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 ||
이름 | 에릭 브룩 Eric Brook | |
출생 | 1907년 11월 27일 | |
잉글랜드 사우스요크셔 주 맥스버러 | ||
사망 | 1965년 3월 29일 (향년 57세)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등번호 | 맨체스터 시티 FC - 10번 | |
직업 | 축구 선수 (아웃사이드 레프트 / 은퇴) | |
소속 | 선수 | 반즐리 FC (1925~1928) 맨체스터 시티 FC (1928~1939) |
국가대표 | 20경기 10골 (잉글랜드 / 1928~1937, 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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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선수 시절 맨체스터 시티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로 세르히오 아구에로 이전 맨시티 구단 역대 최고 득점자였다.
2. 클럽 경력
2.1. 반즐리 FC 이전
1907년 에릭 브룩은 요크셔 타운의 맥스브루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이 태어난곳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에서 활동하다가 웨스 아틀란틱과 계약을 맺었으며 세미프로 수준의 리그에서 뛰다가 1926년 반슬리에서 본격적인 프로 축구선수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2.2. 반즐리 FC
브룩은 반슬리에서 78경기 18골을 기록했으며 왼발을 상당히 잘 써서 반슬리의 중추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2.3. 맨체스터 시티 FC
1928년, 에릭 브룩은 자신의 팀 동료 프레드 틸슨과 함께 6000파운드의 이적료를 받고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그리고 3월, 그림시티 타운 FC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갖게 된다. 브룩은 그 후 클랩턴 오리엔트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하며 팀은 5-3으로 이기게 된다.1928-29시즌 브룩은 42경기 14골을 기록한다. 이시즌중에서는 자신의 팀 동료 토미 존슨이 38골을 기록 하였으며 이 때의 브룩의 몸상태는 최고의 상태였다고 말하였으며 잉글랜드 국가대표의 소집을 받게되었으며 아일랜드를 상대로 첫 출전하며 잉글랜드의 유망주로 불리었다.
브룩은 잉글랜드 국가대표 팀에서 18경기 10골을 기록하였다. 브룩은 잉글랜드에서 더 많이 뛰었을수도 있지만 아스날의 경쟁자 클리프 바스틴이라는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출전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브룩과 바스틴을 묵히긴 아까웠는지 함께 경기를 출전했을때도 있었다. 브룩과 바스틴이 같이 출전했을때에는 종종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가며 경기를 진행했다고 한다.브룩은 국가대표 경기보단 국가대표팀의 연습 상대로 많이 출전했다고 한다.
1929-30년 시즌에는 맨체스터 시티를 리그 3위로 올려놓는 등의 활약을 펼친다. 그 후 1930-31 시즌 맨체스터시티는 여러명의 공격수를 영입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룩은 팀내 최다 득점자였다. 가끔 센터 포워드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31-32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fa컵 준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자신의 라이벌 클리프 바스틴에게 1실점을 하며 맨체스터 시티는 준우승으로 만족해야만 하였다.
브룩은 이런 씁쓸함을 뒤로 하고 맨체스터 시티에서 많은 골과 경기를 뛰며 맨체스터 시티의 전설이라 불리는 선수가 되었으나 자동차 사고로 두개골 부상을 당하여 은퇴를 하였으며 전쟁이 끝난후 브룩과 바스틴이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빠지자 잉글랜드는 이빨 빠진 호랑이 처럼 공격력의 부재에 시달려야 했다. 그후 브룩은 자신의 동료들이 축구 커리어를 이어가지만 브룩은 자신의 고향에서 축구코치가 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난후 브룩은 핼리펙스에서 바텐더, 크레인 운전사 일을 하였으며 1965년 자신의 집에서 사망하게 된다.
3. 여담
-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이유가 상당히 독특하다. 과거엔 한국에선 아는 사람을 찾아보기 굉장히 힘들었지만, 피파 온라인 4에서 이 선수가 출시되고 난 후엔 알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런 선수가 되었다
(...)
-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전 까지 잉글랜드에서 브룩보다 골을 더 많이 넣었던 선수는 클리프 바스틴과 찰리스 밤비지 밖에 없었다고 한다.
- 종종 팀의 골키퍼가 부상당하면 대신 골키퍼로 뛰기도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