물들과 구전 전승들이 '배열'되고 '가필'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며(<신, 구약성경 기초지식> 생활성서사) 3세기 초부터 이러한 '거룩한 전승'은 문자화된 기록인 '성서'의 복음 내용과 같은 것으로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입을 통해 물려 주신 진리의 계시에 성서 내용과 무관한 것은 없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교회의 '거룩한 전승'은 종교개혁 이후 '오직 성경만으로'를 외치던 프로테스탄트(신교)에 의해 처음으로 공격받았고, 점차 변화하게 되었다.[10] 에띠엔 라모뜨는 기원전 35년에서 기원전 32년 사이에 팔리어로 불경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보았고, 라 발레푸생은 기원전 89년의 일이라고 했다. 에띠엔 라모뜨나 라 발레푸생이 말한 시점이나 현존하는 불경의 최고 상한 연대는 모두 기원전 1세기에 해당하고, 이보다 백여 년쯤 전에 제4차 결집이 있었는데, 제4차 결집에 대해서 자료들이 스리랑카에서 있었다고 하고, 또 다른 자료에서는 카슈미르 쪽에서 있었다고 해서 학자들에 따라 설이 좀 많이 나뉜다. 제3차 결집과 마찬가지로 제4차 결집은 일부 문헌에서만 보이기 때문에 과연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11] 남방 불교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자현 비구의 강의를 참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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