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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04:03

엔리케 과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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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과이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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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세리에 A 로고.svg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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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파일:엔리케 과이타.jpg
이름 엔리케 과이타[1][2]
Enrique Guaita
출생 1910년 7월 11일
노가야[3]
사망 1959년 5월 18일 (향년 48세)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포지션 아웃사이드 포워드, 스트라이커
신체 172cm | 체중 73kg
소속팀 에스투디안테스 (1928~1933)
AS 로마 (1933~1935)
라싱 클루브 (1936~1937)
에스투디안테스 (1938~1939)
국가대표 2경기 1골 (아르헨티나 / 1933)
10경기 5골 (이탈리아 / 1934~1935)
2경기 0골 (아르헨티나 /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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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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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클럽2.2. 국가대표팀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
5.2.1. 아르헨티나5.2.2. 이탈리아
5.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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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2. 생애[5]

2.1. 클럽

2.1.1. 에스투디안테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외의 마을 노가야 출신인 과이타는 오리운디였고, 아버지의 지원 아래 축구를 시작했다. 과이타는 재능이 있던 소년이었고 에스투디안테스의 유스 아카데미에 들어가 1군에는 17살이던 1928년 4월 12일에 데뷔했다. 그리고 CA 인데펜디엔테를 상대로 데뷔전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6]

초반 3년의 기록은 정확히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기록이 남아있는 1931년부터 과이타는 65경기에 출전 32골을 기록하였다.

2.1.2. AS 로마

1933년, 과이타는 팀 동료 알레한드로 스코펠리, 안드레스 스타냐로와 함께 AS 로마의 유니폼을 입었다. 데뷔전은 바이에른 뮌헨과의 친선경기였고, 첫 경기에는 다소 부진했다. 하지만 곧 적응을 끝마쳤고 적응 이후에는 순조롭게 경기에 참가했다. 세리에 A 데뷔 성적은 32경기 14골. 특히 2번째 상대였던 피오렌티나와의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며 팀에 승리를 안겼고, 그에게 로마 팬들은 Il Corsaro Nero(검은 해적)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는 29경기에 출전, 28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A 득점왕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과이타의 활약에 힘입어 로마는 4위로 시즌을 마쳤다. 팀의 선전에 자극받은 로마의 보드진은 팀의 문제점을 찾아보았고 그것은 수비라는 결정을 내렸다. 1934-35 시즌 당시 로마는 63득점과 38실점을 기록하여 골득실 마진이 +25로 당시 세리에 A 참가팀 중 가장 좋았지만 로마보다 윗 순위에 위치한 팀들은 20점대 초반의 팀 실점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로마에는 귀도 마제티라는 뛰어난 골키퍼가 있었기 때문에 작년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풀백들인 루이지 알레만디, 에랄도 몬첼리오를 모두 영입하는 화끈한 투자를 선보였고 추가로 노장 공격수 레나토 카타네오까지 영입하여 우승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과이타의 주동으로 스코펠리, 스타냐로가 1935-36 시즌 개막 전날이던 9월 19일에 야반도주를 해버린 것! 비아 파올리나의 막사에서 강연을 돕던 그들은 갑작스럽게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인한 징병의 두려움[7]에 휩싸였다. 그렇게 차로 라스페치아로 이동한 후, 기차로 벤티밀리아로, 그리고 프랑스에서 배로 아르헨티나돌아가 버렸다. 실제로 20만 명 정도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전쟁에서 죽거나 다쳤기도 했고 축구 선수라고 징집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한 실수였다. 하지만 정작 당시 AS 로마 동료들도 그렇지만 루이스 몬티라이문도 오르시 등 같은 오리운디를 포함한 월드컵 당시 동료 누구도 전쟁에 끌려간 선수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AS 로마는 볼로냐, 토리노, 암브로지아나 인테르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지만[8] 승점 단 1점 차이로 볼로냐에게 첫 우승컵까지 내주고 말았으니 로마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해의 팀 득실을 보면 더욱 황당한데 목표한대로 시즌 팀 실점은 20점으로 줄여 최소 실점팀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공격진의 파괴력이 떨어져 팀 득점은 전 시즌의 절반 수준인 32득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의 광풍이 휘몰아 치던 시기. 아무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명분 따위는 카수 마르주 속의 구더기들과 함께 씹어먹어버린 전쟁이라고 해도 병역 기피는 병역 기피였고 덕분에 과이타는 이탈리아 팬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탈리아 측에서 이들의 입국을 거부해버렸다.

2.1.3. 귀향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라싱 클루브와 친정팀 에스투디안테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라싱 클루브에서는 57경기 28골로 기량에는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망에 대한 소문은 아르헨티나에까지 따라왔고 계속된 비난에 못 이겨 1939년에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팀

아르헨티나에서 단 2게임을 뛰고, 이탈리아시민권을 얻었다. 그 이후에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활약했는데 데뷔전 상대는 당시 유럽 최강팀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 경기에서 과이타는 2골을 넣었지만 이탈리아는 2대4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 경기로 인해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비르지니오 로세타는 국가대표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월드컵에는 총 4게임을 뛰었고, 준결승전이던 대 오스트리아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월드컵 이후에는 하이버리의 전투에도 참가했지만 여기에서 과이타는 부상을 입어 잠시 리그 출전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나온 이후엔 다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활약하여, 193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2.3. 이후

29살에 축구계에서 은퇴한 이후, 바이아블랑카 감옥의 관리자가 되었지만 정치적 문제로 인해 얼마 가지 못했고, 이후에는 가난 속에서 살았다. 48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9]

강력한 육체를 갖지는 못했지만, 용기 있는 플레이를 즐겼고 양발 사용에 능해 모든 공격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또한 빠른 스피드와 함께 중거리 슈팅 능력도 있었고, 기술도 뛰어났다.

1934년 월드컵때는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대회 베스트 11에 오르기도 했고, AS 로마에서는 센터 포워드로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했다.
과이타는 다재다능했고, 네트 아래에서 그는 가장 아름다운 물의 기회주의자였다: 그는 기회를 포착하는 데에도 능했고, 주목할 만한 스피드와 그를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게 하는 용기가 있었지. 하나의 독수리 같았어. (중략) 내가 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나는 과이타를 찾았어. 그를 저녁 식사에 부르면서 몬티, 데마리아, 체사리니도 같이 초대했지.[10] 과이타는 따뜻하게 나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바이아블랑카에서 떠날 수 없다고 하더군. 사실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바이아블랑카의 감옥 관리자 자리를 그만두게 되고 건강이 안 좋아졌었나봐. 그는 고상하면서도 잘 교육받은 면도 있었고, 진지하고 단정하면서 절제된 사람이었지. 이탈리아에서 정확히 군에 있었던 사람은 드물 거야. 그게 나로 하여금 자책하게 만드는 하나의 이유야. 그게 내 마지막 남미 여행인데, 조금 더 시간을 내서 바이아블랑카에 가 그를 만났어야 했어. 그는 내 맘 속에 아직 파란 셔츠를 입은 채로 남아있거든.
비토리오 포초[11]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2.1. 아르헨티나

5.2.2. 이탈리아

5.3. 개인



[1] 이탈리아식으로 엔리코 과이타(Enrico Guait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엔리코 과이타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2] 상당수 문서에는 루카스 곤살레스가 과이타의 미들 네임으로도 기록되어 있다.[3] 위키백과에서는 루카스 곤살레스가 출신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미들네임으로 루카스 곤살레스가 들어있는 문서도 꽤 많다.[4]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5] 출처: http://storiedicalcio.altervista.org/blog/guaita.html[6] 다만 RSSSF의 리그 기록에 올라있지는 않은 것으로 미뤄볼 때 친선 경기였을 가능성이 높다.[7] 이 원인에 대한 소문으로 잘로로시(AS 로마의 별명)을 시기하는 누군가가 퍼뜨린 소문에 과이타가 낚였다는 이야기가 있다.[8] 4팀의 승점차가 4점이었다. 하지만 당시 승리팀에 주어진 승점은 2점이었다.[9] 출처: http://www.enciclopediadelcalcio.it/Guaita.html, 위키백과[10] 이 때 라이문도 오르시는 너무 멀어서 초대에 응하지 못했다.[11] 출처: Calcio e Ciclismo Illustra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