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야마토급 전함의 실전 이력을 서술한 문서.2. 상세
1번 함 야마토의 확실한 전과는 사마르 해전에서 구축함 1척 공동 대파에 불과하다. 이설이 있는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와 구축함 호엘 공동격침을 포함시킨다 해도 확실한 전과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2021년 4월 4일 필리핀 해저에서 탐사를 하던 유인 잠수정이 존스턴을 발견했는데 이 탐사에 참가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존스턴을 격침시킨 건 야마토라고 한다. 그러나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쫓겨서 도망가는 바람에 작전을 말아먹은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 덕분에 다큐멘터리 <실전최강 전투기대전 시즌1 야마토 전함과 세기의 공중전>에서도 "야마토에겐 아무런 영예도 없었다"며 조롱거리가 되었다.그래도 대공포로 적기를 격추한 전과는 약간 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야마토와 무사시가 수량 미상인 적기를 격추했다고 한다. 그리고 야마토의 최후 전투는 실제로 격추한 대수는 불명이며, 미군의 피해는 일본군 함선의 대공포화에 비행기 5대가 격추, 52대가 손상을 입어 그중 5대가 수리 불능으로 버려지고, 2대가 해상에 불시착, 1대가 가던 중 원인불명으로 추락하여 총 13대를 손실했으며, 인명 피해는 전사·실종자 총 13명이었다.
2번 함 무사시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부러 밝게 도색해서 미군의 화력을 끌어오는 탱킹 역할을 수행하다가 방어력을 상회하는 집중 공격을 맞이해서 폭탄과 어뢰를 신나게 얻어먹고는 포격전에 참가하기 한참 전에 격침당한 상태였다. 그래도 무사시가 입은 피해는 어뢰 20발, 폭탄 17발 혹은 어뢰 10발, 폭탄 16발 명중으로 추정되어 단일함에게 이정도의 맹공이 퍼부어진 경우는 적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탱커로서의 역할은 충실하게 수행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대함 전과는 더 별 볼 일 없어서 마지막 전투말고는 전투에 참여한 전과가 없다.
3번 함 시나노는 아직 미완성인데다가 항공모함 부족으로 인해 항공모함으로 개장했고 그마저도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마무리 공정과 함재기의 인수를 위해 구레항으로 가던 중 상황 오판과 불운이 겹쳐 울프팩이라 불리는 잠수함 전대도 아닌 단 한 척의 잠수함에게 걸려서 어뢰 단 네 발을 맞고 용궁으로 갔다.
3. 미드웨이 해전, 그리고 해상 호텔
1번함 야마토는 취역한 이후에 나가토로부터 연합함대의 기함 역할을 물려받고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지만,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전장에서 3,300km. 대략 12,800리나 떨어진 곳에서 연합함대 기함 역할만 했기에 실제로 야마토가 18.1인치 거포로 전투하는 일은 없었다.그 후로 야마토급 전함은 오랫동안 해군의 상징으로 아껴졌는데 당연히 전투에 참가할 일도 없으니 그 잘난 18.1인치 포로 공을 세울 일도 없고 진짜 해상호텔 노릇만 톡톡히 했다. 그러다 전함 무사시가 취역하자 1943년 말 총기함 임무를 교대해 이제서야 태평양으로 나서게 된다. 무사시 역시 무사시 료칸으로 호화숙박시설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결과로는 이런 개념으로 최신예 전함을 놀려두고 있었기에, 전공이 없음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4. 어뢰 피격
1943년 12월 25일, 요코스카에서 트룩으로 병력과 장비를 수송하던 야마토를 포함한 수송 함대는 트룩섬 서방 290㎞ 거리에서 미국 발라오급 잠수함 스케이트(USS Skate)에게 발각되었다. 스케이트는 야마토를 목표로 어뢰 4발을 발사, 이 중 한 발이 3번 주포탑 우현 벌지(Bulge)에 명중했다. 어뢰 벌지라는 물건은 어뢰를 막으라고 달아놓은 것이기에 원래대로라면 탈이 안 나야 하겠지만, 이놈의 벌지가 어뢰에게서 받은 충격을 미처 흡수하지 못하면서 H빔 부분을 정확하게 타격해 이에 망치로 못을 박듯 밀려나간 H빔에 의해 장갑 체결부가 벌어져 버렸다.야마토는 일부 일본인들이 주장한 것처럼 어뢰가 맞은 것도 모르고 간 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3000톤 바닷물을 먹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꽤나 중대한 손상을 입었고, 트림 조절을 해서 겨우 함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결국 구레로 돌아가 수리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5. 필리핀 해 해전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을 핑계삼아 전장은 나가지도 않으며 그 비싼 야마토 전함을 호텔로만 써먹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한 수송기가 미군에게 격추당해 사망하자 연합함대 수뇌부는 함대결전을 지휘한다는 명목도 내팽개쳐버린다. 이후 연합함대 사령부는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 코가 미네이치에 의해 무사시에서 필리핀 다바오로 옮겨지지만 코가도 탑승했던 비행정이 사고로 조난되며 행방불명, 순직 처리된다.역설적으로 야마토에는 이것이 기회가 되었다. 수뇌부들의 간섭이 사라지자 오자와 지사부로는 연합함대 편제를 항공주병에 맞춰 재편하면서 경항공모함과 전함을 주축으로 하는 전위부대가 미군의 압도적인 항공전력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를 기대했지만 이 조치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본대의 주력 항공모함은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눈에 띄는 전과나 피해는 없었지만, 이 전위부대에 참여한 것이 야마토에게는 첫 실전이 되었다. 그러나 6월 19일 야마토의 첫 실전 포격은 후방 본대에서 발진한 일본군 공격대에 대한 팀킬이었다.[1] 진짜 적에 대한 첫 실전 포격은 그 다음날 3식탄을 사용한 대공사격 27발이 최초가 되었다.
6. 레이테 만 해전
제국의 흥폐(興廃)가 걸린 함대결전이 일본의 참패로 끝나자 코가 미네이치의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타 소에무를 비롯한 연합함대 사령부는 본토로 도망치면서 잔존 함대에는 미 육군 수송선단과 동귀어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오자와가 이끄는 잔존 제1기동함대, 후소급 전함 2척으로 이루어진 별동대를 지휘하던 제2전대의 니시무라 쇼지는 이 명령을 우직하게 수행했지만, 야마토와 무사시가 소속된 제2함대는 오랫동안 함대결전만을 준비해온 주력부대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 작전 자체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기도 높지 않았다. 이것이 후술하는 구리다 턴의 큰 원인이 되었다. 2차대전 중 일본해군 지휘관을 평가한다.6.1. 시부얀 해전
일본 해군이 총력을 기울인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야마토는 구리다 타케오가 이끄는 2함대 1유격부대의 일원으로서 무사시와 함께 출격한다. 무사시는 다른 배보다 밝게 도색하고 출격했는데, "우리는 미끼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승조원들이 불안해했다고 한다.레이테 만으로 진격하던 도중 미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함대 기함인 중순양함 아타고가 침몰했고, 구리다 제독은 구조된 후 야마토를 구리다 함대의 기함으로 정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나오는데, 아타고에 구리다 제독과 같이 탔던 숙련된 통신병들은 야마토에 못 탔다. 이게 나중에 사마르 해전에서 구리다 턴이 나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6.1.1. 무사시 침몰
시부얀 해전에서 구리다 함대는 미군 함재기의 공습을 당했는데 밝은 색상과 커다란 덩치 때문에 눈에 확 띈 무사시는 특히 집중공격을 받았다. 무사시는 주포로 3식 통상탄을 발사했지만 큰 효과를 내지는 못했고, 사전 경고 없이 사격을 하는 바람에 갑판 위에 있던 대공포 요원들이 주포 발사의 충격을 그대로 받았다고 한다. 원래 전함의 주포는 발사 시에 엄청난 규모의 후폭풍을 발산하기 때문에 함포사격 이전에 경고방송을 통해 대공포 사수, 견시 등의 외부 승조원들을 함내로 전부 이동시킨 뒤에 사격을 실시하는 것이 정상이며 3식 통상탄 사용시 규범에도 적혀 있는데 빠르게 움직이는 항공기를 잡겠다고 규정을 무시한 행위를 한 것이다. 결국 무사시는 스스로를 지켜줄 대공 화력을 없애버린 셈이다.규정을 어긴게 왜 심각한가 하면, 레이테 만 해전 문서도 나와있지만, 일본 군함들은 노천 혹은 포방패만 있거나 아니면 정말 마운트만 있는 대공포가 많았다. 이러다 보니 전함이 포를 발사할 때마다 생기는 충격파를 고스란히 받으니 대공포 사수들이 큰 타격을 받는다. 덤으로 기관포의 조준기도 이런 충격에 취약해서 손상을 입는다. 따라서 주포를 쏠 땐 대공포반들에게 미리 경고를 해서 인원은 실내로 후퇴하고 주포 후폭풍에 손상될 수 있는 조준기는 분해해서 실내로 들어가는 등 어느 정도 대비를 한 후 발사해야 했다. 따라서 3식 통상탄을 쏜다면 다른 대공포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렇다면 3식 통상탄의 성능이 다른 대공포들보다 훨씬 좋아야 쓸 만한 것이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또한 사격 시 충격으로 주포 조준 방위판이 고장났다는 생존자 증언도 있다. 예비 부품이 있어서 주포 사격 훈련을 제대로 했다면 문제를 일찍 알아차렸을 것이고, 그랬으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것이 실전에서 치명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다가 무사시의 1번 포탑 중앙 주포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폭발 시간을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포탄이 포탑 안에서 폭발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이제야 대공 사격을 할 수 있게 된 대공포 사수들이 필사로 미군에 맞서 싸웠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무사시가 박살난 이유가 주포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3식 통상탄을 쏴댄 것이 백해무익한 결과를 낸 것은 분명하다. 오죽했으면 대공포반에서 "주포, 이 바보자식들!!" 이라고까지 외쳤을 정도.
결국 무사시는 전열에서 이탈해 회항하던 중, 함재기들의 추가 공습까지 받으며 대량 화재와 침수가 발생했으며 공습 후 4시간 뒤인 7시 35분에 복원력을 완전히 잃고 좌현으로 전복되어 침몰했다. 다만 미군 함재기들의 공격이 대부분 무사시에 집중되었기에, 중순양함 묘코가 피해를 입은 것 외에는 함대에 큰 피해는 없었고, 구조된 승조원들 중 절반은 본토로, 나머지 반은 필리핀 방어전에 동원된다. 무사시의 함장 이구치 도시히라(猪口敏平) 대좌는 유서를 남긴 후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고 한다.
영문 위키 무사시
6.2. 사마르 해전
구리다 제독은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고 무사시를 내버려둔 채 함대를 반전시켜 후퇴하기 시작했다. 구리다 함대를 쫓아낸 윌리엄 홀시는 오자와 지사부로가 이끄는 일본군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3함대를 이끌고 진격해서 엔가노 곶 해전을 벌인 끝에 오자와의 항모 전부를 수장시킨다. 이 해전에서 미군은 진주만을 공격했던 항모 중 마지막 항모인 즈이카쿠도 침몰시켰다. 함재기가 바닥난 항공모함들이 미끼가 된 덕에 야마토가 들어갈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3함대가 진격하면서 산 베르난디노 해협의 감시망이 사라졌는데 이 틈을 타서 구리다 함대는 다시 반전해서 해협을 돌파, 레이테 만으로 진격하다가 스프레이그의 호위항모전단 '태피 3'와 마주친다.야마토는 약 32km 거리에서 주포탄 104발을 쏘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칼리닌 베이에서는 야마토의 포격이 거리는 정확했지만 방향과 각도가 어긋났음을 파악했다.[2] 야마토는 적 항모 1척 격파를 확인하고 해당 항모의 흑연으로 조준이 곤란해지자 목표를 변경했다[3]
하지만 플레처급 구축함 USS 존스턴(DD-557) 함장인 '추장' 어니스트 에반스가 7시 10분쯤에 일본함대를 향해 돌격하였고 이후 이에 응해서 나머지 플레처급 구축함 호엘(DD-533), 히어만(DD-532)과 존 C 버틀러급 호위 구축함 사무엘 B. 로버츠(DE-413)도 어뢰와 주포를 쏘며 덤벼들었고 호위항모들과 나머지 호위 구축함들도 도망가면서 대공포를 대함용으로 쏘면서 지상 공격용 무장들만 단 함재기들을 날리며 반격했다.
이때 단순히 지상 기지 공격용 무장만 장착하고 있던 태피 3 호위항모들은 너무 급박해서 함재기에 지상 공격용 무장만 일부 다는 데만 성공했지 나머지는 유폭을 우려해 무장을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함재기들도 페이크 공격 및 진짜 공격을 병행해가며 없는 어뢰도 있는 척, 없는 급강하 폭탄도 있는 척, 진짜 지상공격용 폭탄을 떨어뜨리며 싸웠다. 심지어 전함에 기관총을 쏘기도 했고 아예 탄약조차 없는 함재기조차 주변을 날아다니며 성가시게 할 정도였다. 할 수 있었다면 문고리도 던졌을 것이라는 스프레이그의 어록도 있을 정도로 급박했다. 일본군 포탄 다수가 호위항모에 명중했지만, 미리 폭탄을 내다버린 데다 호위항모의 장갑이 너무 얇았기에 상당수가 선체에 구멍만 내고 바다에 빠지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돌격한 존스턴은 신들린 회피기동으로 포격을 피한 것도 모자라 일본군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의 함교를 함포사격으로 불태우며 어뢰로 함수를 박살냈다. 이 공격으로 스즈야의 속도를 늦춰 함재기들의 밥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성공했지만 얼마 안 가 7시 30분쯤에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의 포격과 야마토의 부포탄 3발을 맞아 대파당했다. 하지만 존스턴은 스콜에 숨어 수리한 후 다시 전투에 참여하였고 일본 함대에 맞서다가 해전 후반에 격침당했다.
미군의 또 다른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이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에게 덤벼들어 어뢰를 발사했다. 하루나는 피했지만, 이 어뢰는 바로 뒤에 있던 야마토를 향해 돌진했다. 야마토는 피하려다가 진로를 잘못 잡아 어뢰 사이에 끼었고, 야마토는 나가토와 함께 전장 밖으로 이탈했다. 이것이 사마르 해전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다만 야마토가 몇 분간 어뢰를 회피한 후 다시 복귀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야마토는 나가토 등과 함께 구축함 호엘을 포격했고 8시 55분 호엘이 전복된다. 이게 도망가면서 포격을 한 것인지, 아니면 어뢰를 회피한 후 다시 복귀해서 포격한 것인지는 모른다. 문제는 야마토가 복귀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이다. 어뢰를 피한 시점에서 야마토는 전장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전장에 복귀하려면 야마토가 30노트를 넘는 속도로 오랫동안 달려야 한다.
대파된 쿠마노를 피하려고 속도를 늦추고 선회하다가 박살난 중순양함 스즈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전투 중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속도를 늦추고 야마토를 기다려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함 공고가 30노트이고 다른 중순양함들은 30노트 이상이니, 야마토가 본진에 복귀하려면 최소한 30노트 이상을 내야 했다. 게다가 여기서 야마토가 복귀했다면 그 이후의 전황을 설명할 때 큰 문제가 하나 생기게 된다. 이유는 '히어만 VS 야마토' 문단에서 설명한다.
한편 공고와 중순양함 부대는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8시 15분경 갬비어 베이의 최초 명중탄은 하구로와 토네의 20.3cm 포탄이었고[4]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는 저서에서 '전함부대의 포탄은 적 항모에 화재를 일으킨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의 전사연구가 로버트 룬드그렌(Robert Lundgren)은 야마토의 포격은 존스턴에 46cm포 3발, 15cm포 3발 피탄, 호위항모 화이트 플레인즈에 지근탄으로 기관실을 파손시킨 것이 전부라고 주장했다.[5]
당시 야마토에 승선하고 있던 우가키 마토메는 전초록에서 31km 거리에서 포격으로 항모 1척을 격파 후 다른 함으로 목표를 옮겼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이 항모는 지근탄으로 기관실이 파손된 후 연막을 살포한 화이트 플레인즈였고 야마토가 다른 항모를 격파 혹은 격침했다는 언급은 없다. 나가사키 사세보 해군 묘지의 공고 위령비는 항모 1척과 구축함 2척 격침을 공고의 전과로 쓰고 있으며, 중순양함과 함께 갬비어 베이를 포격하다 8시 50분경 '적 항모 1척 대화재 대폭발'을 보고하고 갬비어 베이에 사격을 중단했다. 야마토가 갬비어 베이를 명중시켰다는 주장[6][7]은 일본에서는 소수설.
그리고 구리다 함대 전함의 포격은 태피 3의 항모에 큰 손상을 일으키질 못했는데, 태피3의 항모들은 수송선을 개조한 카사블랑카급 호위항모로 항모의 기능만 수행하지 그 장갑은 일반 항모보다 없는 수준이라서 과관통이 일어나 내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부의 탄약에 포탄이 맞았다면 유폭이라도 일어날 것인데, 해전이 시작될 때 모든 호위항모들이 그럴만한 폭탄을 바다에 버렸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해서 호위항모를 상대로 과관통을 일으키기 힘든 작은 포탄만이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8인치 포를 탑재한 중순양함들의 포격이 유효했다. 전함 공고에서는 철갑탄의 과관통을 목격한 뒤 부포의 대공용 탄에 시한신관을 사용해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루나함이 피한 히어만함의 어뢰가 야마토함에게 달려드는 모습. 야마토는 저 직후 어뢰를 피하지만 그대로 전선을 이탈해버리고 만다. |
08:00 전투 상황도 |
2시간에 걸친 전투가 끝난 후, 태피 3은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 구축함 호엘과 존스턴, 호위구축함 새뮤얼 B. 로버츠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구리다 함대도 중순양함 초카이, 치쿠마, 스즈야를 잃었다. 구리다 제독은 사방으로 흩어진 배들을 일단 긁어모은 후 앞으로의 방침을 고민했고, 심사숙고 끝에 레이테 만으로의 진격을 포기하고 회항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구리다 턴이라고 하며, 오자와 함대가 피 흘리며 얻어낸 귀중한 기회를 날렸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구리다 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링크 참조.
6.2.1. 이설
일본에서는 이설도 있는데, 야마토와 나가토가 구축함대의 어뢰 회피를 위해 변침하다 조타 실수로 어뢰 항주가 끝날 동안 같은 방향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미함재기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뢰를 회피한 방향과 같은 방향에 형성된 스콜 속으로 대피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변침에 소요한 시간은 8분(영문 위키와 일본어 위키에선 10분)으로, 긴 시간이라 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전함 공고 또한 미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측거의가 파손되어 스콜 속으로 대피하기도 했다.이 주장에 대해 "야마토는 다른 군함들이 공습을 무릅쓰고 진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군 군함 중 가장 대공 화력이 강력하고, 가장 튼튼한 군함이면서 기함으로서의 임무를 방기하고 도망친 셈이다." 라는 의견이 있으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순 없다. 기함 선두가 일본 해군의 전통이라곤 하지만 반드시 지켜졌던 것은 아니며, 그 예를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찾을 수 있다.
다나카 소장은 기함 나가나미로 전투에서도 선두에 서지 않았고, 전투가 끝난 후 유일하게 어뢰가 남아있는 함이었지만 적과 조우할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쿠로시오를 생존자 구조에 파견했다. 이에 대해 당시엔 쿠로시오의 함장을 포함해 비겁하다며 비난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현재는 함대를 지휘해야 하는 기함의 역할을 생각하면 다나카 소장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는것이 미일 양국의 공통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 제국은 야마토를 기함으로나 쓸 만큼 여유롭지 않았으며, 다른 배가 공습을 당하면서도 남쪽으로 진격하는데, 혼자서만 공습을 피한다며 북쪽으로 도망간다면 병사들의 사기는 어찌 되는가?" 라는 의견이 있는데, 일본군 함대도 야마토를 단순히 기함으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사마르 돌입 당시 일본함대는 대수상전 진형이 아닌 대공 원형진을 채택하고 야마토는 주포 9문 중 6문을 대공용 삼식탄을 이용한 대공포로 썼던 점에서 대공전투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는 항공 공습을 받아 무사시가 침몰하는 등 미군 함재기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무사시가 집중공격을 받아 이탈하자 그 뒤엔 공격이 야마토와 나가토에 집중되어 잠시 동안 무사시는 피해를 입지 않기도 했고[8], 엔터프라이즈나 즈이카쿠도 스콜 속으로 대피해 피해를 막기도 했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되는 것이, 목표가 스콜 등에 대피했을 경우 그 함선을 공격하던 공격대가 곧바로 다른 함선으로 목표를 바꿔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호 해 해전에서 즈이카쿠를 공격하던 요크타운 공격대는 즈이카쿠가 스콜속으로 대피하자 그 주변을 멤돌거나 길을 잃기도 했으며 그렇지 않은 편대도 다시 편대를 재정비하고 공격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했다. 거기다 이미 태평양 초기에 미일 양국 모두 비장갑함을 격침시키는 데 전함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피 3에 전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서 공격이 집중되는 야마토를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이탈시키거나 스콜 속으로 대피시키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야마토는 당시 스콜 속에서도 연달아 기총소사를 받아 적지 않은 갑판 인원이 피해를 입었고, 야마토의 수상기 파일럿이었던 야스다 치카후미 비조장은 기총 소사를 받는 와중에 출격하여 4기의 적 함재기와 홀로 교전한 후 돌아오기도 하는 등 매우 격렬한 상황이었다. 사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 또한 확인할 수 없었으며, 야마토급 전함이 아무리 뛰어난 방뢰능력을 실증한 함이라고는 하나, 어뢰가 한 발이라도 명중하면 심각한 피해를 입을 확률이 있으며 오히려 그로 인한 낙오 또는 침몰로 인해 발생하는 사기 하락과 전력 저하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항공모함이 스콜에 숨는 것과 동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일단 공격대와 요격대를 출격시키고 나면 항공모함은 본체가 스콜에 숨더라도 공격과 요격 능력은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반면 항공모함은 스콜에 의한 방어 효과를 누리므로 무조건 이득이다.
하지만 전함인 야마토는 방향을 돌려 스콜에 숨으면 자신은 안전할지 몰라도 사실상 전력 이탈인 것이고, 특히 오자와 함대를 미끼로 쓰면서 얻은 기회라는 것을 감안하면 몸을 사릴 게 아니라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태피3를 홀시의 3함대로 착각했다면 이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천금 같은 기회였고, 그게 아니라고 해도 겨우 구축함 몇 척의 호위만 받는 호위항공모함 6척은 수상함대 입장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라 태피3 정도는 탐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빨리 태피3 를 정리하고 다시 주목표를 찾아야 했다. 시간 끌어봤자 이득이 전혀 없으니까.
그런데도 한창 태피3와의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인데, 함교가 피격당해서 지휘에 혼란이 발생하거나, 진압이 힘들 정도의 큰 화재라도 발생하거나, 주포 고장 등 심각한 기능 고장이 발생하거나 한 것도 아닌데, 어뢰 한 방에 가라앉을까 걱정해서 스콜에 숨었다면 애초에 이런 작전을 짜지도 말거나 야마토를 제외시켰어야 했다.
요약하자면 어떤 식으로 변명하든 간에, 야마토가 기함으로서 임무를 방기하지 않고, 제대로만 전투했어도 어렵잖게 즈려밟을 수 있는 태피 3에게 괜히 겁을 먹고 도망갔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어쨌든 위에 있는 참고 링크가 모두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서 달아났다"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이쪽은 그냥 참고만 하자.
6.3. 전공
사마르 해전에서 야마토는 7시 30분쯤에 나가토와 함께 USS 존스턴과 호엘에 대해 부포 사격을 하여 3발을 명중시켜 대파시켰고 호엘은 중반, 존스턴은 해전 후반에 침몰했다. 호엘의 명중탄이 야마토, 나가토, 하루나, 공고 중 어느 함의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심지어 경순양함의 포격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2021년 4월 4일 필리핀 해저에서 캘리던 오시애닉사의 잠수정이 존스턴을 발견하였는데, 이 탐사에 참가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존스턴을 격침시킨 것은 야마토의 포격이라고 한다.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의 경우는 중순양함 치쿠마가 일본 함대의 선두에 서 있었고, 영문위키 갬비어 베이 항목에서도 8시 20분에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의 포탄으로 전방 기관실이 날아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명중탄을 냈다며 야마토의 전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함의 포탄으로 화재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으며 야마토에 승선하고 있던 우가키 마토메의 기록조차 화이트 플레인즈의 지근탄밖에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위의 전공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일본군의 목적은 레이테 만으로 들어가서 미군 상륙함대를 박살내는 것인데 사마르 해전에서 패배하고 퇴각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당연히 태피 3의 분전이고, 그 중에서도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감행한 구축함 4척들의 공이 매우 컸다. 특히 구축함 히어만은 마지막까지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일본군은 끝내 히어만을 침몰시키고 레이테 만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특히 야마토가 히어만의 어뢰에 쫓겨 도망간 게 결정적이었다. 위에서는 "그 후 다시 반전해서 싸웠다"고 하나, 반전해서 돌아왔건 말건 간에 히어만을 몰아내고 레이테 만으로 진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것은 사마르 해전이 시작될 때 예상된 전과와는 다르다. 해전이 시작될 때만 해도 야마토가 태피 3을 묵사발로 만들고 레이테 만에 진입해서 대전과를 올리는 게 확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해상 포격전에서 전함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전함뿐이지만 태피 3엔 전함은 고사하고 순양함조차 없었다. 태피 3에 소속된 군함 자체가 호위항모 6척, 구축함 3척, 호위구축함 4척인데 이걸 다 합해야 야마토 한 척과 비슷한 중량이 나온다. 이런 전력으로 야마토와 포격전을 하면 괴멸되는 게 상식인데 오히려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구리다 함대에 전함이 4척이나 있고, 태피 3에 전함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구리다 함대에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게임이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모 게임에서는 구축함이 전함을 이기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적 허용이다. 현실의 구축함은 잠수함을 막으라고 만든 거지 전함을 잡으라고 만든 배가 아니다. 물론 어뢰는 잠수함만이 아니라 다른 배를 공격하는데 쓰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일본의 구축함들은 함대결전사상에 집착한 일본군의 방침으로 적 전함을 공격하는 것이 주 목적이긴 했지만, 이것도 아군의 전함이 적 전함을 상대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보조하는 개념이지, 1:1로 전함과 맞짱을 뜨는 개념이 절대 아니다.
아래의 '히어만 vs 야마토'에서 설명하겠지만, 현실의 구축함은 절대로 전함을 못 이긴다.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군 전함 워싱턴이 일본군의 순양전함 기리시마를 박살낸 후, 일본군의 순양함과 구축함들은 사력을 다해 워싱턴에 대항했지만 결과는 36계 줄행랑이었다. 전함에 특화했다는 일본 구축함들도 이 모양인데, 뇌격전보다 대공/대잠에 중점을 둔 미군 구축함이라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야마토가 히어만과 마주쳤을 때, 야마토는 무조건 히어만을 격침시키거나 쫓아냈어야 했다. 전함의 부포가 바로 그럴 때 쓰라고 달린 무기이고, 제대로 된 전함이라면 히어만이 어뢰를 쏘기도 전에 히어만을 짓밟았어야 했다. 전함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함뿐이며, 다른 걸로 잡을 수 있으면 그건 전함도 아니다는 건 이 시대의 상식이었고, 그렇기에 태피 3의 지휘관인 스프레이그 제독도 30분만 버티면 잘 버틴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야마토 옆에 전함 나가토와 하루나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어야 했건만, 현실은 전함 3척이 구축함 한 척한테 밀렸다. 히어만이 사마르 해전이 끝날 때까지 버티고 있었으니, 일본의 전함들은 무려 2시간이나 히어만 한 척을 못 잡고 쩔쩔매다가 도망간 셈이다. 히어만이 토네, 치쿠마 같은 일본군 중순양함들과도 교전했음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졸전이었다. 더욱 창피하게도, 이 해전에서 히어만의 전사자는 6명이다. 치쿠마에서 나온 전사자만 800명 이상이고, 생존자는 한 명 밖에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컸다.
결국 사마르 해전의 패배 원인은 많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야마토다. 야마토가 히어만을 격파하거나 그냥 쫓아내기만 했어도 일본군은 반드시 사마르 해전에서 승리하고 레이테 만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니만큼 야마토의 실책은 매우 크다.
6.3.1. 히어만 VS 야마토
전함 vs 구축함에서 왜 전함이 구축함을 상대로 무조건적으로 유리한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전함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전함은 당대의 적함과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만들어지며, 이 과정에서 적의 전함은 물론이고 동시에 순양함과 구축함까지 상대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이러니 사마르 해전에서 일본군은 히어만과 존스턴 등 플레처급 구축함들을 순양함으로 착각했다는 이설도 있지만 그래봤자 전함 vs 순양함이라 결론이 안바뀌니 의미가 없다. 덤으로 야마토급 전함은 당대 최대의 전함이라 더 유리하다.전함의 장갑이 두꺼운 것은 적 전함의 포격으로부터 대응방어를 달성하기 위해서이고, 벌지를 비롯한 어뢰 방어구획과 다중장갑을 설치한 이유는 적의 어뢰를 막기 위해서다. 전함의 부포는 처음부터 구축함이나 어뢰정 같은 소형함들을 격침하기 위해 무장되어있으며, 대공포는 적의 공습에 대한 대비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고, 모든 종류의 적을 박살내라고 건조되는 게 전함이다.
다만 전함에 어뢰를 다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대부분 전함에서 어뢰가 철거되었다. 독일의 티르피츠가 어뢰를 단 바 있고, 영국의 넬슨급 전함에 어뢰 발사관이 있기는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전함은 어뢰를 무장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뢰 자체가 강력한 포를 달기 힘든 구축함 같은 배수량이 적은 배들의 화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무기이고, 피격될 경우 유폭을 일으켜 배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거포를 달 수 없는 구축함이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어뢰를 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함은 막강한 함포가 있다. 적 전함과 순양함을 상대한다면 주포로 날려버리면 되고, 구축함이나 어뢰정을 상대할 때는 부포로 날려버리면 된다. 전함의 사격통제장치는 무조건 당대 제일이므로 사격 정확도도 압도적으로 높다.
나르빅 해전에서 영국 전함 워스파이트는 15인치 주포로 독일 구축함 8척에 유보트 1척을 일방적으로 두드려 패서 가라앉혔다. 과달카날 해전 당시에 일본군 구축함 아야나미는 감히 전함 워싱턴 앞에서 까불다가 부포 일제 사격으로 박살나버렸다. 전함에게 덤비는 구축함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어뢰가 기적으로 전함의 용골에 적중한다면 1:1로도 이겨 먹을 수 있겠으나, 그런 수법이 통하는 배는 후소급 전함 1번함 후소처럼 야간에 구축함의 기습을 받았을 경우에 한정된다. 후소가 일본군도 전투에 부적격하다고 여겨져서 훈련함으로 전용되었다가 급하게 끌려나온 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제대로 된 전함은 야간이라도 막강한 레이더를 포함한 온갖 수단을 써서 구축함을 포착할 수 있으며, 그 뒤는 부포 일제 사격으로 구축함을 처리하면 된다. 적 구축함은 어뢰 한 방을 날리기도 전에, 전함의 집중포화를 맞고 가루가 되는 것이다. 한밤중에도 그 모양이니 대낮이라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전함에 용케 명중탄을 먹인다고 해도 전함은 그 정도로 가라앉지 않는다. 어뢰 방지용 벌지가 붙어있는 이유도 구축함이나 잠수함의 어뢰 한 방으로 망가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자신과 동급인 전함이 쏜 거대한 포탄에 맞아도 파괴되지 않는 장갑도 갖고 있다. 구축함의 포탄으로는 격침되지 않는다. 공고급 순양전함 히에이가 본격적인 전함에 비해 장갑이 얇은 게 문제라고 지적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정상적인 전함이라면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구축함을 가라앉힐 수 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항공어뢰를 맞고 키가 망가진 전함 비스마르크를 공격한 영국군 구축함들도 상대를 괴롭힐 수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구축함의 얇은 장갑으로는 전함의 부포 일제사격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뢰를 쏘려고 접근하는 순간 벌집이 되니 쏠 수가 없다. 더 심한 예시로 영국의 전함 넬슨은 독일의 유보트에게 3발이나 명중탄을 맞고도 자기가 맞은 줄도 모르고 유유히 영국 본토 항구에 들어온 뒤 벌지가 박살난 걸 보고 피격당한 걸 깨달았다고 한다.
전함은 그 단함이 일개 함대이다. 잠수함, 항공기, 구축함, 순양함, 전함, 심지어 경우에 따라 항공모함까지 이론적으로는 전부 전함이 상대할 수 있다. 당시 함대결전사상에서 전함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종류의 전투를 수행 가능한 움직이는 해군 본부이자 기함이며 따라서 전함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전함뿐인 것이다.
따라서, 야마토와 히어만이 마주쳤을 때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물며 야마토는 단독으로 있던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전함들인 나가토와 하루나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식적으로 무조건 일본 해군 측이 이겼어야 했다. 즉,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야마토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작고 약한 하루나가 히어만과 맞붙었어도, 아니 히어만 쪽에 미 해군 구축함이 더 붙어 있었어도 히어만은 격침되거나 쫒겨났어야 했다.
위 '사마르 해전' 문단에서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서 도망가지 않고, 반전해서 전장에 돌아왔다고 해석하면 큰 문제가 된다고 이야기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야마토가 구리다 함대로 복귀했다면 태피 3은 순식간에 전멸했어야 한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전함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함뿐이며, 다른 걸로 잡을 수 있으면 그건 전함도 아니다! 태피 3은 절대로 포격전으로 야마토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데 위에서 서술했듯이, 구리다 함대는 태피 3을 밀어내고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못했다. 태피 3의 후미에서 구리다 함대와 맞서던 배는 구축함 3척과 호위구축함 하나밖에 없었지만, 이들 중 최후까지 살아서 싸운 건 구축함 히어만 한 척 뿐이었다. 그렇다면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는 구축함 히어만과 2시간이나 싸우고도 상대를 밀어내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조우에서 전함 3척이 구축함 1척이 쏜 어뢰에 혼비백산해서 줄행랑을 친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구축함 1척이 세계 최대의 전함과 정면에서 2시간이나 맞짱을 떴는데도 죽지 않은 데다가, 전함이 줄행랑치는 결말을 맞았다면 더욱 기막힌 일이다. 그렇기에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서 도망갔다."는 주장이 정설이 된 것이기도 하다. "구축함이 전함 3척을 어뢰로 줄행랑치게 만들고, 다시 돌아온 전함과 정면대결을 한 끝에 또 이겼다."는 황당한 결말보다는 납득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6.3.2. 다른 함대의 운명
야마토에게 레이테 만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미끼 노릇을 한 오자와 함대는 항모 4척을 잃고 산산조각났고, 엔터프라이즈의 숙적이었던 즈이카쿠도 격침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항공전함 이세와 휴우가는 잔여 세력을 수습해서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래도 미끼 작전 자체는 성공했다. 야마토를 돕기 위해 조공 겸 양동함대 역할을 한 니시무라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압도로 우세한 미군의 올덴도르프 함대를 만나는 바람에 집중포격과 뇌격을 당해 괴멸당했다. 주력인 후소급 전함 2척도 격침당했지만, 이들은 마지막까지 도주하지 않고 싸우다가 침몰했다.야마토를 돕기 위해 출전한 시마 함대는 니시무라 함대의 주력 전함 중 1척인 후소가 두 동강이 나있는 것을 보고 도망가다가 기함인 묘코급 중순양함 나치가 퇴각하던 니시무라 함대의 중순양함 모가미를 들이받아버렸다.
레이테 섬에 병력을 증원하기 위해 파견된 16전대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내 레이테 섬 오르목 만에 도착해서 병력을 내려놓는데 성공했다. 계획대로라면 야마토가 레이테 만의 미군을 박살내서 이들을 도와줘야 했지만 사마르 해전에서 야마토는 임무를 포기하고 도주했고, 16전대는 탈출하다가 미군의 공격으로 괴멸했다. 그러나 미군이 16전대를 공격하느라 전력을 분산시킨 덕분에 야마토는 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16전대에서 살아남은 배는 수송선 1척, 그리고 작전 개시 전 마닐라 앞바다에서 미 잠수함의 뇌격을 맞고 대파당해 회항하느라 빠진 아오바뿐이었다.
7. 시나노 침몰
3번함 시나노는 일단 개전 후 건조가 중지되었으나, 미드웨이 해전 이후 항공모함 부족을 타개하고자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이었다.1944년 11월 29일. 취역한 지 11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마무리 공정을 위해 구레 항으로 시나노가 항진하고 있었다. 여기서 "취역했는데 무슨 마무리 공정"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해당 시점의 일본군은 워낙 배가 부족하고 상황이 다급해서 일단 대충 완성되면 취역시키고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추가해 가면서 쓰고 있었다. 당시 시나노는 해치 쪽 데미지 컨트롤을 개수하고 함재기를 싣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항로상에는 미 해군의 잠수함이 있었고 결국 시나노는 미 해군의 발라오급 잠수함 SS-311 USS 아처피시 (Archerfish) 함의 매복에 걸려들어 어뢰 4발을 맞는다.[9]
아무리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고 해도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이니 정상이라면 격침될 수가 없지만 전속력으로 무리하게 항행하다가 들어찬 해수로 격벽들이 무너져 8시간도 못 버티고 침몰했다. 그리고 미 해군에게 단 1척의 잠수함이 잡은 역대 최대의 군함이라는 위업만 헌납한다. 이 단 한 척의 잠수함으로 단함 격침 전과 70,000t 이라는 기록은 아직도 안 깨지고 있다. 사실 이 기록은 3차 세계 대전이라도 발발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뭐 화기시험 및 개함 방어력 테스트랍시고 오만가지 무기들을 총동원해서 가라앉힌 84,000t짜리 군함은 있지만[10], 이건 자침이다. 부실공사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대재난이었다.
1개월 후 12월 28일 조사위원회의 결과로는 나사가 제대로 조여지지 않고 방수 해치에 2cm나 빈틈이 있고 수밀시험 자체도 생략되는 등 부실공사의 실상이 밝혀진다. 애초에 완공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 방수 해치에 빈틈이 있으면 격실 폐쇄가 불가능하며, 승조원들도 아직 배에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대미지 컨트롤도 불가능했다. 위험한 항로를 선정한 것도 문제고, 호위함이 3척뿐인데다 그 중 하나는 일본군 내에서도 사신(死神)으로 이름 높은 유키카제였다. 미신을 숭상하는 뱃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선정. 결국 총체적 난국으로 책임을 물을 당사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정작 억울한 건 시나노의 함장으로, 마무리 공사 예정 일정을 늦춰 달라, 항공기의 엄호가 필요하다고 사령부에 진언했으나 사령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시나노와 운명을 함께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아처피시 함은 복귀 후 보고에서 이 함의 존재를 모르던 상층부로부터 순양함을 잘못 보고 전과를 과장한 것 아니냐고 질책받았다. 이는 시나노라는 이름을 가진 강이 있다는 정보를 토대로 산이나 강에서 순양함의 이름을 따오던 일본군 해군의 함선 명명 규칙에 따르면 시나노는 순양함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시나노의 함명 유래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격침당한 전함 유래 항모인 카가와 마찬가지로 시나노 번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시나노 함의 정보를 입수하고 사과의 의미로 항복 조인식 때 아처피시 함이 미주리 함 옆에 계류토록 배려해주었다. 아처피시 함은 전쟁 중 시나노 외 화물선 1척 총 2척만을 격침시켰음에도, 그 둘 가지고 미 해군 잠수함 격침 총 톤수 25위(...)를 찍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아닌데, 잠수함이 단함으로 잡은 단일 함선 격침 톤 수로는 아직도 이 기록을 넘기는 게 없다는 것.
8. 3월의 구레 군항 공습
레이테 만 해전에서 대패한 뒤 야마토는 구레 군항에 처박혀 있었는데, 1945년 3월19일에 1차 구레 군항 공습이 일어난다. 야마토는 폭탄 1발을 맞았지만 무식하게 단단했던 장갑 덕에 소파에 그쳤다.9. 야마토 침몰
미군의 공격을 받는 야마토. 전속력으로 항진하고 있는 사이에 항공 폭탄이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물기둥이 올라왔다. |
일본 해군의 마지막 대규모 작전으로, 야마토의 오키나와 특공과 카미카제 비행기들의 미 함대 습격이 이루어졌으나 실패했다. 일본어로는 天号作戦,(천호작전)이며 영어로는 Operation Ten-Go. 자세한 내역은 영문위키 Operation Ten-Go와 일본어위키 천호작전 참조.
9.1. 키쿠스이 작전
1945년에 들어서며 일본 제국의 전황이 악화일로를 달리자, 야마토는 '천1호 작전'의 일환으로 편도 연료와 1170발의 주포탄[11]을 싣고 오키나와로 상륙해오는 미군을 막기 위한 '키쿠스이 작전(菊水作戦)'에 나선다. 숨겨둔 비밀 무기로 일거에 전황을 바꾸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 그저 죽을 자리를 찾는 마지막 여정이었다.그러나 야마토가 싸우러 나가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일본 해군이 오키나와를 지키려고 함대를 내보낸다면 최대한 많은 군함들이 따라가야 한다. 아무리 많은 배를 잃었어도 이 무렵에는 히요급 항공모함 2번 함 준요, 운류급 항공모함 아마기와 카츠라기, 이세급 항공전함 이세와 휴가,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 등이 남아있었으니 이들을 전부 끌고 가야 했다. 항공모함 3척에 항공전함 2척, 순양전함 1척, 전함 1척, 중순양함 2척이 더해진다면 아무리 미군이라도 무시할 전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연료가 없었고[12], 배를 수리할 능력도 없었고, 항모에 실을 항공전력도 없었다. 레이테 만 해전으로 일본과 동남아시아와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군수품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반격을 하려면 군수품이 아직 남아있을 때 해야 하는데, 시기를 놓친 것이다. 결국 야마토와 동행한 건 경순양함 야하기와 소수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2수뢰전대 정도였고, 이걸로 미 함대를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본군은 공격을 명했다. 처음에는 편도 연료로 특공에 투입하자는 극단론까지 대두될 정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편도 연료로 보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비판이 받아들여져, 최종적으로는 해군이 확보하고 있던 연료를 탈탈 털어 왕복 연료를 채웠다는 비화가 있다. # 어쨌든 이리하여 야마토의 전함 특공 키쿠스이 작전은 1945년 4월 6일 15시 20분 야마토를 선두로한 제1유격부대가 출동하며 시작된다.
9.2. 자살을 위한 출격
미 해군 대함대의 방해를 뚫고 오키나와까지 가는 것부터 문제였지만 만일 오키나와 해안에 계획대로 좌초하더라도 오키나와 전투를 수행 중인 일본군 수비대 도움 없이는 그냥 고정표적 1호가 되어버린다. 최악의 경우 미군에게 육박공격을 당해서 점령당해 오히려 야마토의 그 거대한 주포가 일본을 겨누게 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며, 그런 일이 없더라도 좌초된 군함의 탄약이 떨어지면 그냥 거대한 고철덩어리로 전락하는 데다 앞서 말했듯이 이동 능력이 전무하므로 공중에서 폭격하는 비행기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타겟이 없다. 따라서 애초에 이 작전의 성공 확률이 극히 낮은 데다가 고정포대 노릇을 하는 것은 설령 야마토가 작전 지역에 멀쩡하게 도착했더라도 불가능하다.거기에 출격 시기 자체도 문제가 있었다. 일기예보상 2~3일 뒤에 항공기 운용에 지장을 주는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었던지라 그나마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날이 흐려 시야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날을 골랐다. 결국 구름과 안개 속에서 갑툭튀하는 미국 함재기들을 상대로 한 대공사격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상 자살임무에 가까운 작전이었으므로 만일 배가 격침될 경우 살아남은 승조원이 주변 섬에 표류할 것을 생각해서 약간의 돈과 비상용 물자를 승조원에게 배급하기도 했으며[13] 출격 전에 술판을 벌여서 최대한 사기의 저하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9.3. 보노미사키 해전
야마토에게는 불행하게도, 미군은 이미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출항 전 4월 6일 09시 46분 미군의 정찰기 F-13은 야마토가 출항 준비 하는 모습을 확인했으며 그 직후 09시 55분 연합함대에서 제 2함대에 발송한 야마토를 비롯한 제2함대의 작전 내용이 미군 암호 해독반에 감청 당해 그날 오후 전 미해군에 뿌려졌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통과 시간과 도착 지점, 시간까지 명시되어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출항해서는 일본 근해를 벗어나기도 전에 발라오급 잠수함 트레드핀(SS-410)과 해클백(SS-295)에게 발각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작전 실패는 확정된 셈이었고, 오키나와 근처에 가기도 전에 미군 함재기 부대에 포착되었다.일본군 함대가 출항했다는 것을 포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마크 미처 제독 휘하의 항모들에게 처리를 맡겼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 제 5해군은 이런식의 잔여 일본 수상함대의 반격에 대비하여 contingency plan을 마련해 두었는데 응전 임무는 오키나와 근해에서 화력 지원을 하고 있던 모른 데요 제독의 TF 54함대 몫이었다. 야마토 출항 이후 TF54에 응전 명령을 내리면서 스프루언스 제독은 데요 제독에게 It's fair game for TF 54라는 명언을 남긴다.
하지만 여기에 극대노한 자가 있으니 바로 제 5함대 58기동부대의 마크 미처 제독이었다. 미처 제독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주역이었던 항모 전대가 아닌 수상함 전대에 공이 넘어가는것에 대노했고 4월 6일 야간에 항공대 지휘관들에게 함대 공격용 무기로 전환을 명령한다. 그후 4월 7일 09시 07분 공격대를 발진 시키기 이른다. 무려 이 모든 과정은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8분 후 09시 15분, 자신의 항공대가 야마토 공격을 위해 출격한 사실을 알리는데, 이때 미처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알레이 버크 제독(당시 대령)이 상관인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보낸 전문과 그 회신이 아주 유명하다.
알레이 버크: "Will You Take Them, Or Shall I?(제독께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할까요?)" 스프루언스: "You Take Them.(자네가 하게.)" |
즉, 스프루언스 제독은 미처 제독의 항명 행위에 아무 질책도 않고, 그대로 야마토를 상대하도록 허가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1945년 4월 7일, 호넷, 요크타운, 베닝턴을 비롯한 수많은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에 공격당한다. 일명 보노미사키 해전(坊ノ岬沖海戦)이다.
무사시가 양현에 골고루 어뢰를 맞아서 함내 구획이 균등하게 침수되는 바람에 오히려 격침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무사시는 잠수함에게 최후를 맞았다는 낭설까지 돌았다. 해당 전투의 전훈을 살려 미군의 조종사들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야마토를 공격할 때 좌현에 집중 공격을 가했다. 그래서 야마토는 이 해전에서 좌현에 9발의 어뢰를 맞은 반면 우현에는 단 1발의 어뢰만 피격 당했다.
그러나 야마토는 효과적으로 반격할 수 없었다. 일본군/무기체계에도 나오지만, 대공포 자체가 결함투성이이었던 것이다. 일본군 주력 대공포인 96식 25mm 고각기총은 조준기가 형편없고, 손으로 돌려야 하는 탓에 구동속도가 느려서 적기를 조준하기가 힘들며, 사격시 진동도 심했고. 탄창도 고작 15발짜리였다.
이것도 모자라서 상당수 고각기총은 노천식이었다. 제대로 된 대공포탑에 들어간 고각기총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구경 대공포인 89식 12.7cm 40 구경장 함포는 그럭저럭 성능은 나왔지만 일본의 사격통제시스템을 감안하면 역부족이었다. 18.1인치 주포는 3식 통상탄을 발사할 수 있었지만, 대공 성능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일본은 40mm 대공포가 없어서 25mm가 그 영역까지 떠맡아야 했기에, 일본의 대공포수들은 사거리가 짧고 위력이 부족하다며 혹평을 퍼부었다. 심지어 대공포의 탄약이 떨어지면, 미군의 공격이 퍼부어지는 갑판을 달리며 새로운 탄약상자를 받아와야 했다.
이 와중에 미군기들은 기관총탄은 물론이고 각종 로켓탄까지 갑판 위에 퍼부어댔고, 그때마다 대공포 사수들은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특히 후방 부포탑에 떨어진 항공폭탄이 치명적이었다. 폭탄이 부포탑의 장갑을 그대로 관통하고 뒤이어 부포 탄약고가 폭발하면서 후방 보수반원들이 전멸한 것이다. 왜 이 꼴이 났냐 하면, 모가미급 중순양함이 경순양함으로 위장했을 때 달았던 3연장 155mm 포탑을 중순양함으로 개장하면서 떼어냈는데, 이걸 야마토의 부포로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이 포탑의 장갑이 25mm로, 종이장갑으로 유명한 치하의 전면장갑 두께와 동일했으니 방어력도 제로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승조원들은 적의 공습은 물론이고 배의 불길과도 싸워야 했다.
야마토 함장 아루가 코사쿠 대좌는 빗발치는 어뢰들을 몇 번이나 피하는 신기의 조함술을 보여줬지만, 전부 피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게다가 미군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좌현으로만 어뢰를 퍼부었다. 배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배의 우현 격실에 물을 주수할 수밖에 없었고, 승조원들을 탈출시킬 시간도 부족했다. 결국 수많은 승조원들이 비참하게 개죽음을 당했다. 일본군 수뇌부가 바랐던 장렬한 싸움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미군기가 피격되어 떨어졌지만, 하늘이 3이고 적이 7인 상황에서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오키나와 전투를 일컬어 '철의 폭풍'이라고 할 수준이었으니 그걸 당한 야마토는 바다 위의 도살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야마토 주변의 배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경순양함 야하기를 포함해서 호위하던 구축함들은 처참하게 박살났다. 무사한 것은 야마토 뒤에 있는 행운함 유키카제와 하츠시모 뿐이었다.
영문 위키와 일본어 위키의 전함 야마토 문서는 3차례에 걸친 대공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서술하므로 관련 내용은 그쪽을 참조하자.
9.4. 불명예스러운 최후
폭발하는 야마토와 함께 거함거포주의는 막을 내렸다. 왼쪽 구축함은 아키즈키급 후유츠키. |
결국 야마토는 약 117대의 항공기에게 다수의 어뢰와 폭탄에 피격 당하고 배가 기울어졌다. 2시 17분경, 마지막 어뢰가 함에 명중하자 경사각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게다가 보수반원 전멸로 진압을 못한 후방 부포탑의 유폭으로 인한 화재와 함 정면부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전체 탄약고의 온도가 급상승하여 적색 램프가 울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처리할 인원도 시간도 없었다.
야마토가 더 이상 기동이 불가능하며 곧 침몰할 것임을 보고받은 이토 세이이치 제독은 작전 중지와 퇴함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통신시설 파괴로 승조원 중 대다수가 퇴함 명령을 듣지 못했고, 이미 함이 급격히 기울어진 상황이라 탈출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당시 함교 상부 사격 지휘소의 생존자 증언을 보면 함교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것은 바다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연통을 통해 해수가 유입될 때 거기에 같이 휩쓸리는 승조원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2시 23분 2번 포탑의 탄약고가 유폭했다. 화재가 탄약고로 번져 유폭했다는 설과 배가 기울면서 탄약이 쏟아져 유폭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때의 폭발은 전복되는 과정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함이 전복되는 충격으로 유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유폭으로 거대한 버섯구름이 솟구쳤고 뒤이어 완전히 전복된 함미부 3번 주포탑 혹은 기관부도 폭발했다. 두 차례 대폭발이 발생한 직후 2번 주포탑 폭발로 인해 해당 지점에서 함수와 함미가 분리되며 두 동강이 난 야마토는 바닷속으로 기울어지며 완전히 침몰했다. 폭발 위력이 매우 거대하여 폭음은 100㎞나 떨어진 규슈 남부까지 들렸고, 폭발연기는 160㎞ 거리에서도 관측되었으며, 퇴함한 승조원 중 대부분이 폭발에 휘말려서 사망했다. 버섯구름은 6㎞ 고도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함께 출동한 함정 중 피해가 적었던 3척인 구축함이 살아남은 승조원들을 구조하여 귀항하였다. 전체 3000명 중 단 269명에 불과했다.
9.5. 침몰 이후
야마토의 잔해 |
현재 야마토는 북위 30도 43분, 동경 128도 4분, 나가사키 현 단죠(男女)군도 남방 176km, 수심 345m 지점에 침몰해 있다.
선체는 두 동강나 함수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채 북서쪽(방위 310도)에, 함미는 동쪽(방위 90도) 방향에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진흙에 덮혀 있다. 1번 포탑 바벳은 온전하지만 2번 포탑 바벳은 탄약고 폭발로 인해 남아있지 않고, 함수의 국화문장은 남아있기는 하나 이전 탐사에서는 확인되었던 금박이 박리현상으로 인해 2016년 탐사에서는 남아있지 않았다. 함수 끝 방향이 일부 붕괴되었으며, 함수는 전체적으로 강판의 열화에 의해 붕괴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3개인 주포탑과 2개인 부포탑은 모두 전복시 빠져버렸고 탑처럼 해저에 박혀있는데, 주포 몸체는 진흙속에 박혀 관찰되지 않는다. 2번 주포탑은 심하게 파손되어 있는데, 이는 침몰 직전에 일어난 대폭발이 2번 포탑의 탄약고 유폭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1번과 3번 주포탑은 손상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1번 주포탑이 가장 온전한 모습이며, 상부, 하부 급탄실도 보존되어 있다. 부포탑도 손상이 별로 없었다. 4개 스크류 중 3개는 본체에 남아있지만 1개는 부서진 채 빠져버렸다. 침몰시 스크류 축이 부러지며 빠졌다고 생각된다. 함선 앞부분엔 어뢰로 인한 구멍이 보이고 그 외 손상이 있지만 세부 손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9.6. 양측의 피해
이 전투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의 손실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미군은 비행기 5대가 격추, 52대가 손상을 입어 그중 5대가 수리 불능으로 버려지고, 2대가 해상에 불시착, 1대가 가던 중 원인불명으로 추락하여 총 13대를 손실, 또 다른 자료에선 전투기 3대, 급강하폭격기 4대, 뇌격기 3대가 격추되어 총 10대를 손실. 일본어 위키에서는 여기에 더해 47대의 미군기에 손상을 입혔다고 하고 있다.
일본군은 전함 야마토와 경순양함 1척, 구축함 4척이 침몰했다. 인명 피해에서 미군은 전사·실종자 총 13명, 일본군은 전사 총 4,044명, 또 다른 자료에선 미군은 조종사 4명, 항공승조원 8명이 사망하여 총 12명, 일본군은 야마토에서 3,055명, 야하기를 포함한 제2수뢰전대에서 1,187명이 사망하여 총 4,242명.# # 저러한 큰 손실 차이를 내며 연합함대의 자존심은 그렇게 태평양에 가라앉았다.
아무리 배와 비행기의 싸움이라고 해도 상당히 터무니없는 교환비인데, 전함 사우스다코타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호위하면서 다른 군함과 공동 격추로 26대나 떨궈버리고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 함대를 비행기로부터 보호했다. 물론 전함 사우스다코타의 경우에는 어느정도 완성된 함대 원형진, 명품 대공포가 전부 갖추어져 있었던 반면에 야마토는 그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참한 전과인 건 사실.
물론 복엽기 하나도 못 잡고 빌빌대다가 영 좋지 않은 곳에 어뢰를 맞아서 작전을 말아먹고 가버린 전함도 있기는 있다. 다만 이 친구는 후드를 격침시키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타격을 날리는 공이라도 세웠다. 말레이 해전처럼 전함 2척을 손실하면서 항공기 6대를 격추시키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물론 말레이 해전의 경우 전함 1척은 1차 대전 시 건조된 구식 전함에 별 개장도 못 받은 상태임은 감안해야겠지만.
결국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소중한 목숨을 값비싼 수업료로 지불해가며 입지를 탄탄하게 쌓아온 항공모함에게 주도권을 상실당한 전함은 마침내 초거함 야마토급의 격침과 함께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맞이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야마토의 침몰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가진 최대의 함선이자, 연합함대의 자랑이었던 함선을 미국의 본토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그냥 갖다바쳤다. 이를 본 미국은 카미카제에 이어 자신들의 최고 전함까지 자살공격에 쏟아붓는 일본 제국을 일반 공격으로 굴복시키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원자폭탄의 실전 투입 의견이 강해졌다.
여담이지만 야마토를 공격하던 도중 격추된 헬다이버의 조종사는 아주 가까이에서 야마토가 침몰하는 하이라이트를 보고 나서 비행정에게 구조되었다고 한다. 불행히도 후방 기총사수는 익사했다.
10. 격침의 의미
10.1. 일본
야마토 최후의 출격은 일본 제국 특유의 답이 없는 무의미한 짓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오키나와로 출격하는 것은 당시 전황으로는 자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부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군 수뇌부에서 그런 반대 의견을 누르기 위해 한 말이 "병력을 남긴 채 패전한다면 연합함대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였고, 그 말에 모든 반대 의견이 쑥 들어갔다고 한다. 설득을 포기했기 때문이지만. 즉 출격 자체가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히로히토도 "해군이 항공작전 말고 수상함 작전은 안 하느냐"며 은근히 부추겼다. 천황께서 이러시는데 누가 감히 반대하겠느냐 말이다. [14]
그래도 제대로 된 작전이라도 세웠다면 좀 나았을 것이지만 하필 일본군이라서 그저 닥치고 적이 진을 치고 있는 오키나와로 반자이 어택을 해버린 것. 안 그래도 모자라는 전력으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면 깨지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해전 결과는 미군은 전사·실종자 총 13명인데 비해, 일본군은 야마토와 기타 함정을 합쳐서 총 4,044명 전사. 겨우 비행기 13대와 13명인 적군을 4,044명인 군인과 세계 최대이자 최강일지도 모르는 전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4척하고 바꿔먹은 거다! 날려먹은 경순양함과 구축함도 보통 배가 아니고, 일본에서는 그래도 정예부대라는 제2수뢰전대다. 이런 식으로 무의미하게 소모하면 답이 없다. 미군의 공격을 얻어맞기만 하다가 죽었으니 연합함대의 체면은 완전히 망가진 셈. 일본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만족했을지 몰라도...
어차피 살아남았어도 구레 군항 공습 등 공습으로 격침당했거나, 미군에게 노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제국의 수뇌부들로선 USS 야마토를 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된 작전도 안 세우고 야마토를 사지로 내보낸 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뒤통수를 맞게 되는데, '나라의 자랑'으로 불리며 일본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가 전후 미군에게 넘어가 성조기를 휘날리는 USS 나가토가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성조기를 계양한 나가토의 영상을 남겨놓았으며, 나가토는 미군의 핵실험에 동원되어 침몰하였다.
물론, 야마토 입장은 USS 야마토가 되는 것이 더 이득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미군이 꽤나 잘 굴려먹었을 것이다. 일단은 일본 최고의 군함이다 보니 관리도 잘 되어있고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진 탓에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아서 아주 깨끗한, 마치 새 것 같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종전 후 몇 년 뒤 한국 전쟁이 발발했으니 인천 상륙 작전에 화력지원을 나온 USS 야마토를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야마토를 박물관으로 현재도 볼 수 있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본의 숙적이자 미 해군 최고의 수훈함이었던 엔터프라이즈까지 해체되던 판에 굳이 적국의 함선을 박물관으로 남겼을지는 미지수. 2차 대전 후 오퍼레이션 크로스로드에서 나가토를 비롯한 많은 함선들이 최후를 맞이한 것을 감안하면 특히나 더 그렇다.
물론 다른 나라는 이렇게 미련하게 전함을 사용, 아니 낭비하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평가 문단을 보면 '타국 주력함과의 전과 비교' 항목이 있는데, 모든 전함들이 전쟁 내내 구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야마토는 비밀 병기라는 이유로 숨겨지며 아무런 외교적, 전략적 이득도 없이 적군의 격침 기록만 늘려주었다.
10.2. 미국
미 해군 입장에서 야마토는 무조건 격침시켜야 했다. 세계 최대의 전함이자 일본 해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여기에는 미 해군 항공대의 사정도 한몫을 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항공모함 전단을 유지하려면 항공모함이 전함보다 세다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사시도 잠수함에게 격침되었다는 설이 나돌 정도였으므로, 항모의 가치를 보여주려면 일본군의 1급 전함을 함재기로 격침시켜야 했다.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전쟁이 끝나면 국방예산이 축소될 것이므로 공군의 군축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이런 어필은 꼭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야마토가 출격하자, 미 해군 항공대는 야마토를 침몰시키기 위해 적극으로 나섰고 결국은 격침시켰다. 세계 최대의 전함도 격침시키고 항모전단의 가치 어필도 했으며 피해도 매우 적었으니 미 해군에게 야마토는 엄청난 선물 보따리였다. 하지만 전후 냉전 와중에도 군축 바람은 어쩔 수 없어서, 제독들의 반란까지 겪어야 했다. 물론 이건 핵 만능주의의 발호와 공군이 홍보를 너무 잘한 것도 있다.
11. 번외편: 과달카날 해전에 불참한 이유
카도쿠라 소우지 중장[15] : 연합함대는 아직 무츠도 있고, 나가토도 있으며, 세계 제일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 야마토도 있다! 그렇다면! 대함거포를 지금 이외에 언제 쓴단 말인가?
우가키 마토메 중장[16] : 하지만, 카도쿠라...
카도쿠라 소우지 중장 : 전함을 동원해 최후의 총공격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닌가?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 : 카도쿠라 사령관,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그러고 싶습니다.
카도쿠라 : 왜 하지 않는가?
구로시마 : 하지만...
카도쿠라 : 하지만, 뭔가!
우가키 : 실은... 기름이 없다...
카도쿠라 :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2011년작)에서 나오는 대사. 영상[17]
우가키 마토메 중장[16] : 하지만, 카도쿠라...
카도쿠라 소우지 중장 : 전함을 동원해 최후의 총공격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닌가?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 : 카도쿠라 사령관,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그러고 싶습니다.
카도쿠라 : 왜 하지 않는가?
구로시마 : 하지만...
카도쿠라 : 하지만, 뭔가!
우가키 : 실은... 기름이 없다...
카도쿠라 :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2011년작)에서 나오는 대사. 영상[17]
야마토는 과달카날 해전에 참가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트럭 섬까지 내려와서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함 히에이가 미국 구축함들에게 기관포로 두들겨 맞거나 기리시마가 전함 워싱턴에게 격침당하는 상황에서도 연료 부족 등을 핑계로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 영상이나 일본군의 핑계와는 달리 실제로는 미드웨이 등지에서 큰 손실을 입기는 했으나 무츠가 굉침하기 이전 과달카날 해전의 이전 시점은 아직 일본이 확보한 유정들과 연결되는 수송 라인은 무사히 가동되고 있는 데다 비축 물자들도 남아있던 상황으로 넉넉하진 않아도 물자가 부족하다고 전함을 전선에 내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하찮은 싸움에 내보내면 연합함대 체면이 깎인다는 게 이유.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독일은 최신예 전함인 비스마르크를 그런 하찮은 임무에 투입하여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시키고, 신예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중파시키며 영국 해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물론 그 뒤에 뭇매 맞고 가라앉았지만 적어도 용감하게 전투해 공을 세운 뒤의 일이므로 야마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실 독일 해군으로선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독일 해군 재건 프로젝트인 Z계획은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면서 말아먹었고, 그나마 있는 해군은 노르웨이 침공작전 당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장갑함 그라프 쉬페는 남대서양에서 침몰당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당시 히틀러가 소련을 노리고 있으니 자칫하다간 건조 중인 함선들도 히틀러의 변덕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독일 해군이 보유한 최대의 전함인 비스마르크가 만약 전공을 세우고 귀환한다면 그나마 약한 독일 해군의 입지도 나아지진 않을까 하여 출격한 것. 뭐 결과는 한심하지만, 후드를 침몰시키고 30 vs 1로 맞다이를 까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가라앉았고 이때 남긴 인상이 영국 해군이 자매함의 스펙을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저렇게 댄 핑계인 연료가 부족했던 원인 중 하나가 해군과 육군 사이의 알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반 국가에서는 정부가 산업체를 통제하거나 직접 석유를 뽑아올려서 정제한 뒤 육군과 해군에 분배하며 내부 체제가 복잡괴기하기로 유명한 나치 독일도 군수장관 슈페어가 이 일을 전담했고, 그래도 갈등이 심해지면 히틀러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은 전시생산국이라는 행정조직을 따로 설립해 자원 배분과 전시생산 우선권의 결정을 맡겼다. 그러나 일본군은 정부 통제를 받지 않고 해군과 육군은 견원지간이라는 사정 때문에 이는 불가능했다. 덕분에 일본군은 해군과 육군이 각각 따로따로 유전을 배분받아서 제각기 직접 석유를 정유해서 쓰고 있었으며, 원유나 정유소를 공유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해도 심각했을 석유 부족이 훨씬 더 심각해졌다.
과달카날 해전 당시에도 일본 해군이 배정받은 인도네시아의 유전들은 정유시설이 이미 파괴된 상태였고 육군의 정유시설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기껏 배정받은 유전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그나마 바로 쓸 수 있는 질 좋은 원유를 넣고 다니다가 화를 당한 배가 다이호. 야마토가 출격도 안 했는데 기름이 없는 이유는 과달카날에서 작전하는 다른 함들에게 일단 자신의 연료를 보급해줬는데 위의 이유 때문에 야마토가 그 후에 연료를 보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야마토의 정규 최고속도가 27노트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과달카날 해역으로 출동하는 일본 전투함대의 속도는 라바울에서 과달카날 섬까지 평균 30노트였으니, 만약 야마토가 과달카날로 진출했다면 그 3노트나 느린 속도 때문에 항해 도중에 함대 자체가 미군 항공부대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과달카날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라바울이나 트럭 섬으로 회항하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 1930년대 초반에 야마토급의 제원을 정하는 과정에서 20만 마력/30노트 안이 유력하게 검토되다가 그만한 속도는 앞서 설명했듯이 배수량 폭증과 과도한 비용 문제로 기각당했다는 점에서 만약 20만 마력/30노트가 야마토의 기관과 속력으로 채용되었다면, 야마토는 과달카날 해역에서 보다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미국의 경우 야마토와 속력이 비슷한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를 적극적으로 쓴 점을 들어 야마토가 해상 호텔로 있었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는 동 해역의 제공권 문제도 컸다. 당시 과달카날은 제공권을 활용할 수 있는 낮에는 미국이, 항공기 활동이 제한되는 야간엔 야전에 목매던 일본 제국이 제해권을 지니고 있었다. 30노트인 빠른 속력을 가진 공고급이 아니면 해가 뜨기 전까지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기가 상당히 버거웠다. 반대로 만일 일본군이 제공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면 미국도 전함을 쉽게 투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에 근거한 축차투입으로 제공권 상실을 자초한 것이 바로 일본군 자신들이었다는 것. 점감요격작전이 상정한 대로 본토 방위전이었다면 침공군의 항공 전력을 일본의 항모전력으로 소모시킨 상황에서 주력 전함 부대는 본토의 기지항공대의 지원 하에서 싸울 수 있지만(실제로 과달카날 전역 당시 미국의 항모 전력은 일시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2차 대전에서 실제 벌어진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에서 점감요격작전식으로 함대를 운용한 결과 정작 전함이 투입될 차례에는 상대방 육상 비행장의 제공권이 건재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대전 전반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항공주병론자/전함무용주의자의 대표격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임에도 항모를 보조전력으로 간주하고 전함은 아끼는 이런 모습에서 실제 가장 큰 문제는 수뇌부들의 보신주의였다는 주장[18]마저 있다.
이런 문제는 야마모토의 후임들도 여전해서, 레이테 만 해전 한 달 전 연합함대 사령부는 함대결전을 지휘한다는 명목조차도 내팽개친 채 사령부를 육상으로 이동시킨다는 명목 하에 본토로 도주, 사령부가 본토로 도망치는 와중에 미군 수송선단과 동귀어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함대의 사기는 높지 못했고 사령부의 작전 목적을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것에도 실패, 레이테 만 해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난다. 그나마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삼고 전함을 그 호위로 돌릴 개념은 있었던 오자와 지사부로가 최후의 사령장관이 되었을 때는 이미 지휘할 함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연료나 속도보다도 심각한 문제로 야마토가 함대결전사상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져서 운용되고 있었다는 점이 있다. 함대결전사상은 한 번의 중요한 결전으로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수리해가면서 계속 운용하기 위한 예비 부품을 준비할 필요가 별로 없다. 게다가 야마토는 최대의 전함이라는 특성상 부품 제조 자체가 상당한 난이도와 시간 및 정성이 필요한 문제점까지 있다. 그 결과 주포와 같은 일부 중요한 부품은 전투중 소모 혹은 파손시 즉시 교체할 예비 부품량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당장 야마토의 주포는 제작 과정이 너무 복잡한데다 포신 내구 수명도 짧았기 때문에 실사격 훈련으로도 써먹을 게 못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보통 함포로 실사격 훈련을 하는 데 쓰는 포탄의 수가 100발 정도는 거뜬히 넘어가는 것을 생각할 때 여벌 포신도 없이 포신 내구 수명이 200발 정도밖에 안 되는 건 치명적이다. 즉, 함부로 해전에서 굴리다가 약간인 파손이 발생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부품 수급 문제로 상당 기간 전력에서 이탈해버린다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마토는 1회용 전함이란 말도 있다.
[1] 우가키 마토메, 전초록.[2] 日米全調査 決戦戦艦大和の全貌[3] 우가키 마토메, 전초록. 이 항모는 지근탄으로 기관실이 파손된 화이트 플레인즈였고 흑연은 연막 살포였다.[4] 原勝洋 '日米全調査 決戦戦艦大和の全貌' 203항[5] 'The World Wonder'd: What Really Happened Off Samar' Robert Lundgren[6] Aircraft Carriers: A History of Carrier Aviation and Its Influence on World Events: 1909-1945. Potomac Books, p.434[7] Yamato (Battleship, 1941–1945) in the Battle of Leyte Gulf[8] 야마토와 나가토는 뛰어난 조함으로 어뢰를 모두 회피하긴 했지만, 양 함 모두 폭탄이 명중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9] 이 상황에는 시나노의 함장이 아처피시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서 다른 미군 잠수함들이 근처에 더 있고, 그 잠수함들과 공동으로 작전 중일 것이라고 착각한 것도 있다. 문제는 당시 아처피시가 초계임무 중이라 다른 미군 잠수함들은 근처에 없이 아처피시 한 척 뿐이었다는 거.[10] 키티호크급 항공모함 3번 함인 CV-66 USS America의 경우로 인공어초화 겸, 차기 항공모함 건조시 항공모함에 대한 위협과 그 공격에 의한 피해 수준을 수집, 반영하겠다는 이유로 표적함이 된 것. 정말로 오만가지 무기들이 다 동원됐는데, 대함미사일, 함포, 자유낙하폭탄, 레이저 유도폭탄, 기관포, 어뢰, 기뢰 등등 온갖 방법으로 테스트하다 바다로 수장된다.[11] 뒤에 나올 거대한 버섯구름의 주인공 되시겠다.[12] 1944년에 필리핀을 잃어버린 것이 일본군에 치명타가 된 이유가 이것이다.[13] 근데 워낙 승조원이 많다 보니 야마토에 실어 놓은 배급할 돈과 물자 구입비가 자그마치 51만 805엔, 지금 가치로 10억 엔이었다.관련 4컷만화 한화 약 120억 원 열도의 기상[14] 이것도 무능한 고위직들이 그냥 책임지고 단체로 할복해버리면 끝나는 일인데, 자기들이 죽기싫다고 유능한 함장, 장교들과 수병들만 개죽음에 내몬 일이니 안타깝기 따름이다.[15] 영화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다.[16] 당시 연합함대 참모장[17]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그 유명한 "아부라가 나인다" 이거 맞다.[18] 御田俊一『帝国海軍はなぜ敗れたか』